소설리스트

군터-817화 (817/1,064)

817화

솔롬의 대소사를 논하는 정기회의. 솔롬의 중신들은 모두 참석해야 하는 자리로, 본래 매일 열리던 것을 군터가 사흘에 한 번 여는 것으로 바꾸었다. 매일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그 자체로 피곤할뿐더러, 회의에서 나오는 화제라는 것들이 대부분 시답잖은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대사라고 할만한 것이 매일 튀어나온다면 어찌 그것이 중대사겠는가?

"이번 안건은……."

보리스가 홀로 일어나 회의를 진행했다. 군터는 이번에도 역시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들을 보다가, 그 오른쪽에 앉아 보리스가 하는 말을 부지런히 기록하고 있는 서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 보는 녀석이었다. 이전 녀석도 젊었었는데, 이번 녀석은 그보다도 더 젊었다. 그런데, 묘하게 노련한 느낌이 묻어나기도 했다. 기껏해야 듣고 받아적는 것이 전부인 일을 할 뿐인데 거기서 무슨 노련함을 느끼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 있었다. 위화감이라고 해야 할지, 어색함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회의가 파한 후, 보리스는 언제나처럼 마지막까지 남아 군터를 기다렸다.

"수고했다."

"별말씀을."

수고했다는 한마디가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말 같은 것임을 보리스는 한참 전부터 깨달았다. 회의를 진행하는 내내, 부친의 눈이 대부분 감겨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기 말이다. 처음 보는 얼굴이던데."

"아, 예. 이번에 새로 임명한 자입니다. 카인이라는 자지요. 몰락한 귀족 출신이라더군요."

몰락 귀족이라. 묘한 느낌이 든 것은 그래서였나. 확실히 귀족으로 나고 자란 자들은 남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게다가 몰락 귀족이라고 하면, 일반 귀족과는 또 다를 수밖에 없을 터.

"관심이 가셨나 보군요."

"글쎄, 처음 보는 얼굴이지 않으냐."

군터는 카인이라는 젊은 서기에게서 받은 느낌을 그렇게 치부했다. 처음 보는 얼굴에, 흔치 않은 신분 때문이었다고,

***

"상세하군."

보리스는 카인이 작성한 회의록을 훑어보았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꼼꼼하게 작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볍게 흘리듯 한마디 했던 것도 토씨 하나 들리지 않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더 보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만하던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렇게 조심스러워 할 필요 없네. 신분 확인도 끝났고, 자네는 이제 어엿한 서기관이야. 이렇게 일을 꼼꼼하게 잘했다면 자부심을 가져도 괜찮아."

"과분한 말씀입니다."

"흐음."

겸손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다.

물론 어디에나 예외는 있겠지만, 보리스는 그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귀족이면서도 어지간한 평민들보다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카인이 썩 마음에 들었다. 몰락귀족이기 때문인지, 자신을 낮추고 매사에 조심하는 버릇이 든 듯했다. 이런 경우 사람이 그저 소심해지기 쉬운데, 카인은 소심하다기보다는 신중했다. 이런 사람은 아무래도 믿음이 가기 마련이다.

"집은 구했나?"

"예. 신경 써주신 덕분에."

카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전까지 여관방에 머물고 있던 카인은 외성에 있는 자그마한 집을 얻었다. 보리스가 그의 봉급을 가불해준 덕분이었다.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당분간은 참도록 하게."

"아닙니다. 황도를 떠나 떠돌던 시절에는 질리도록 노숙을 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호사지요. 여관방에 비교해도 그렇고요."

"그래? 여관의 객실도 별로였던 모양이군."

"밤공기를 피해 몸만 누이면 된다 생각한지라……."

"하하. 리비암에 머물던 시절은 다 잊은 모양이군.

아, 이런 말은 조금 그렇겠군."

"아닙니다. 음. 가문에 있던 시절은… 잊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겠지요."

"…그래. 그랬겠군."

달갑지 않은 기억을 일부러 들추었음에도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것을 제외하면 담담한 기색이다. 보리스는 속으로 카인에 대한 평가를 조금 더 높였다.

"말했듯, 회의는 사흘에 한 번이네. 그때마다 동석해서 회의록을 작성하면 되고, 그 외에는 내 집무실 옆에서 머물다가 회의가 있을 때마다 와서 역시 회의록을 작성하면 되네. 말하자면 상시 대기인 셈이지."

"예."

고되다면 고된 일이다. 보통 서기는 두 명을 두고 교대로 근무를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보리스는 일부러 카인 홀로 일을 하게 했다. 가까이에 두고 꾸준하게 살펴볼 요량에서였다.

'신분 확인은 됐다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지.'

현재까지 본 모습만 놓고 보면 꽤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렇기에, 보리스는 더욱 신중해졌다. 어쩌면 자신의 측근이 될지도 모를 인재가 아닌가. 받아들인다면 아낌없이 믿음을 줄 테지만, 그전까지는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야 한다. 면하게 살피고, 또 살펴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리라.

***

"뭐? 그게 정말이냐?"

"예. 보리스 공자님께서 그자를 등용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공자님을 따라다니며 서기 일을 하고 있고요. 직접 확인한 사항입니다."

실비아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던 것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자세한 내막까지는……. 한번 알아볼까요?""

"아니, 됐다."

"허면"

"내가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야."

"아가씨께서 직접 말입니까? 그러면 보리스 공자께서……."

멈췄던 손이 다시 부드러운 갈기를 쓸었다.

"어차피 내가 공연장에 들락거린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을 거야. 어느 날 갑자기 가수가 사라졌다면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래도……."

무엇을 우려하는지 안다. 혹여 괜한 의심을 사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겠지. 하지만 의심한들 어쩔 것인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누구도 내 일에 간섭할 수는 없어."

다름 아닌 부친이 직접 한 약속이다. 요즘 한창 후계자 노릇에 맛을 들인 오라비도 거기에 끼어들지는 못할 거다. 그랬다가는 부진에게 거스르는 셈이 되니까.

실비아는 그날 바로 보리스를 찾아갔다. 보리스는 갑작스레 찾아온 동생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 없이 웃으며 맞이했다.

"어서 와라. 별일이구나. 네가 말도 없이 날 찾아오다니."

"별일인가?"

실비아는 오라비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말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것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 그러니까 아직 어렸던 시절에는 서로 불쑥 불쑥 방문을 여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같은 피를 나눈 사이에 거리감이라는 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

나이를 먹어가며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고, 관심사가 갈리면서 대화가 뜸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서로에게 어색함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지.'

보리스 내외가 그녀의 삶에 은밀히 간섭하면서부터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절대 알 수도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카인. 데려갔다며?"

"음? 아아. 그래. 네가 즐겨 찾던 가객…아니, 가수. 아니면 음유시인이라고 불러야 하나?"

노래를 부를 뿐인데, 이름은 왜 이리 여러 가지일까.

사람은 하나인데, 바라보는 눈은 제각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리스도, 실비아도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건 개의치 않았다.

"그래. 갑자기 없어졌더라고."

"음, 그렇게 됐다. 무대에서 노래나 부르기에는 아까운 재능인 것 같아서 말이지."

"노래 부르는 것 외에 다른 재주도 있었나 보네. 아무튼, 이야기라도 해주지 그랬어. 내가 자주 찾아가는 거, 알고 있었잖아? 몰래 지켜보는 건 오라버니 특기니까. 아니, 취미라고 해야 하나?"

보리스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그러자 이번에는 실비아가 흐릿하게 미소지었다. 어딘지 서늘하게 느껴지는 웃음에, 보리스의 표정이 저절로 굳어졌다.

"모르면 어쩔 수 없지. 그냥 섭섭하다는 말을 하려고 왔어. 안 그러려고 했는데, 표현하지 않으면 또 오라버니가 실수할 것 같아서."

"실수?"

"이건 알고 있잖아. 모르는 척은 하지 마. 그러면 내가 정말 심하게 서운해질 것 같으니까."

"……."

"금방 한 말이 사실이라고 믿을게. 노래나 부르던 사람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서기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그럴 수도 있겠지."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구나."

"오해?"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자의 재주가 쓸만하다고 생각해서 뽑아 쓴 것뿐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전의 일이 있다 보니, 의심부터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아무튼, 알겠어. 오랜만에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좋네. 속도 좀 풀리는 것 같고."

"그래. 종종 이야기하자."

"그래도 괜찮겠어?"

"……."

"농담이야."

실비아가 웃으며 돌아서고, 방문이 닫힌 후에야 보리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이거야 원.'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꽉 막히는 답답함이다. 보아 하니 동생에게 오해와 미움을 단단히 산 것 같았다.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일전의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꾹 참고 있었고, 이번에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서 참아뒀던 것까지 폭발한 것인가.

'거 참.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당돌한 동생에게 대차게 혼이 났지만, 화보다는 슬픔이 더 컸다. 자신을 똑바로 보던 동생의 눈, 그 눈에 떠오른 것은 분명 적의였다. 아주 열기는 했지만.

'원망을 사도 이쩔 수 없지. 그럴만했으니.'

필요한 일이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물론 지금도 변함이 없고,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은 원인과 과정, 결과로 이어진다. 한쪽에서 밀었으면, 한쪽은 밀려나는 것이다.

'엉켰다면, 다시 풀어나가는 수밖에.'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하나뿐인 누이와 계속 서먹서먹하게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자그마한 균열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무시하고 넘기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비록 실비아는 여인이고, 후계다툼의 대상이 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사정이 낫긴 하지만,

'아니지. 무슨 이런 얼간이 같은 생각을.'

동생이니까 그런 거다.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혈육이기에 혈육을 아끼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무슨 얄팍한 계산이 필요한가.

보리스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동생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