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화
"제 이름은 카인 모하디트입니다."
"귀족이었나."
"예. 지금에 와서 내세울 만한 이름은 아닙니다만, 귀족입니다."
"모하디트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저희 가문은 리비암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황도 말인가?"
모하디트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으나, 리비암은 아니었다. 누가 모르겠는가. 이 거대한 제국의 심장, 즉 수도의 이름인데 말이다. 당연히 로우렌도 알고 있었다. 수도 귀족이라니, 카인의 신분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했다.
"예.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지만, 제법 역사가 깊은 가문이지요.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혹 황도에서 불었던 피바람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글쎄. 황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워낙 여럿이라 말이지. 피바람이라 할 만한 정도면, 단순한 정쟁은 아닌 모양이군."
"폐하께서 승하하신 후, 황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 간에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암투라고는 하지만, 거의 전쟁이나 다름없었지요. 대낮에도 사람이 죽어 나가고, 온갖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싸움을 벌여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 가문도 휩쓸리고 말았지요."
"귀족 가문들까지?"
"귀족이라고 한들, 저 위에 앉아있는 자들에게는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때에 불과합니다. 저희 가문은,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지요."
"흐음. 그렇다면, 자네가 신분을 숨기고 이곳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은 자네 가문의 적들이 쫓아올 것을 우려해서인가?"
"그렇습니다. 또한, 가문이 힘을 잃은 지금, 모하디트라는 이름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서이기도 하지요."
"그렇군."
역시 카인은 똑똑한 사내였다. 카인이 스스로 자신이 귀족이라는 것을 밝혔음에도 로우렌이 여전히 하대하는 것을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는 것부터가 그랬다.
물론 속으로야 어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겉으로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현실 인식을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 자네는 여전히 쫓기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문이 무너지던 당시에 나이도 그리 많지 않고, 가문의 중대사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직계가 아니었나?"
"직계였습니다. 다만 제 위로 형님이 몇 분 계셨지요."
"흐음."
카인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로우렌은 카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모하디트 가문의 적들이 얼마나 강대한지는 몰라도, 이곳은 솔롬이다. 황도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이며, 7황자 자콥 트라소프는 현재 황좌에 가장 가까운 존재다. 황도의 그 어떤 귀족도 그에게 밉보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솔롬의 성주인 군터 크렘보르는 그런 7황자의 총신이며 실력자이고,
'문제는 없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로우렌은 카인, 그러니까 카인 모하디트를 받아들이는 데 긍정적이었다. 물론, 카인이 오늘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리비암으로 사람을 보내라."
"리비암… 말씀입니까?"
명령을 들은 수하가 머뭇거렸다. 먼저 리비암이 어디인지 생각했고, 그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을 때는 거리를 생각했다.
"그곳에는 아무런 기반이 없습니다. 게다가, 황도는 아직도 소란스럽다고 들었습니다만."
"대단한 일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그곳에 모하디트라는 귀족 가문이 있었는지, 그들이 어찌 되었는 지를 알아보아라. 가능하다면 그 가문의 직계들이 어찌 되었는지도."
"예. 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는지, 처음보다 목소리가 가벼워졌다. 로우렌은 수하까지 내보낸 후,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귀족이라 이거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정말 사실로 밝혀지니 조금 우스웠다. 황도의 귀족 가문이라니. 그런 곳의 직계가 지금은 이 먼 곳까지 도망쳐와서 자신에게 자리 하나 내어달라 매달리는 꼴이라니.
'뭐, 이런 게 난세의 묘미 아니겠는가.'
역사, 전통,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없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힘이다. 힘이 있으면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뭐, 나도 아직 자만할 주제는 안 되지.'
로우렌은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아직 아버지의 후광과 보리스 공자와의 개인적인 친분에 기대서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갔을 뿐이다. 자신의 힘으로 이뤄낸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뒷배도 힘이다. 실제로 귀족들은 그들 가문의 힘을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 않은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리스 공자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그를 위해 일하고, 대신 그를 뒷배로 얻는 것이다.
'흠, 말도 안 되는 소리기는 하지만.'
잠깐, 로우렌은 일전에 연회에서 바오룹이 취중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머지않아 성주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보리스 공자에게 대리 통치를 맡길지도 모른다는 말. 당시에는 입을 조심하라고 일축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예 말이 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성주는 원래 정무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일부 자잘한 업무는 보리스 공자가 대신 처리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지.'
순간 달콤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로우렌은 고개를 저으며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런 생각은 생각만으로도 위험하다. 보리스 공자가 후계자로서 지위와 힘을 얻은 것은 분명하나, 여전히 솔롬의 모든 권력은 성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군부의 경우, 성주의 말 한마디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아주 약간이라도, 설령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해도, 성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하면 아주 곤란한 일이 벌어질 터.
'성주의 나이가 올해로 몇이었지?'
오십이었던가? 마흔은 진작 넘은 것으로 알고 있는 데, 가끔 볼 때마다 그 정정함에 놀라곤 한다. 그의 겉모습만을 보고 나이를 가늠하기는 힘들다. 그 정정함 때문에, 어떤 자들은 성주가 앞으로 십 년 이십 년은 더 현역일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끔찍하게도,
'그럴 리는 없겠지.'
한번 떠올리니 자꾸만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에 로우렌은 잠깐 미뤄두었던 업무에 몰두했다. 그렇게라도 기분 나쁜 예감을 덜어내려 했다.
***
"허억 허억……."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손에 쥔 검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이건만, 쇳덩이라도 달린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덜덜 떨리는 손은 금방이라도 검을 놓아버릴 것 같았는데, 그 손으로 억지로 검을 움켜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다."
무뚝뚝한 목소리. 갑옷도 아니고 일반적인 옷도 아닌, 야행복 같은 것을 걸친 사내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몸을 살폈다.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손에도 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그 검은 온통 붉었으며, 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떤 놈들인지 알겠나?"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무장과 솜씨를 보아하니 사막의 암살자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막의 암살자.
그 이름을 듣기 무섭게 무샤라트 트라소프의 턱 근육이 크게 움직였다. 바득 소리를 내며 이까지 갈렸다.
"확실한가?"
"말씀드렸듯, 의심은 가지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모호한 대답이 오히려 더 믿음이 갔다. 이들이 방금 자신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 그림자 검사단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키리스트의 밑에서, 제국의 그늘에서 활약해온 이들이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면 그건 이미 반쯤 사실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와 만나고 싶다."
"그분께서는 지금……."
"결정을 내렸다. 그리 전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그러면 그자가 나를 만나러 올 것이니, 너희는 그저 내 말을 그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모습을 드러낼 때 그랬던 것처럼, 그림자 검사들은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적막함만이 감도는 침실에 남은 것이라고는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 네 구뿐이었다.
***
"카인 모하디트? 내가 아는 그 카인인가?"
"예. 그 카인이 맞습니다."
"그래? 그런데 모하디트는 또 뭔가?"
"귀족이라더군요. 뭔가 사연이 있는 친구라고는 생각했습니다만, 귀족이었을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뭐, 현재로서는 그 친구가 그리 주장하고 있는 것뿐입니다만……."
"재미있군."
보리스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괜찮은 친구라고 보았습니다. 지금 한 자리씩 차지하고서 어쭙잖게 거드름을 피워대는 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자입니다. 해서, 그자를 공자께 전거하려고 했습니다."
"노래를 파는 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머리가 상당히 좋습니다. 눈치도 있고요. 어차피 관리가 되는 데 무슨 특별한 재주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요."
"그래.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귀족이라……."
"황도에서 난리가 벌어졌을 당시에 가문이 휩쓸렸다고 합니다. 적들을 피해 떠돌이 생활을 했었고, 그렇게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것이지요."
"확인은 했나?"
"아직입니다. 리비암으로 사람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그럼 확인이 끝날 때까지 미뤄두도록 하지. 자리 하나쯤 내주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은 피하고 싶군. 만에 하나라도 말이야."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다만, 공자님께 일단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았기에."
"그래. 그나저나 꽤 마음에 들었나 보군. 그렇게 복잡한 사정이 있는 자라면 귀찮아서라도 거를법한데, 굳이 리비암까지 사람을 보내 확인하려 들다니."
"사람은 많지만, 괜찮은 사람은 드무니까요. 간만에 마음에 드는 녀석을 찾았는데, 어지간하면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조금 흥미가 생기는군."
"아마, 공자님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