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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15화 (815/1,064)

815화

요즘 로우렌은 예전에 그가 머리에 허영만 가득한 자들의 취미라고 비웃었던 바로 그 고상한 취미에 재미를 붙였다. 무도회장에 얼굴을 비추고, 공연을 보러 다니며,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오늘도 마찬가지. 마다하는 선물을 굳이 안겨주는, 살짝 허리가 굽은 중년인을 배웅하고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상인 가문 자녀의 성년식이다. 그런 곳에 꼭 가야 하나 싶지만, 그 딸의 아비가 보리스 공자에게 매달 두둑이 후원금을 내고 있음을 상기하면 가지 않을 수도 없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예."

옷을 입혀주던 하인들이 물러난다. 평소와 달리 한껏 차려입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보리스공자를 대신해 얼굴을 비추는 셈이었다. 아무리 든든한 후원자라고 해도 보리스 공자가 일개 상인의, 그것도 차녀의 성년식에 참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이건 나름의 성의 표시인 것이다. 비록 보리스 공자가 직접 오지는 않았지만, 신경 써서 사람을 보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마차를 몰았다. 얼마 전에 마련한 마차였는데, 현재까지는 꽤 만족스러웠다. 사실 시내를 돌아다니는 데 마차는 굳이 필요 없었다. 어차피 돌아다니는 곳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정해져 있는 데다, 그 범위도 걸어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좁았으니, 이 마차는 어디까지나 과시용이었다. 내가 이런 마차를 타고다닐 정도로 부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물론 점잔 떠는 아가씨들과 동승하기 위한 용도도 있고, 하여간 이 비싼 물건은 비싼 값을 충분히 했다. 다른 것보다도 승차감이 상당히 괜찮았다.

"그래. 카인은 불렀나?"

"예. 말씀하신 대로."

카인. 그는 요즘 로우렌이 부쩍 자주 찾는 가객, 혹은 음유시인이었다. 노래 솜씨도 뛰어난 데다 소위 예술을 한다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못함이 없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잘 통했다. 사실 노래 솜씨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말이 통하는 상대를 구하는 건, 적어도 그에게는 정말 힘든 일이었으니까.

제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더니, 그래서 그런지 카인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는 것이 많았다. 책에서 대충 읽었거나, 흘러 다니는 소문을 주워들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지식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었다. 그래. 처음에는 그런 흔치 않은 지식에 끌렸던 것 같다.

'흐음. 신기하단 말이지.'

로우렌은 사람을 가려 사귀었다. 의식적으로 타인에게 경계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보는 기준이 깐깐하다고 해야 할까. 단순히 통성명하고, 용건이 있을 때마다 만나는 일은 흔하지만 정말 터놓고 대화를 나눌 만한 지인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카인은 특별했다. 그리고 로우렌은 그 특별함이 자신의 눈에 띈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했다고 봐야겠지.'

처음 봤던 것은 적당히 술에 취했을 때였다. 바오룹이 시끄럽게 주절대고 있을 때 그 옆에 있었었지. 거기까지는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후는?

'뭐, 대수로운 일은 아니야.'

권력 근처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권력의 끄트머리에라도 매달려서 신세를 바꿔보려는 이들이 한둘이던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일 것이다. 그러지 않는 자들은 그러지 못한 것일 뿐, 기회와 능력만 된다면 누구나 같은 반응을 보일터. 카인은 총명한 자이니 분명 자신에게서 권력의 향을 맡았으리라.

유쾌할 것도, 불쾌할 것도 없다. 로우렌은 카인이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그리고 약간의 능력을 보인다면 적당한 자리 하나 정도는 내어줄 생각이 있었다.

'체면치레는 하겠군.'

요즘 카인이라는 이름이 사교계에 본격적으로 퍼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마련한 자리에 카인을 불러 노래를 부르도록 주머니를 풀고 있었는데, 카인은 그런 사적인 초대에 좀처럼 응하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의 무게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고, 오직 지인을 통한 특별한 초대에만 응하곤 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카인의 이름값을 더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로우렌은 그런 카인의 처신이 훌륭하다고 보았다.

물론 그런 방식은 초대를 거절당한 이들의 노여움을 사게 마련이고, 그 노여움은 종종 대가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카인에게는 그의 지인들이 있었다. 그의 지인들은 대개 초대를 거절당한 이들보다 더 힘 있는 자들이었으니, 그들은 사사로운 앙갚음에서 기꺼이 카인을 지켜주었다.

덜컹!

마차가 한 차례 흔들렸다. 곧바로 마부석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죄송합니다. 돌부리가 있었나 봅니다."

"괜찮다. 앞이나 잘 보거라."

"예에."

어떤 이들은 카인을 권력자들에게만 아첨하는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인에게 있어 그런 자들은 자그마한 돌부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 증거로, 카인은 지금 당당히 상류사회에 반쯤 발을 들이고 있었다.

이게 노래 실력이, 가사를 쓰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카인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사내였다. 게다가 처세술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떠돌이 음유시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신분을 숨기고 솔롬에 들어왔을까?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몰락한 귀족의 후예일지도 모르지. 사실 로우렌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카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의 지식수준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교양에 놀랄 때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그런 모습은, 이지간한 노력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긴 시간 동안 꾸준하게 익혀온 것이 자연스레 표출되는 것이다.

"나리. 도착했습니다."

"음."

마차에서 내리자 대문을 활짝 열고 있는 큼지막한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족히 십여 명은 되어 보이는 하인들이 손님들의 초대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천박한 과시로군.'

대문부터 하인들의 복색까지, 모두 화려하기 그지없다. 누군가는 그 화려함에 매혹되고, 감탄할 테지만 로우렌의 눈에는 이 모든 것들이 우습게만 보였다. 대체무엇을 위한 과시란 말인가.

그는 혀를 차며, 고개 숙이는 하인들을 지나 저택으로 들어섰다.

***

잠깐의 침묵, 혹은 적막.

짝짝!

그 고요함을 깬 것은 자그마한 박수 소리. 이 연회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콧수염이 근사한 중년인이었다.

"훌륭하군! 왜 다들 그대의 노래를 듣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알 것 같아."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아니야. 딸아이는 어떨지 몰라도, 나와… 내 안사람에게는 정말 뜻깊은 노래였소."

그의 옆에는 역시 중년의 귀부인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손수건으로 눈을 만지고 있었다.

"좋군. 좋아. 그나저나 색다른데? 성년식에서 이런 노래를 듣게 될 줄은 몰랐어."

로우렌 역시 흡족한 표정이었다. 카인을 이곳에 데려온 것은 그였으니, 카인을 향한 박수갈채의 삼분지일 정도는 그의 몫이라 할 수 있었다.

"한 생명이 성년을 맞이하는 기쁨도 중요하겠지만, 아이를 낳아 성년이 될 때까지 기른 부모의 공로도 누군가는 알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점을 노래했을 뿐입니다."

"그렇군, 훌륭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이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이 자리에서 누구를 봐야 하는지도 아는 거겠지.'

단순한 계산이지만, 이마저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로우렌은 자신을 치켜세우는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보게, 카인."

"예."

"연회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떤가. 나와 따로 한 잔 더 하겠나?"

"불러주신다면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좋아. 자리가 파하면 내 마차에 동승하세."

성년식의 뒤풀이 연회가 끝난 후, 로우렌은 카인과 함께 그가 종종 들리는 요정(料亭)으로 향했다.

"전에 와본 적이 있나?"

"아니요. 처음입니다."

"그래?"

로우렌은 고급스러운 실내를 아무렇지 않게 따라 들어오는 카인을 보며 눈을 좁혔다. 이곳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자격이 되지 않는 이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카인은 입구에서 직원이 수문병이 검문하듯 마차를 멈춰 세우는 것을 볼 때부터 조금도 어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런 곳에 드나드는 것이 숙하다는 듯.

"사실 말이네. 내가 자네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아."

"그러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역시 의도한 건가?"

"반쯤은…예. 그렇습니다."

"어째서지?"

"알아 봐주시길 바랐으니까요."

예상했던 대답. 로우렌이 고개를 까딱였다.

"이유는?"

"높으신 분의 눈에 들고 싶은 이유야 한 가지 아니겠습니까."

"출세하고 싶은가?"

"네."

"솔직해서 좋군."

피식 웃은 로우렌이 카인의 잔을 채워주었다. 카인은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들었다.

"내가 자네를 올려주면, 자네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로우렌님이 저를 올려주신다면, 저는 로우렌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사람이 된다? 듣기 나쁘지는 않군."

목을 축인 로우렌이 말을 이었다. 이미 본론이 나왔으니, 괜히 에둘러서 갈 필요는 없다.

"그래. 나쁘지 않아. 이차피 자네보다 훨씬 못하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수두룩하니, 자네 하나 적당한 자리에 앉히는 거야 안 될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지. 하지만."

풀려있던 로우렌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 전에, 자네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겠어. 세상 경험 많은 떠돌이라고는 하지 말게. 내게 솔직해지지 않는다면, 나는 자네를 믿을 수가 없어."

"지금은 믿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다만 자네의 노래 솜씨와 재지를 믿고 있을 뿐이네. 자네라는 사람을 믿지는 않지."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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