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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14화 (814/1,064)

814화

"아버지."

보리스는 솔롬의 관리들과 함께 성문 밖까지 나와 군터를 맞이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움직인 것은 근한 달하고도 보름 만에 돌아온 부친을 환영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더 컸다. 성주가 자리를 비운 동안 누가 이 도시를 다스렸는지, 또한 앞으로 그 자리를 이어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유난을 떠는구나."

그간 수고했다는, 그런 부드러운 한마디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예상치 못했기에, 보리스는 슬쩍 부진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정말 그 때문일까?

영문 모를 부끄러움에, 보리스는 헛기침하며 부진과 함께 솔롬으로 들어섰다.

"보고드렸습니다만, 투기장의 인기가 상당합니다. 시합을 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

조금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투기장을 총괄 관리하는 바오룸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단순히 바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나름의 수완을 발휘하여 시합의 인기를 더욱 끌어올렸다. 경기장의 입장료를 받지 않는 대신, 경기를 놓고 벌이는 도박판의 규모를 더 키운 것이다.

'그자에게 그런 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상재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돈 냄새를 맡는 데 재주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쨌거나 바오룸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활약해주고 있었고, 보리스는 그 점이 만족스러웠다.

요즘 들어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로우렌이 소문에 열심히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기분이었다.

"몸이 조금 분 것 같은데."

"예?"

상념을 깨는 부진의 목소리에, 보리스는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팔부터 시작해,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불었다고?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요 며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조금 찌뿌등하기는 했지만…….

"꾸준히 단련해라. 아직 뒷방에 물러설 나이는 아니지 않으냐."

"아, 예."

부자간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사이, 그들은 뻥 뚫린 길을 따라 솔롬으로 들어섰다.

***

평화라고도 할 수 없는 잠깐의 평화, 아니 휴식, 그러나 절대다수의 백성들에게는 이마저도 소중했다. 아직도 거리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경직된 얼굴로 바비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건 이젠 익숙한 모습이었다.

언젠가, 어쩌면 내일 당장이라도 다시 징집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성문이 닫히고, 검문이 강화되고, 길거리에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질지도.

하지만 솔롬의 시민들은 그런 것은 모른다는 듯이 잠깐의 명화 혹은 휴식을 만끽했다. 어쩌면 그들 중 일부는 전쟁이 아예 끝났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하하.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글쎄. 한번 저들 중에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걸."

젊은 관리들은 저 아래 내다보이는, 거리를 지나다.

니는 시민들을 보며 비웃었다. 자신들이 저들보다 우월하다는 태도,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인은 그런 그들을 내심 조소했다.

저들은 귀족이 아니라 관리가 된 평민이다. 관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그 포장을 벗겨보적어도 카인의 눈에는, 이들이나 저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슬슬 들어가세. 바람이 차군."

"그러지."

연회장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카인은 그를 찾는 귀부인들에게 잠깐씩 시간을 내주며 여기저기 얼굴도장을 찍었다.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데 대단한 말솜씨는 필요치 않았다. 그들은 그의 무대를 여러번 관람한 관객이었고, 그에 대해 나름의 환상을 갖고 있었다. 카인이 한 일은 그 환상을 깨지 않으면서 적당히 웃음을 파는 것뿐이었다.

"어머, 그대는 정말 박식하군요. 그런 고사(古事)까지 알고 있을 줄은."

"노래를 지으려면 많은 이야기를 아는 게 중요하니까요. 늘 노력하고 있습니다."

"훌륭해요. 재능에 취하지 않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죠."

어떻게 말하는 알아서 좋게 해석해서 받아들인다.

이유 없는 무조건적 호의는 무척이나 편리했다. 카인은 말을 아끼고, 자그마한 웃음으로 그들의 호의에 보답하면서 동시에 연회장을 꾸준히 살폈다. 지금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이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후원자가 될 여력이나 자격이 없는 이들이었다. 몸에 걸친 것들도 그리 비싸지 않은, 이 자리에 참석하기에 간신히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고, 이들로는 안 된다. 카인이 노리는 대상은 그의 후원자가 될 수 있을 만한, 보다 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를 물색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먼저 다가가서는 안 된다. 이제껏 연기해온 카인이라는 가객의 인물상을 지켜야 하니까.

"여기 있었나?"

"아, 예."

"어찌 혼자서 청승인가.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인데."

"이런 자리가 낯설어서 말입니다."

이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연회장이라는 곳이 영 낮설었다. 이렇게 고상하게 점잔을 떠는 자리는…….

"쯧. 따라오게.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네."

조금 전 테라스에서 우스꽝스러운 오만함을 보였던 젊은 관리. 그가 카인을 이끌고 연회장의 한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무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카인은 그 중심에 있는 한 사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일전에 몇 번 그의 공연을 보러왔던 자였다. 그래서 얼굴이 익숙하기도 하지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것 보다는 근래 유명한 그의 이름 때문이었다.

"오. 유명인사가 오셨군."

그 또한 카인을 알아보았다. 카인은 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이제 이런 자들에게 고개 숙이는 것은 익숙했기에, 동작은 흠잡을 부분 없이 자연스러웠다.

"바오룸님이시지요."

"나를 알고 있나?"

"일전에 공연을 보러오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알려주더군요. 요즈음 워낙 유명하시기도 하고요."

"하하. 자네에게서 유명하다는 말을 들으니 낯간지럽군. 솔롬 제일의 음유시인 아닌가."

"투기시합은 솔롬의 시민들은 물론, 도시 밖에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 제 노래가 조금 퍼졌다 한들,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사내, 바오룸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띄워주는 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미 꽤 들어간 술 덕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흐음. 간질간질한 노래는 내 취향이 아니라네. 이사내의 가슴을 울리는 영웅들의 서사시. 그런 게 내 취향이야."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흐흐. 종종 찾아가겠네. 사실 가만히 앉아서 노래를 듣는 것은 도무지 익숙해지기가 힘들었는데, 자네의 노래는 꽤 들을만하더군. 덕분에 재미를 붙일 수가 있었어."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바오룸은 제법 취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그는 상당히 말이 많았다. 카인은 조금 전 젊은 관리가 자신을 바오룸에게 데려온 것이 이 수다스러운 사내의 말동무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었다.

"이런이런. 꽤 취하신 모양입니다."

"음? 이게 누군가."

수다스러운 사내가 뱉는 이런저런 말들을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던 중,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일방적인 대화에 끼어들었다. 카인이 고개를 돌리니, 역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로우렌…이었던가.'

바오룹과 함께 공연을 보러왔던 자다. 바오룹에 비하면 존재감이 흐릿하기는 했으나,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성주의 측근이었던 자의 아들, 둘째라고 했던가?

"인사하시게. 이쪽은……."

"알고 있습니다. 요즘 인기가 많은 친구 아닙니까. 이름이, 그래. 카인이었지?"

"예.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이군요. 로우렌님이셨지요."

"호오. 나를 아나?"

"바오룸님과 함께 공연장을 찾아주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눈썰미가 좋군. 기억력도 좋고."

로우렌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떤 의미로든 인상을 남겼다는 것은 분명했다.

"푸흐흐, 이보게, 카인.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할렌 공의 아들이자 공자님의 측근이라네. 그것도 보통 측근이 아니야. 어릴 적부터 공자님과 함께 한 동무지. 자네가 이 친구에게 잘 보이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정말 취하셨군요."

"그래. 취했지. 취하려고 마시는 술 아닌가. 그러니 마셨으면 취해야지."

얼굴까지 붉어져서 킬킬거리는 바오룸. 그러나 카인에 보기에, 취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 그런 척하고 있지만, 로우렌 역시 취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언뜻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이 본래 그의 성정을 드러냈지만, 그의 입이나 풀어진 몸은 예기를 잃고 조금씩 흔들렸다.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란 말입니까. 다 공자님의 덕이지요."

"공자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고 있지 않나. 장차 솔롬의 대소사가 자네의 손을 거쳐서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그 무슨 큰일 날 말씀을."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미 반쯤은 그러고 있지 않나. 장군께서는 정무에 그리 관심을 두고 계시지 않으니까."

카인은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일전에 들었던 소문이 영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솔롬의 성주 군터 크렘보르는 아주 전형적인 무인이며 군인이었다. 그는 전장에 나가 싸우는 데는 비할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정무에는 능력도 관심도 없었다. 그렇기에 현재 솔롬의 정무는 그의 이자 후계자인 보리스 크렘보르가 대신하고 있는 부분이 크다고 했다.

'그게 사실인 것 같군.'

그렇다면 그 보리스 공자'의 측근이라는 로우렌은 상당한 권력자임이 분명하다. 둘의 대화도 가만 보면 연장자인 바오름이 오히려 조금씩 급히는 인상이 있었다. 서로 존중하는 듯하지만, 은연중 상하관계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자네도 그 소문 들었나? 장군께서 공자님께 대리통치를 맡기실지도 모른다는 소문 말이네. 어떤 이들은 말도 안 된다며 일축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영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렇지 않나? 자네도 알다시피 장군께서는."

"그쯤 하시지요."

"아, 그러지. 내가… 정말 많이 취하긴 했나 보군."

로우렌의 서늘한 한 마디에 바로 꼬리를 내리는 바오룸,

'그래. 이 녀석 정도면.'

어색해진 분위기 속, 카인의 눈이 은밀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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