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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12화 (812/1,064)

812화

운바소르 아실은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대회의 날짜를 잡았다. 참석자들이 하나같이 공사다망한 인사들인 만큼, 나름대로 배려를 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배려가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군터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계산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이 번거로운 행사를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기한에 맞춰서 올 모양입니다."

무거운 엉덩이가 곧 자신의 위신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은 아직도 하잘에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대회의 당일에 도착하려는지도 모른다. 우습지만, 그 역시 알 바 아니었다. 엉덩이를 무겁게 하려다 아예 자리에 눌러 붙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물론 그런 식으로 위신을 챙기는 자들은 극소수였다. 판니른에서, 아니 판니른 밖에서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진 자들, 누군가에게 애써 잘 보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자들 말이다.

그러고 보면 군터는 특이한 경우였다. 엉덩이가 가장 무거워도 되는 자가, 부지런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며칠씩이나 여유를 두고 먼저 도착했으니 말이다.

이는 총독 대행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군터는 이 의도치 않은 부분이 운바소르 아실이 시종일관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대회의가 끝난 후에 하루 정도는 더 머물러야겠군요. 그자와 이야기를 나누셔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럴 필요 있겠느냐."

살라스가 말하는 그자는 물론, 뮬리츠 몰던이었다. 몰던의 가주는 이름값을 하려는 듯,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자가 장군을 뵙길 청하지 않겠습니까."

군터는 잠깐 자신이 물리츠 몰던을 만나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곧 해들리르와, 그 밖에 자잘한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럴지도."

썩 내키지는 않지만, 내키지 않는다고 해서 책무를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문득 의문이 들었다.

'책무? 책무인가?'

종종 떠오르곤 했던, 답도 의미도 없는 의문이었다.

***

"본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인사부터 드리는 것이 도리겠군요."

운바소르 아실이 원탁에 둘러앉은 인사들과 한번씩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모두, 이렇게 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빠르지 않은 말, 행동은 말보다 더 느릿했다. 군터는 그의 그런 언행이 이 자리를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지, 누가 이 자리의 주인공인지 확인시켜주고자 하는 노력처럼 보였다.

"총독 대행께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시는데, 우리 같은 관리들이 마땅히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니 총독 대행께서 따로 감사인사를 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물리츠 몰던이었다. 그는 총독 대행을 추켜세워주려는 의도 따위는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운바소르 아실은 고맙다는 듯 그에게 묵례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여러분은 판니른을 이끌어가는 중역들이아니십니까. 반면 저는 총독 각하를 모시다가 급하게 그분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된 대행일 뿐이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런 제가 여러분들을 소집하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닙니다."

교묘한 말솜씨였다. 상대를 띄우면서 자신을 낮추지만, 동시에 자신의 뒤에 있는 총독을 들먹이며, 상대가 너무 들뜨지 않도록 억제하지 않는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몇 사람이 거의 동시에 자세를 고쳐 앉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제가 이번에 회의를 소집한 것은, 주 정부 차원에서 논해야 할 중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바라눔과의 전쟁으로 적잖은 군비가 소모되었습니다. 아니, 이 말은 적절치 않군요. 소모되고 있지요. 비록 바라눔이 죽었다지만, 그의 자식들이 백기를 내걸기 전까지 전쟁이 멈추지 않을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잠시 소강상태를 맞을 수는 있겠으나, 바라눔의 세력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는 결코 끝나지 않을 테지요."

너무도 당연한 것을 마치 대단한 무언가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지금의 운바소르 아실처럼, 표정과 분위기까지 심각하게 유지하면서 줄줄 늘어놓는 것은 더더욱.

뻔한 이야기 뒤에 이어진 이야기도 역시 뻔했다. 이미 상당한 군비가 소모됐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테니 주 정부의 예산구조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도, 돈도 줄어가는 판국에 예산구조를 고친다고

한들 과연 얼마나 소용이 있을까. 결국, 새로운 세원을 구하거나 기존에 거두는 세금을 올려야 할 터.

언제고 논의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운바소르 아실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드물다. 특히 그것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면 더 그렇다.

"대행도 아시다시피, 전란은 백성들의 삶을 망쳐놓았습니다. 비단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을 손에 넣기 위해 치렀던 싸움을 기억하시겠지요. 이들은 이미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더러는 모든 것을 잃기도 했겠지요. 이미 그런 상태일진대, 여기서 그들을 더 몰아세운다면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군터는 궁금해졌다. 운바소르 아실의 검미가 꿈틀거린 것이 반대 의견이 나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총독 대행'이 아니라 '대행' 으로 불려서인지.

뭐가 됐든, 운바소르 아실은 능숙하게 대응했다. 불쾌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처음처럼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물론 우려하시는 바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업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피해도 있습니다."

"음."

"전하의 뜻은 확고합니다. 그분께서 명하신다면, 저희는 마땅히 신하로서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고민할 것은 어떻게 그 뜻을 따라야 할까이지, 옳고 그름이나 가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총독 대행을 은근슬쩍 떠보려던 시도는 그 한마디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운바소르 아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가 고안한 몇 가지 세수 확보 방안을 이야기했다. 몇몇이 질문을 던지기도 했으나,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는 없었다. 어차피 이들에게 이런 주제의 이야기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세금을 낸다 해도 백성들이 내지, 그들이 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징세안이 바깥으로 새어나가면 민심이 요동치겠지만, 그것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욕을 먹어도 주 정부와 총독 대행이 욕을 먹을 테니까.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만."

딱딱한 주제가 얼추 지나가고, 주의 치안에 관련한 이야기가 오가던 와중, 한 중년인이 입을 뗐다.

"도적도 도적이지만, 소속 지역에서 벗어난 병사들이 타 지역을 헤집고 다니는 것도 불안요소가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일전에, 솔롬의 병력이 바사널까지 와서 순시하고 간 일이 있습니다. 대규모 병력이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도시 전체가 긴장했었지요."

군터는 그 말을 꺼낸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자마자 중년인의 몸이 굳었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어떤 각오까지 엿보이는 눈빛에서, 군터는 그가 단단히 준비하고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바사널이라.'

군터는 그곳이 솔롬에서 북서쪽으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명을 받은 병력이 그곳 주변을 지났던 것도.

별로 기억에 남는 일은 아니었다. 무슨 대단한 의도를 가지고 벌인 일도 아니고, 그저 단순한 무력시위였다.

당시에도 자잘한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별일 없이 넘어갔었다. 주의 군권을 손에 쥔 데다. 총독과 손을 잡기까지 한 그가 아니던가. 어지간한 목소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때의 일을 지금에 와서 들춘다? 배짱도 배짱이지만, 분명한 의도와 배경이 있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꽤 오래된 일인 것 같군. 그때의 이야기를 지금에 와서 들을 줄은 몰랐는데."

"언제고 한번은 직접 뵙고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소. 그게 지금이 되었을 뿐."

"뭐, 좋아."

한자리에 모여 있지만 다 같은 신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만큼은 동등한 자격으로 임한다고 하여 원탁까지 놓고 둘러앉았다. 하지만 군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동등한 상대를 대하는 투가 아니었다.

"내게 답을 듣고 싶어 하는 듯하니, 답하도록 하지."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무례한 어투를 지적하지 않았다. 자세를 바꾼 군터에게서 목을 조이는 위압감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탓이었다.

"나는 솔롬의 성주이기 전에 판니른의 방위를 책임지는 방위군단장이오. 한 마디로, 내게는 이 판니른을 적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책무가 있다는 뜻이지."

"바사널에 군대를 보낸 것이 그 일환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소. 알다시피, 아바시스의 군대가 이 땅에 쳐들어온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

"하지만 그때 움직인 것은 솔롬의 병력이었습니다."

"솔롬의 병력과 방위군의 병력을 구분하지 마시오."

중년인의 목소리는 처음과 같은 힘을 잃었다. 그는 이 이상 군터와 시선을 마주치기 힘든 듯, 조금씩 눈을 떨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솔롬의 성주이면서 방위군의 군단장이오. 내 뜻이 곧 방위군의 뜻이며, 내 뜻에 따라 움직이는 병사들은 곧 방위군의 병사인 거요."

의견을 나누는 대화가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억압이었다. 마치 전장에서 마주친 상대의 목을 치듯, 군터는 인정사정없이 중년인을 굴복시켰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그 무자비함을 여실히 느꼈다.

***

"크렘보르 장군 말입니다. 참으로 대단하더군요."

물리츠 몰던은 씩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입에 가져갔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습니다."

"남을 신경 쓰는 분이 아니지요."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사고방식이 우리 같은 사람과는 다른 분입니다. 이런저런 사정을 살피며 타협하는 것과는 거리가 겁니다."

이런저런 사정을 살피며 타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가 아니겠나.

"모르긴 몰라도, 이번 일로 안 좋은 마음을 품은 자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럴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다. 적까지는 아니어도, 경계하는 자들은 다수 생겼을 것이다.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르고,

"우려할 일이지만, 우리가 우려할 바는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손을 잡았지만, 그렇다고 보모가 되어줄 필요는 없다. 또한, 잡은 손이라고 해도 언제든 놓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가정에 따라서 잡았다가도 놓고, 놓았다가도 잡는 것. 그 또한 타협이며 정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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