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화
군터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앉았다. 운바소르 아실이 앉으라는 말을 하기도 전, 아니 그가 병사에게 문을 닫으라고 말하기도 전에 말이다.
그는 푹신한 모피가 깔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는 앉으라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주인과 손님이 바뀐 것 같은 광경, 운바소르 아실은 그 자연스러운 오만함에 내심 실소했다.
불쾌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그뿐이다. 그가 섬기는 총독마저 이 사내 앞에서는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주곤 했다. 그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총독을 대리할 뿐인 자신이 표정 관리를 실수하겠는가.
"장군,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와야 한다면 굳이 늦장 부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여전히 거침없으시군요."
운바소르 아실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하잘은 오랜만이시지요."
"글쎄. 오랜만인지는 모르겠군. 그리 변한 것도 없는 것 같고."
건성인 대답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운바소르 아실은 전후 하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고, 나날이 회복 혹은 발전해가는 이 도시를 자신의 치적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런 그의 사정 따위는, 이 사내 앞에서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닌 듯했다.
"말 돌릴 필요 없소.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
"총독 대행이 총독이 앞의 '대행' 자를 떼고 싶어 한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지 않은가."
"하하. 정말,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부끄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지금처럼 말입니다."
웃음으로 마음을 가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군터 크렘보르의 뒤에는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석상처럼 서 있었다. 본래는 꽤 잘생긴 얼굴이었을 터인데, 크고 작은 흉터가 본래의 모습을 가렸다.
외관만이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역전의 용사임이 분명한 사내. 자신의 상관을 닭은 무심한 눈이 이쪽을 보고 있다.
운바소르 아실은 그가 누군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윗사람들이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그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음에도 눈총을 주거나 나가라고 할 수가 없었다.
"맞습니다. 저는 대행이라는 글자를 떼고 싶습니다. 이번 자리 역시 그런 마음으로 마련했지요."
"알고 있겠지만, 총독과 나는 약조를 했었소."
"예, 알고 있습니다."
총독, 로드니 캄브라이와의 밀약. 운바소르 아실은 총독의 측근이었으니 당연히 그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판니른의 장졸들이 적잖게 활약을 했습니다. 총독께서는 직접 일군을 거느리고 전선에 서셨고 말이지요."
"그래서, 복귀할 수 있는 건가?"
"총독께서는 낙관적으로 보고 계십니다."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러니 대행에 불과한 운바소르 아실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총독이 계속 총독일 것 같은 상황이라면, 대행에 불과한 자가 어찌 이런 대회의를 소집할 수 있었을까.
"잘 됐군."
"예. 허나 총독께서는 당신이 본가로 돌아간 후에도 판니른을 놓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저를 남겨놓으실 생각이고요."
"조정에서 묵인할 것 같은가."
"여러 귀한 분들께서 힘을 보태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분들도…낯선 이가 새로 총독 자리에 앉아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은 원치 않으시니까 말이지요. 장군께서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부탁하는 건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바로 조금 전에, 말을 돌리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지."
"…실례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이런 화법이 익숙해져서 말이지요. 이제는 거의 습관이라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머리와 입이 따로 노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지금처럼 말입니다."
"그런가. 그런데 내가 돕는다고 해봐야, 말 한마디 보태는 정도가 다일 텐데."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어차피 전쟁은 계속 이어질 테고, 판니른은 계속 병력과 물자를 짜내야 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 정부에 큰 변화가 생긴다면 여러모로……."
"설명은 그쯤 하지. 총독 대행이 총독 자리를 이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대충 이해했으니까."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이번 대회의는 요식행위입니다. 제 영향력과 능력을 바깥에 보여주기 위한."
본인 입으로 영향력이니 능력이니 떠들어대는 것이 낯간지럽지 않을까 싶지만, 운바소르 아실은 태연했다. 그는 오히려 이제 긴장을 다 털어버린 듯, 처음보다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
군터가 운바소르 아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살라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입을 닫았다고 해서 눈과 귀까지 닫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자, 꽤나 들뜬 것 같더군요."
"그래?"
"예. 총독 자리가 어지간히도 탐이 났던 모양입니다."
한 주의 총독. 그 자리를 탐내지 않는 이가 어디 있을까. 몰던 가주나, 다른 고상한 척하기를 좋아하는 귀족들도 가능하다면 그 자리에 앉고 싶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이전에 봤을 때는 야심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만, 역시 사람의 속은 알 수 없군요."
"변한 것일지도 모르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네가 말이냐?"
살라스는 군터의 눈길에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자신은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남들이 해대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살라스는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외부요인에 의한 변화라지만, 어쨌든 변화는 변화 아닌가.
"병사들을 배치하겠습니다."
"음."
오랜만에 주인이 돌아온 크렘보르 저택을 병사들이 둘러쌌다.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는 것과 대조적으로, 저택에서 일하던 고용인들은 평온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하루 이틀 일한 것이 아니었다.
"끝났나?"
군터가 들어간 사이, 살라스는 병사들의 배치를 보고받았다. 그는 친위대장은 아니었으나, 종종 지금처럼 친위대를 지휘하곤 했다.
"예. 끝났습니다."
이번 하잘행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군터의 호위였다.
군터와 크렘보르 가문은 정치적으로 전면에서 일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적은 존재했다. 드러내놓고 대적하는 대신, 어둠 속에 숨어서 은밀히 적대하는 자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발생하는 암살 시도가 바로 그들의 작품 아니겠는가.
"암살자 놈들이 설칠 기회가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일 것이다. 모두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옛!"
이번에 하잘로 함께 온 병력은 모두 오백. 그들은 3교대로 저택을 물샐 틈 없이 경비했다. 인근 시민들은 물론, 크렘보르 저택 주변을 한 번이라도 지나간 귀족들도 적잖이 수군거렸으나 그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 평화롭고 활발한 도시는 그들에게 있어 또 다른 전장이었으므로,
"좀 어떤가."
"무엇이 말입니까?"
"지내기가 어떠냐는 말이네. 이제 어느 정도 적응한 것 같던데."
할렌은 잠시 침묵했고, 살라스는 그런 할렌을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차와 달리, 미적지근한 술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식지 않는다.
"이제는 적응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어려움을 발견합니다."
"이전과는 다르지. 그렇지 않나?"
"예. 그렇더군요."
흔히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쓰지만, 할렌은 자신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건 오직 군터와 살라스 뿐이리라 생각했다. 오직 그들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 역시 자신과 같은 경험을
"살라스님은… 어떻게 익숙해지셨습니까?"
"익숙해지려 하지 않았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지더군."
"의식하지 말라는 겁니까."
"노력한들 아무 소용 없이, 그저 피곤해질 뿐이니까."
"……."
"자네와 내가 같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걸세."
"두고 보면 알겠지요."
"그래. 그나저나…그 목소리도 이제 그리 거슬리지 않는군."
"익숙해지셨군요."
"노력하지는 않았네."
할렌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
"거 봐. 분명히 뭐가 있다니까."
살라스의 호출은 친위대 병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친위대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서 간혹 친위대장 노릇을 하곤 하는 살라스는 그들에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살라스가 개인적인 용무로 사람을 호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살라스가 롬바드를 따로 호출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 사이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뜻 아니겠나.
"장군님과 동향이라고 하지 않았나. 살라스님은 그쪽 출신은 아니지만, 전부터 연이 있었을 수도 있지."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일까?"
"무슨 소문?"
"그 왜, 장군께서 롬바드를 친위대장에 올리려고 한다는……."
"어허. 입 조심하게. 누가 들어도 좋을 것 없는 소리야."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하는 이야기지."
"그래도 입 조심하란 말이야. 한번 열린 입이 어디서든 또 열리지 말라는 법 있나."
"나원, 새가슴 하고는. 아니 말이야 바른 말로, 무슨 자리든 장군께서 원하는 자를 앉히는 게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쉬쉬한단 말인가.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장군님은 거침없으신 분이야. 그분께서 원하는 바가 있다면, 누가 뭐라든 이루시고 말 걸세."
"아니. 장군이야 그렇다 쳐도, 우리가 이렇게 떠들어대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니까."
대개의 경우,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사정이 오르내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을 아는 병사는 동료를 만류했으나, 그의 동료는 그런 그의 배려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두고 보면 알겠지."
"그래. 두고 보자고."
자잘한 의견 충돌이 있었으나, 그들은 한 가지에서만큼은 암묵적으로 생각을 같이 했다. 그것은 만약 크렘보르 장군이 정말 롬바드를 마음에 두고 있을 경우, 언제가 됐던 그가 대장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가 주제가 됐다면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롬바드는 비록 아직 신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경력이 짧았지만, 그 능력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뛰어났다. 그러니 만약 크렘보르 장군의 뜻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가 친위대 내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것에 이견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