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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10화 (810/1,064)

810화

"롬바드님."

롬바드, 할렌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내를 힐끗 보았다. 며칠 전 그가 도움을 준 적 있는 신병이었다.

이름이 분명, 하밀이었던가.

"소식 들으셨습니까? 이번에 장군께서 하잘에 가실지도 모른답니다."

알고 있다. 운바소르 아실이 총독 대행 권한으로 개최하는 정무대회의 때문이다. 말 그대로 판니른의 유력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판니른의 여러 정무에 관해 논하고, 중요 사안들을 처리하는 자리다.

운바소르 아실이 총독 대행을 맡은 후로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야심을 드러낸 셈이지.'

운바소르 아실은 총독 대행으로서, 이제껏 자기 주제를 잘 지켜왔다. 설령 주제를 벗어난 일을 벌이더라도 눈치껏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만 움직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낼 셈인 듯, 아주 공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군께서 하잘로 가신다면 당연히 저희가 장군을 모시고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사실 저는 한번도 하잘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롬바드님은 가보셨습니까?"

물론이다. 가보다 뿐인가. 그곳에서 전투를 치르기도 했었다. 물론, 롬바드가 아닌 할렌이었을 적에 말이다.

"아니."

"기대되지 않으십니까? 판니른 제일의 도시 아닙니까. 듣기로는 그 성세가 테리브란에 비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라던데요."

"들뜰 필요 없다. 하잘에 간다 한들, 그곳의 전경을 살필 여유는 없을 테니까."

놀러가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잘에 간들 항시 주변을 경계하느라 바쁠 터.

하밀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은 판니른 전역에 널리 퍼졌고, 그가 판니른에서 못해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라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를 노리는 이들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암살자가 성주관저에 침입했던 것이 불과 석달 전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할렌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하밀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얼굴을 가린 가면 덕에 표정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밀은 좋게 말해 붙임성이 좋았고, 나쁘게 말해 굉장히 수다스러웠다.

'괜한 짓을 했던 건가.'

오죽했으면 잠깐이나마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나, 생각이 얼굴에 들어날 정도로 순진한 하밀이 가까워지고 싶다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으니 밀어내기에도 뭐했다. 결국 할렌은 하밀이 자신의 측근이라도 된 양 달라붙는 것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꼭 부정적이게만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어차피 다시 친위대장 자리에 오르려면 병사들 사이에서 인망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외관상의 문제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거리감을 줄 수밖에 없는 할렌의 입장에서는 그게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런데 어쩌면 하밀 덕분에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볼 수도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내 문제는 남에게 기댄다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하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할렌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특수제작된 가면속에서 울린 목소리가 밖으로 흘러나가자, 웃고 있던 하밀의 낮이 살짝 굳었다.

"물론입니다."

할렌은 지난번 사냥 훈련 때 저지른 실책 때문에 아직도 눈총을 사고 있었다. 대놓고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훈련 때마다 유독 엄하게 다뤄진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하밀도 눈치가 있었기에 그런 기류를 알아차렸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버텼다. 실수를 했으니 그에 따르는 대가는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에게 기댈 생각은 없습니다. 제 어려움은 제 스스로 이겨낼 테니까요."

할렌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붙임성 좋고 말이 많은 녀석인 줄로만 알았는데, 뜻밖에도 제법 강단이 있지 않은가. 물론 말뿐인 것인지 아닌지는 두고봐야 알 테지만,

***

"그래도 가셔야 합니다."

군터는 그렇게 말한 살라스를 힐끗 보았다. 그의 앞에서 이 정도로 대차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이는 살라스가 유일했다. 물론 그건 살라스의 배짱이 두둑한 것 외에, 이런 경우 자체가 극히 드물며, 또한 살라스가 이렇게 강하게 주장할 때는 그의 말이 대부분 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운바소르 아실이 이제껏 장군의 체면을 세워주었지요."

"바란 적 없다."

"예. 하지만 그는 이제 대답을 듣고 싶을 겁니다. 여기서 장군이 그를 배려해주지 않으신다면 그의 속이 어떨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장군께서 그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지만, 기왕이면 그간 나름대로 고생한 그에게 한번쯤 호의를 베푸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말 그대로 '기왕이면'이다. 군터는 그 말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게다가, 이번 기회에 누가 판니른의 진정한 주인인지 한번 보여주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주인 노릇을 할 생각은 없다만."

"그렇다면 누군가 주인이랍시고 행세하는 꼴을 지켜보실 생각이십니까?"

몇몇 수하들이 살라스가 변한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군터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수하들이 그런 이야기를 우려스럽게 하는 반면, 군터는 살라스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자신의 속을 이토록 잘 헤아리지 않나.

"하지만 역시, 주인 노릇을 할 생각은 없다."

의미 없으며, 귀찮기만 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나, 누구도 장군 앞에서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음은 알려주셔야지요."

"그래."

내가 설칠 마음이 없다고 해서, 엄한 놈들이 설치는 꼴을 용인한다는 것은 아니다.

"닷새 뒤에 떠나겠다."

"준비시키겠습니다."

"이번에는 너도 함께 간다."

"예? 허면…"

"보리스 녀석이 요즘 의욕이 넘치는 것 같던데, 녀석에게 일을 맡길 참이다."

"공자가 기뻐하겠군요."

살라스가 미소지었다. 보리스 때문이 아니라, 간만에 솔롬을 벗어나 군터와 동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었다.

***

살라스의 예상대로, 보리스는 기뻐했다. 부친이 부재할 시, 그 자리는 늘 살라스의 몫이었다. 보리스는 오래 전부터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부친의 대리인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부진의 자리를 대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보리스는 자신이 어느 정도 부친에게 인정받은 것이라 받아들였다.

"아무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군터가 하잘로 떠나는 날. 보리스는 성문 밖까지 나와 부친을 배웅했다. 군터는 힘이 잔뜩 들어간 아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듣자하니 이번에는 엉덩이가 무거운 자들도 대거 움직인다고 합니다."

군터의 옆에 바짝 붙어 따르던 살라스가 이번 대회의에 참여하기로 한 이들의 이름을 줄줄 읊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식에 무관심한 군터조차 귀에 익은 이름들이었다.

"운바소르 아실이 그간 일을 제대로 했습니다. 다들 이번 대회의의 무게감을 알고 있는 것이겠지요."

전쟁이 한창 격화되었을 당시에는 이런저런 것을 따질 겨를도 없었다. 중앙 조정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병력을 파견하라고 성화였고, 그에 따라 판니른의 주전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간 상황에서 없는 여력을 짜내야 하는 판이었으니.

하지만 바라눔 트라소프가 죽었다. 황자는 군을 물렸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이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사람은 여유가 생기면 생각이 많아지는 법.

"지금쯤 총독 대행은 잔뜩 들떠있겠군요."

"그럴지도."

해들리르를 멸할 당시,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직접적으로 도움을 구한 것은 몰던이지만, 어쨌든 해들리르를 멸하는 과정에서 몰던과 총독 대행, 그리고 크렘보르가 손을 잡았다고 봐야 하리라.

"믿고 있는 구석이 있지 않겠습니까."

운바소르 아실이 총독 대행을 맡은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로드니 캄브라이가 처음 판니른으로 부임할 때부터 함께했던 측근이 아닌가. 아마도 제법 오랫동안, 이런저런 준비를 해놨을 것이다. 몰던, 크렘보르와 그랬던 것처럼 여러 유력가들과 이런저런 비밀로 엮여있을지도 모르지.

"토어릭이 말하길, 운바소르 아실이 총독 자리를 잇는 것은 거의 확정적이라더군요. 물론 그래봐야 반쯤은 로드니 캄브라이의 꼭두각시일 거라 하긴 했습니다만……."

"네 생각은 다르더냐?"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렇게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야심가가, 언제까지 허수아비로 남을 것 같지는 않군요."

"곧 알게 되겠지."

운바소르 아실과는 여러 번 대면한 적이 있다. 하지만 군터는 단 한번도 그를 의식해서 살핀 적이 없었다. 그의 관심을 끌만한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한번 살펴볼 참이었다. 어차피 운바소르 아실도 이번 기회를 빌어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낼 터. 그렇다면 그가 귀찮게 굴 만한 자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

"크렘보르 장군이 남문을 통해 입성했습니다."

부관의 귓속말에, 운바소르 아실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후우."

무거운 한숨에는 그의 복잡한 심경의 지꺼기가 담겨 있었다.

'그래. 이게 맞다.'

방위군단장의 행차 아닌가. 마중을 나가야 하니 마니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운바소르 아실은 마중나가지 않기로 결정내렸다. 방위군단장을 낮춰 봐서가 아니라, 자신도 총독 대행으로서 그와 대등한 존재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참, 부담스럽군.'

군터 크렘보르, 몰던 가주와는 다른 의미로 부담스러운 상대다. 평범한 잣대로는 재단할 수 없는, 도무지 예측이 통하지 않는 인물.

"각하"

"성문 앞까지는 아니더라도, 관저 앞까지는 마중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비굴해질 필요는 없지만, 무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으로 막 집무실을 나선 그는, 복도 끝에 보이는 일단의 무리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장군. 이제 막 마중을 나갈 참이었습니다만……."

"내 걸음이 빨랐을 뿐이니, 신경 쓸 것 없소."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눈 앞에서, 운바소르 아실은 애써 웃으며 그를 이제 막 나왔던 집무실로 안내했다. 문을 닫기 전, 안절부절 못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속이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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