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809화 (809/1,064)

809화

"지금이 적기입니다. 무샤라드는 일찍이 후계자로 낙점받았으나, 놈의 지위는 그리 튼튼하지 않습니다. 제 아비의 오만함 때문이지요."

바라눔 트라소프는 자신이 적어도 몇십 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무샤라트 트라소프를 후계자로 임명은 하되, 그를 위해 손을 써주지는 않은 것일 터.

"동복형제만 둘입니다. 이복형제까지 헤아리면 말할 것도 없지요. 그중 지지세력을 가진 이들만 꼽아봐도 한 손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따로 손을 쓰지 않아도, 놈들은 알아서 다투기 시작할 겁니다. 오히려 이럴 때 우리가 강하게 압박한다면 놈들은 우리에 맞서 굳게 결집할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는다면 무샤라트가 제 형제들을 다 제압하고 혼란을 수습할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버리는 건 아니오. 공도 알다시피, 우리는 그간 적지 않은 무리를 해가며 군대를 일으키고 유지해왔소. 잠깐 숨돌릴 틈을 갖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지."

"흐름과 기세라는 것은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오. 바라눔이 죽은 이때, 놈의 자식들이 제 아비의 유산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이때. 몰아붙이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소이다."

양쪽 주장 모두 일리는 있다. 그렇기에 자콥 트라소프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그의 손가락이 의자의 팔걸이를 조용히 두들겼다.

바라눔의 죽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찮다. 전장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벌어지는 것은 예사이며, 눈먼 창칼이 대상을 가리는 것도 아니라지만, 바라눔의 허망한 죽음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리비암의 늙은 괴물이 손을 썼다고 한다면.'

키리스트가 바라눔을 후원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의 관계가 그저 원만했을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바라눔 역시 진실을 어느 정도는 알아차렸을 테니, 어쩌면 자신 만큼이나 괴물들을 혐오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키리스트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서로가 상대의 의중을 짐작하고 있는 상태에서 불편한 동행이 이어졌다면, 언제든 계기가 생겼을 때 관계가 들어졌을 수도 있겠지.

비약일 수도 있지만, 방심하고 있던 바라눔이 어이없이 전사했다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

결론을 내지 않고 회의를 파한 후, 자콥 트라소프는 줄카의 전령을 은밀히 독대했다.

"당장 진격해야 할지, 두고 봐야 할지 말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눈만 좋은 게 아니라 귀까지 좋은가 보군, 몰랐는데 말이지."

동맹의 전령인데도 자콥 트라소프의 목소리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전령 역시 친절함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비꼬는 목소리에도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어갔다.

"함정일 것입니다."

"근거는?"

"제 주인께서는 바라눔의 죽음이 키리스트가 꾸민 짓이라고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자가 황자님 좋을 일을 해줄 리 만무하지요."

"증거는 있나?"

전령은 입을 다물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자콥 트라소프는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확실히 무샤라트의 기반은 그리 튼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키리스트는 바라눔을 제거했을지언정, 그의 세력이 무너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지요. 어떤 식으로든 손을 썼을 테고… 무샤라트든, 아니면 다른 놈이든 황자님을 대적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지원할 겁니다."

"그래서, 이대로 들이 친다면 놈의 계획대로 놀아나는 거다, 이 말인가?"

"제 주인께서는 그리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가 틀렸을 수도 있지.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하다가 실기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황자님, 이는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확실히 말씀대로 제 주인께서 들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들리지 않았다면? 황자님이 감수하셔야 하는 것은 실기 정도가 아닐 겁니다. 반면 실기했다고 한들, 황자님은 잃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지요."

"얼핏 듣기에는 그럴듯하군."

"불확실함이 산재해있을 때는 굳이 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멈춰있어도 되고, 느릿하게 걷기만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언제나 일을 그르치는 것은 조급함입니다."

"그 또한 네 주인이 내게 전하라 한 말인가?"

"예."

"더 전할 말이 있나?"

"없습니다."

"좋아. 돌아가서 전해라. 잘 알아들었으니 내 걱정은 그쯤하고, 하고 있는 일에나 집중하라고."

"그리 전하겠습니다."

***

줄카는 자콥 트라소프의 전언을 듣고 피식 웃었다. 옆에서 카니악이 건방지니 어쩌니 투덜거렸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말만 잘 알아들었으면 그만이다.]

"그래도…주제 파악을 좀 시켜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겁을 먹은 거겠지.]

"겁이요?"

[녀석도 의심은 하고 있었을 거다. 바라눔의 죽음은 누가 봐도 석연찮은 구석이 있으니까.]

"자기도 바라눔 꼴이 날까 싶어 겁을 먹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거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식 정도는 하지 않겠느냐. 처음부터 상당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으니, 이번 일을 보고서 더 날을 세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흥, 전하께서는 놈에게 용혈까지 내려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놈이 받은 만큼 값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값은 충분히 하고 있지. 늙은 괴물의 시선을 잘 끌어주고 있지 않으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보다… 어찌 됐느냐.]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북쪽으로 움직인 것은 분명한데, 중간에 종적을 지웠습니다. 추적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놈들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인데…."

카니악이 줄카의 눈치를 살피더니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그림자 놈들이 대거 붙은 것을 보아하니, 그 녀석이 뭔가를 가진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찾아라. 무슨 수를 써서든.]

"옛."

몸속에서부터 서늘함이 퍼져나가는 듯하다. 종종 평범한 사람처럼 웃고 이야기하는 줄카지만, 카니악은 이 서늘함이야말로 주인의 본모습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

***

성주를 지척에서 호위하는 최정예인 만큼, 친위대는 일반 병사들과 달리 온갖 힘든 훈련을 일상처럼 치르곤 했다. 모의 전투 역시 그중 하나였는데, 모의라고는 해도 실제 전투를 방불케 하는 혹독한 훈련으로 한번 이 훈련을 치를 때마다 중상자가 심심찮게 발생하곤 했다.

롬바드는 바로 이 모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는 일신의 무공은 물론, 병력을 지휘하는 솜씨도 탁월했다. 그에게 거리낌을 느끼는 이들조차 모의 전투 때마다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실력도 실력이고, 개인적인 구설수도 하나 없었다. 얼굴을 가리는 가면이나, 은근히 풍기는 향수 냄새를 제외하면 롬바드는 남의 입에 오르내릴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완벽한 군인 그 자체였고, 그가 그런 모습을 계속 유지할수록 친위대원들은 크렘보르 장군이 단지 동향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친위대에 들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온다! 준비하라!"

솔롬에서 하루 하고도 한나절 거리에 있는 숲,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이 이곳저곳에 퍼진 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신호를 듣자마자 각자

위치에서 뛰쳐나갔다. 그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으나, 대부분 손에 무기를 들고 있지는 않았다.

꿰에엑-!

멧돼지, 족제비, 등등 온갖 짐승들이 저마다 울부짖으며 튀어나왔다. 병사들은 그것들과 부딪치지 않는 선에서 능숙하게 달라붙으며 방향을 틀었다.

"저쪽으로 몰아라!"

짐승들 대부분은 병사들이 유도하는 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개중 하나, 유난히 덩치가 크고 날렵한 표범 한 마리가 갑작스레 방향을 틀었다.

"어엇!"

근처에 있던 병사가 다급히 창을 들었으나, 표범은 이미 도약하여 그의 목덜미에 이빨을 가져다 대려 하고 있었다.

지독한 노린내가 코끝을 간질였을 EO. 병사는 틀렸음을 직감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퍼억!

그러나 기다렸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고, 다시 눈을 뜬 병사는 자신이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긴장을 놓지 마라. 체념하지도 마라.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지 궁리하고 행동해라."

동굴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울리는 목소리. 보기만 해도 왠지 모를 한기가 느껴지는 가면을 쓴 사내가 병사의 옆을 스치듯 지나쳤다. 병사는 두려움과 감사를 담아 '옛! 하고 외치곤 손에서 반쯤 놓을 뻔한 창을 고쳐잡았다.

***

"롬바드, 수고했네. 자네의 기지 덕분에 부끄러운 일을 면했어."

"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했을 일입니다."

"글쎄.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하밀이 자네 덕에 목숨을 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공을 인정받은 것이지만, 할렌은 전혀 감흥이 없었다. 공을 치하하고 있는 사내가 이전에 그의 수하였기 때문일까? 그는 잠깐 고민했으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답을 내렸다.

"긴장을 풀지 말라고 했건만, 다들 내 말을 귓등으로 들은 모양이군."

할렌에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공을 치하하던 사내가 시선을 돌리자마자 날을 세웠다.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사고 없이 끝났으나, 그는 사고가 날뻔했다는 것만으로도 화가 난듯했다.

"신입들의 기강이 느슨한 것이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그런 신입들을 제대로 휘어잡지 못한 것은……."

그의 시선을 받은 장교들이 고개를 숙였다.

"사고는 항상 안일함 속에서 일어나지. 다들 명심해라. 훈련을 훈련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옛!"

할렌은 가면 속에서 조용히 실소했다.

언성을 높이지 않고 수하들을 질책하는 모습이 꽤 그럴듯하지 않은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지금 떠들어대고 있는 녀석이 저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법 그럴듯한데.'

뜻하지 않게 발견한 과거의 편린은 그 자체로 작은 즐거움이었다. 비록 아주 잠깐 동안 떠올랐다가 사라진 것이라고 해도.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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