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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08화 (808/1,064)

808화

"미, 미안하다. 나, 나는 그저 겁만 주라고 부탁했을 뿐이야. 절대로 네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리라고는……."

얍삽한 인상의 사내가 털어놓은 사정, 혹은 변명은 틀에 박힌 듯 뻔하고 구차했다. 그러나 카인은 그 말을 듣고 살벌한 눈빛을 거뒀다. 이 구차한 변명에 설득됐다거나 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이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

'이런 놈과 필요 이상으로 엮일 필요는 없지.'

어차피 직접 나서지 못해 남의, 그것도 음습한 골목에서나 굴러먹는 놈들에게 손을 빌리는 놈이다. 이런 놈에게는 약간의 살기 섞인 위협 정도면 충분하다. 덜덜 떨리는 눈과 다리만 봐도 알 수 있다.

"쓸데없이 피곤해지고 싶지는 않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게 무슨,"

"그쪽이 내게 적당한 성의 표시만 한다면, 조용히 넘어가 주겠다는 뜻이지. 그게 싫다면……."

"시, 싫을 리가 있나, 물론이지. 그렇게 하세."

사실 이 약하고 치졸한 자의 성의 따위는 필요 없다. 그런데 굳이 성의 표시 운운한 것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넘어갔을 때 혹시 발생할지 모를, 또 다른 귀찮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에는 사람의 선의, 혹은 호의를 곡해해서 받아들이는 머저리들이 넘쳐났으니까.

카인은 사내에게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네받고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는 이런 사소한 일 따위에 시간을 썼다는 사실 자체에 짜증이 났다.

'아니야. 필요한 일이었다. 어차피 한동안은 이곳에 머물러야 할 테니.'

가객이 된 것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 이유도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고상한 시를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나 가객은 고상한, 혹은 고상해 보이고자 하는 귀족들이 좋아하는 이들이다. 타고난 신분, 혹은 긴 이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해대거나, 남이 이해하기 어려운 취미를 가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군터 크렘보르는 판니른의 실세다. 앞으로 솔롬은 판니른의 중심으로 거듭나겠지.'

처음에 그는 하잘과 솔롬을 두고 고민했었다. 반쯤은 현실적인 이유로, 반쯤은 모험을 하는 심정으로 솔롬을 택했었는데… 그 선택은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어쨌든 귀족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하인을 시켜 은밀하게 쪽지를 보내온 귀부인이 벌써 네 명. 비록 그들 모두 변변찮은 가문이거나 소문이 좋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일단 귀족들이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서두르면 안 돼.'

갑작스레 자그마한 성공에 만족하고 있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자, 카인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조급함이 초래하는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

바오름은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초원을 떠나온 이후로 최고의 나날인 것 같았다. 심지어 동생이 성주의 신뢰를 한몸에 받던, 그래서 그 형이었던 자신에게도 그 후광이 미치던 시절보다도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시절은 달콤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열등감과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동생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동생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두가 야스메티의 형이 아니라 바오룸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부른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동생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있지만, 바오룸도 어리석은 사내는 아니었다. 그는 왜 보리스 공자가 자신에게 공을 들였는지, 그리고 왜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우를 해주는지 그 이유를 짐작했다.

'나를 미끼로 지지자들을 모으기 위함이었지.'

효과는 상당했다. 보리스 공자는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굳혔다. 크렘보르 장군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보리스 공자가 스스로 이뤄낸 부분이 폄하될 이유는 없다.

"으으. 일단 여기까지인가."

바오름은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아플 정도로 들여다본 서류들은 책상에 잘 정리해두었다. 오늘의 업무는 여기까지였다.

"후우."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는 사업, 크렘보르 장군은 자신에게 일을 맡겼지만, 그래도 우려의 시선을 던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장 보리스 공자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하지 않았나.

'해냈다.'

그러나 바오룸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이 자신에게 더 없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여기서 부족함을 드러낸다면 '역시 동생을 팔아먹고 호의호식하는 자'라는 소리를 듣게 될 테지만, 반대로 능력을 증명한다면 세간의 평가를

어느 정도 바꿔놓을 수 있을 터.

독하게 마음먹고 시작한 일, 다루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하지만, 바오룸은 한때 한 부족을 이끌었던 경험을 발휘했다. 물론 그래도 쉽지는 않았으나, 다행히 노력이 헛되지 않아 투기장 건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은 회포를 좀 풀어야겠군.'

그간 열심히 달려온 자신에게 주는 상. 바오룸은 오늘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남은 일은 자신의 손을 반쯤 떠났다. 이미 지시는 다 내려두었으니까. 굳이 여기서 뭘 더 하겠다면 공사 현장에 가 감독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현장의 일은 현장의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 괜히 감시한답시고 들락거려봐야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다. 모두 수고했다."

"벌써 말입니까?"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겠느냐? 사람은 활시위와 같다. 적당히 당겨야지, 너무 당기면 오히려 끊어지는 수가 있어."

"그거 옳은 말씀입니다. 하하."

수하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하기야, 좋기도 할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조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쪼아댔으니.

순간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든 바오룸이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이게 뭡니까?"

"보면 모르느냐? 하루 즐기는 거, 부족함 없이 즐기라는 뜻이다."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든 수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다 못해 아주 만개한다. 직접 무게를 느끼지는 못했으나 짤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은 나머지도 마찬가지.

"나는 아랫것들에게 쪼잔한 상관이라는 소리를 듣길 원치 않는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물론입죠."

수하들이 희희낙락하며 떠나갔다. 바오룸은 그 뒷모습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도 저들과 함께 움직였을 것이다. 고급 유곽에 들러 마음에 드는 계집들을 취하고, 술에 취하고, 밤을 보냈겠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물론 그러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나, 바오름은 보다 고상해지는 길을 택했다.

"오셨습니까."

"음."

"노고가 크십니다. 그래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하던데."

"맞네. 거의 끝났지. 사실 반쯤은 내 손을 떠났다고 봐도 될 정도라네."

바오름은 약속장소에서 로우렌을 비롯한 젊은 관리들 몇과 만났다.

"마차로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타시지요."

인원이 인원이었기에 마차는 세 대가 한 번에 움직였다. 바오름은 로우렌과 다른 젊은 관리 한 명과 같이 마차를 탔다.

"자네 형은 안 왔나?"

"제 형님은 이런 자리는 질색이랍니다.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겠다나."

"하하. 전상 무인이로군."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냥 마음이 없는 것 같던데 말이지요."

바오름은 로우렌과 자주 교류했다. 공무 관련으로도 이야기를 나눌 일이 많았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일로 얼굴 볼 일이 적지 않았다. 반면, 그의 형인 그라모트와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다. 다른 사안에는 관심 없이 군무에만 파고드는 모습이 꼭 할렌을 보는 듯했다.

'같은 피를 물려받은 형제가 어찌 이리 다를까.'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기질 자체가 정반대라고 해도 될 정도로 크게 달랐다. 심지어 외모도 그랬다. 얼굴은 닮은 구석이 있지만, 제형은 그렇지 않았다. 그라모트가 전형적인 무인의 몸이라면, 로우렌은…….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짐작이 가니까요."

"하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나?"

"제가 제 형님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으음. 티가 났나?"

"그것도 그거지만, 뻔해서 말이지요. 제 입에서 제 형님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아홉 정도는 그리 보더군요."

"불쾌했다면 미안하네."

"아뇨. 불쾌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도 종종 궁금합니다. 제 형님과 저는 같은 아비의 피를 받고, 같은 어미의 젖을 먹고 자랐는데 왜 이리 다를까 하고요."

"그래서, 답은 얻었나?"

로우렌이 씩 웃었다.

"예.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니 아예 생각 자제를 하지 말자. 이게 제가 얻은 답입니다. 다르게 태어난 것을 어쩌겠습니까. 형님은 형님이고 저는 저니까,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게 맞다 싶었습니다."

"좋군. 뭐 형제가 닮지 않았으면 어떤가? 각기 다른 자리에서 중임을 맡고 있으니, 그것으로 좋은 것이지."

"딱딱한 이야기는 그만들 하시고, 조금 즐거운 이야기나 하시지요."

동승한 젊은 관리가 푸념하듯 말하자 로우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오늘 공연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큽니다."

"어떤 면에서요? 소문의 그 가객? 아니면 그 노래를 들으러 오는 아리따운 아가씨들?"

"당연히 둘 다지만, 비중을 따지자면 아무래도 후자겠지요?"

젊은이 두 명이 오늘 공연을 보러 오는 것으로 알려진 아가씨들의 이름을 옮기 시작했다. 바오룸은 그런 그들을 보며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공연이라.'

근래에 유명세를 날리고 있다는 가객의 공연이다. 가만히 앉아 노래를 감상하고, 노래가 끝나면 점잖게 박수나 쳐대는 것은 본래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런 고상한 취미를 가져야, 정확히는 그런 취미를 가졌다고 바깥에 알려져야 평판이라는 놈이 오른다.

'피곤하군.'

긴장이 풀려서일까.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다. 바오룸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과 건물, 도로가 그의 시야에 담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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