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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07화 (807/1,064)

807화

군터는 요즘 제법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모든 일이 크게 거슬리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 보리스나 실비아도 그렇지만, 특히 할렌의 일이 그랬다.

할렌은 이제 롬바드라는 새로운 이름에 어느 정도 적응한 것 같았다. 친위대도 껄끄러운 신입을 받아들이는 모양새였고,

"잘 적응한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할렌이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핏기없는 창백한 피부는 이제 조금 하얀 수준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저것은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이상한 소문도 도는 모양입니다."

"음?"

"제가 남색을 한다더군요."

"……."

난처함. 상당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 군터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할렌은 손끝에 묻은 가루를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사내놈이 얼굴에 분칠을 하고 다니니, 그런 소문이 도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지요."

"모페이브에게 이야기해두마."

"닦달은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시간에 어찌 될 일이 아니니까요.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가면을 쓰고 있을 당시,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그렇다고 둘러댔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두꺼운 화장으로 가면을 대신했는데, 덕분에 소문이 심각한 수준으로 번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달갑지 않은 소문 하나가 더 붙어버렸으니, 할렌은 요즘 하루하루를 인내심 훈련하듯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가면을 다시 쓸까 생각 중입니다. 이미 한번 얼굴을 보였으니, 다시 가면을 쓴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지 싶어서 말입니다."

"그것도 괜찮겠군."

"예. 이게 해결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할렌이 장갑을 벗자 핏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창백하다는 말조차 가볍게 느껴지는 손이 드러났다. 누가 보더라도 이질감을 느낄 법한, 시제의 손이었다.

"그나마 악취는 없는 것이 다행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악취도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냄새로 가릴 수 있을 정도였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루빨리 자리를 잡아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서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다. 군터는 할렌이 친위대에서 지위와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최대한 손을 쓸 작정이었다.

"바라눔 트라소프의 죽음이 아직도 화제더군요. 더 정확히는, 앞으로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습니다."

"너도 관심이 가느냐?"

"아니요. 멀게만 느껴집니다. 분명 그곳에서 싸웠고, 그곳에서 죽기까지 했는데 말입니다."

할렌이 자신의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입꼬리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손을 내렸다.

"이것이 장군께서 말씀하셨던, 사라져간다는 느낌입니까?"

"무뎌졌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완전히 없어진 것 같다가도, 간혹 종잡을 수 없는 시기에 올라오곤 하지."

"피곤하겠군요."

"적응하게 될 거다."

"예. 그렇겠지요."

할렌은 이후로도 군터와 사소한 주제로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는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

조용한 묵례. 그것으로 끝내고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

보리스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를 보며, 걸음을 멈췄다.

어지간한 여인보다도 더 두껍게 화장을 한, 괴이한 사내였다. 그 특별함을 눈여겨보기 무섭게, 이 사내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롬바드 였던가?"

생각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실수였지만, 보리스는 의도한 물음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상대를 보았다.

"예."

짤막한 대답. 한껏 낮췄으나 쇠로 쇠를 긁는 것 같은 껄끄러운 목소리를 다 감출 수는 없었다. 그래도 보리스는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신비스러운 사내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와 친위대에 들어간 것이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가 불분명하다는 점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한 자를 부친이 직접 명령하여 친위대에 들였다는 것도.

'동향 출신이라고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이런 자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

사실 그가 이 롬바드라는 사내에게 관심 가지게 된 것은 로우렌 때문이었다. 부친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기울이는 로우렌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롬바드라는 사내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로우렌은 과거가 불분명한, 신입친위대원을 주시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고, 보리스는 로우렌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물론, 흘려듣지

않았다뿐이지 주의 깊게 듣지는 않았다. 과거가 불분명하니 어쩌니 해도, 친위대의 일개 병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특이하긴 하군.'

외관만이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어떤 점이 신경 쓰이냐고 묻는다면 콕 집어 이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자네의 이야기를 들었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데?"

"예."

말이 짧다. 불손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일부러 짧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흉한 목소리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터.

"아버지를 뵙고 가는 중인가?"

"예."

"그렇군. 그럼… 나중에 또 보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딱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괜히 붙잡아서 말을 걸었다는 생각을 하며, 보리스는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떼는 사이 등 뒤에 닿는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의식하지 않는군.'

일개 병사가, 크렘보르의 후계자를 의식하지 않는다…라. 롬바드라는 자는 확실히 여러모로 특이한 자였다. 외관이나 분위기를 제외하고도 말이다.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자인지 궁금하긴 하군.'

오늘 일을 이야기했다가는 로우렌이 또 신나게 입을 놀릴 것이 분명하기에, 보리스는 조용히 롬바드라는 자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

"장군, 총독 대행이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뻔한 용건이겠지."

"아마도 그렇겠지요."

"지겨운 이야기를 또 듣고 싶지는 않다. 네가 만나라."

토어릭이 살짝 멈칫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것은 뭐란 말이냐."

대행이라지만 그래도 총독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자다. 그런 자가 보낸 사자를 일개 무관에 불과한 자신이 접견해도 되는 것일까? 토어릭은 한 마디를 더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순간 고민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군터가 말을 이었다.

"녀석도 대행이고, 너도 날 대리한다. 그 정도면 격이 맞는 것 아닌가?"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뜯어 보면 어림도 없는 소리다. 총독은 자리를 비웠기에 대행을 둔 것이고, 군터는 지금 이곳에 있지 않은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대행을 둘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방위군단장이라고 해도 총독에 비하면 급이 낮은 것이 사실일진대.

'…라고는 해도, 전혀 생각이 없으신 것 같군.'

무례하다고 생각할 테고, 무시 받았다고 생각할 테지만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운바소르 아실과 그의 사자가 기분이 상하더라도…….

'너무 성가시게 굴기는 했지.'

운바소르 아실은 이쪽을 의식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게 너무 과하다는 것이 문제다.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문제조차 이쪽과 상의를 하려고 하니, 그만큼 이쪽을 믿고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겠지만 성가신 것이 사실이었다.

그동안은 어떻게든 참아왔으나, 그것도 이제는 한계인 듯했다.

"토어릭 공, 크렘보르 장군께서는?"

"장군께서는 일이 있어 바쁘십니다. 장군께서 이번 일을 제게 일임하셨으니, 논할 것이 있다면 저와 논하시면 됩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지만, 미세하게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불쾌하겠지.'

전령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상대는 귀족이다. 가문의 세가 기울어 몰락하다시피 하여, 남은 거라고는 이름 하나밖에 없다고는 해도 귀족은 귀족이다. 가진 게 없는 이들일수록 얼마 되지 않는 가진 것에 집착하는 법.

필시 상대는 솔롬에 있는 군터 크렘보르가 뻔뻔하게 대리인을 내세운 것보다, 그렇게 내세운 대리인이 일개 평민이라는 것에 분개하고 있을 터였다.

"자. 앉으시지요."

"…예."

속으로야 무슨 소리를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 한들 어쩔 것인가? 크렘보르라는 이름은 이미 판니른 전역에 널리 퍼졌다. 그 위세는 유서 깊은 몰던에 못지않으니, 일개 총독 대리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다. 그 총독 대리가 보낸 일개 사자는 더더욱 그렇고, 불쾌함을 느꼈어도 숨길 수밖에 없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은 이쪽이 아니다.

'이런 것이 권력의 맛인가.'

왜 사람들이 권력에 눈이 돌아가곤 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토어릭은 그 달콤함에 취해서 본의 아니게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절제력을 발휘했다. 과하지 않을 선까지 자신을 낮추고,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겸손하지만 비굴하지는 않게,

"…… 그렇기에, 크렘보르 장군께서도."

그에게는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으나, 이번만큼은 그 습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연한 소리를 쓸데없이 장황하게 지껄여대는, 머리에 똥만 찬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귀족 나리를 마주하고 있으니 따끔하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

카인은 얼치기 몇을 때려눕힌 일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맞았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닷새가 지났지만, 그 일을 이유로 그를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관병은 물론, 그 얼치기들을 사주한 놈(혹은 놈들) 모두.

'물론, 그렇다고 해도 덮어두고 갈 수는 없지.'

그 얼치기들은 분명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그 시간에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리라는 것을 놈들이 어찌 알았을까? 뭔가 들은 게 있지 않은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카인 자신은 굴러들어온 돌이다. 굴러들어온 돌이 자리를 차지하면, 본래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돌이 밀려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다면 그렇게 밀려난 돌이 앙심을 품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급한 일은 아니지.'

기껏 동원한다는 것이 얼치기 몇이었다. 물론 비실비실한 가객 한 명 손봐주는 데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역시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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