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806화 (806/1,064)

806화

"후우."

무거운 한숨이 입으로 빠져나가자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다.

솔직해지자면, 오늘의 무대는 무대가 아니라 일종의 속풀이였다. 카인은 그것을 스스로도 알았지만, 별문제없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노래가 끝난 뒤 쏟아지던 박수갈채가 그것을 증명한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지.'

만약 황도에서 같은 노래를 불렀다면 그 즉시 황군이나, 음습한 곳을 전전하는 칼잡이 놈들이 들이닥쳤으리라.

하지만 이곳. 솔롬의 사람들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조금 전 관객석에 있던 이들 중 황도에서 불었던 피바람에 대해 아는 이가, 아니 들어보기라도 한 이가 한 명이라도 있을까?

'참으로 한심하구나.'

이런 곳까지 도망쳐와서, 홀로 썩어들어가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유치한 속풀이나 하고 있다니. 리비암을 탈출하며 마음에 품었던 칼은 벌써 다 녹슬어버렸단 말인가.

'은화 몇 닢에 들뜨다니.'

고용주가 어깨를 두드려주며 건넨 은화 일곱 닢. 하룻저녁에 노래 몇 곡 부르고 받은 돈지고는 많다. 아니, 거액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끄응."

갑작스레,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억 한편에 묻어둔 어둡고 끔찍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카인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하며 서둘러 옷을 챙겼다. 그가 다급히 건물 뒤편으로 빠져나가는데, 문을 나서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건장한 체격의 사내 대여섯이 그의 앞을 막았다.

"어이. 뭐가 그리 급해?"

"품에 있는 반짝거리는 놈을 쓸 생각에 신이라도 난 건가?"

뭐 하는 놈들인가 하는 궁금증보다, 앞을 가로막은 것에 대한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

"비켜."

최대한으로 발휘한 인내심이었다. 분노가 이성을 반쯤 마비시킨 와중에도 카인은 일을 벌여서는 안 된다는, 강박과도 같은 다짐을 떠올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앞을 막은 사내들은 그런 그의 노력을 조금도 헤아려주지 않았다.

"혓바닥이 짧구만, 뭐, 됐어. 어차피 우리도 말로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적당히 설치고 다녔어야지. 응? 사람이 세상 사는 이치가 있는데 말이야."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걸까. 아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난 상태, 카인은 건들거리며 뻗어오는 가볍게 팔을 쳐내고, 동시에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 동작은 흡사 뱀이 나뭇가지를 타고 오르는 것처럼 빠르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우득!

살짝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몸부터 들이민 주제에 자기 몸뚱이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얼간이들을 상대로는,

"아악!"

손목이 뚝 하고 부러진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굽혔다. 카인은 내려오는 사내의 턱을 올려치고, 그대로 내팽개쳤다. 턱을 가격당한 순간 눈이 풀려버린 사내는 비명을 지르던 것도 멈추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뭐, 뭐야?!"

"이 새끼!"

어떤 자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고, 어떤 자는 대뜸 칼을 뽑아 들었다. 칼이라도 해도 기껏해야 한 뼘 정도 되는 길이의 단검이긴 했지만, 카인은 칼을 뽑은 자에게 즉시 달려들었다. 다수를 상대할 때는 최대한 한 명씩 상대하는 구도를 만들어야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적을 상대할 때의 이야기다. 이런 얼치기들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휙!

찔러오는 칼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역시나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다. 카인은 슬쩍 몸을 옆으로 틀어 칼끝을 피하고, 칼을 쥔 손목을 낚아채 바깥쪽으로 비틀었다. 역시나 그 사소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상대.

"컥!"

명치에 한방, 조금 전 그놈이 실 끊어진 인형이었다면 이놈은 다 썩은 나무처럼 삐걱대며 무너졌다.

"이야아!"

그런데 전체적으로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것은 아닌 듯했다. 등을 보인 그에게 또 다른 얼치기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빈틈을 노릴 것이라면 굳이 '나 여기 있소. 지금부터 덤벼들겠소.' 알려주듯 소리를 질러대야 하는가.

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리를 휘둘렀다.

인간은 평생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팔 힘보다는 다리 힘이 훨씬 강하다. 하지만 인간의 투술에 발기술은 거의 없다시피 한데, 그건 보법의 중요성, 또 하나는 위험부담 때문이었다.

다리는 팔과 다르다. 한번 뻗으면 회수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다리를 한쪽이든 양쪽이든 뻗는 상태에서는 보법을 구사할 수가 없다. 한 마디로 뒤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두술에서는 발기술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뭐 어떤가. 이런 얼치기들을 상대로라면 기술 따위는 사치다.

콰직!

가슴을 걷어차인 놈이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다시 일어설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가슴을 움켜잡은 채 이리저리 굴러댔다.

"딱 좋군."

타는 속에 알아서 날아든 부나방, 아니 장작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실컷 써주는 것이 예의 아니겠나.

준수한 청년의 두 눈이 광인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그 흉험함을 느꼈는지, 아직 멀쩡히 서 있던 이들이 나직이 신음하며 뒷걸음질 쳤다.

***

마지막 하나. 쓰러지려는 것을 억지로 몰아세운 채 실컷 두들기던 차였다.

"음?"

골목 끄트머리에서 나타난, 호리호리한 체형. 그러나 걸음걸이나 자세를 보아하니 단순히 호리호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들어버린 습관 때문에, 새로 나타난 자가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조금 늦고 말았다.

"거기, 무슨 일인가?"

고압적인 말투. 눈이 있으면 무슨 일인지 대강 짐작할 터인데, 목소리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묻어나지 않는다. 일행이 더 있거나, 아니면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일 터. 카인은 후자 쪽에 좀 더 무게를 두었다.

"누구시오."

"그게 중요한가?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고, 대뜸 추궁이라. 상대의 신분이 가볍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카인은 이 무례한 여인에게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지만,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며 대꾸했다.

"이자들이 나를 습격했소. 단순히 내 품에 있는 은전을 노린 것인지, 아니면 내게 원한이 있는 자가 사주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이곳에서 나를 기다린 것은 사실이오."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나?"

"눈이 있다면 이 정황만 봐도 짐작할 수 있을 텐데?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이들을 심문해보면 되겠군. 하지만 당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관군이 곧 올 거다. 그때까지 기다리겠나?"

"소란에 얽히고 싶지는 않은데, 가능하다면 말이지."

순순히 보내주리라 예상했다. 범상치 않은 신분의 여인이 길을 가던 중 우연히 들린 소리에 이 칙칙한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리 없지 않은가.

"내가 누군지 알고 있겠지? 내 말에 틀린 점이 있거든 언제든 찾아오든, 사람을 보내든 하시오. 도망치지 않을 테니."

"…그러지."

역시나, 반응도 예상했던 대로다.

카인은 옷매무새를 만지고 골목을 벗어났다.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불필요한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썩 달갑지 않았으나, 그는 여전히 별일 아니라고 여겼다. 그저 무대에서 노래를 파는 사내에게 노래 부르는 재주만 있는 게 아니더라 하는 소문만 알음알음 퍼지는 정도겠지.

***

"아가씨."

실비아는 시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장판이 된 골목에 발을 디뎠다. 피칠갑을 한 사내 대여섯이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었다. 여인이 보기에는 썩 좋지 않은 광경이었으나 실비아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무술을 상당한 수준까지 연마했고, 그 와중에 어지간한 사내도 견디지 못할 경험을 했다.

목과 사지가 잘려 돌아다니는 수준이 정도가 아니라면 그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광경은 드물었다.

"놀랍네."

"예. 질 낮은 왈패들 같기는 합니다만, 그렇다 해도 홀로 여럿을 눌러버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하물며 날붙이까지 지닌 이들을……."

"평범한 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

"그렇습니다. 한번 알아볼까요?"

"과민반응이야. 바깥에서 온 자라고 했잖아. 요즘 같은 세상에 떠돌이 노릇을 하려면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재주가 있어야 해. 그렇게 생각하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니잖아?"

과민반응이라. 맞다. 하지만 성주의 딸을 곁에서 지켜야 하는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일단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예상치 못하게 좋은 구경했네. 직접 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지만."

"좋은 구경이요.…"

시녀는 자신이 헛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이 아가씨는 정말 보통이 아니다. 세상 어느 귀족 아가씨와도 다를 것이다.

'사내로 태어나셨어야 할 분이야.'

아닌가? 그랬다면 보리스 공자와 후계 다둠을 벌였을지도 모르니, 솔롬과 크렘보르 가문을 생각하면 그녀가 여인으로 태어난 것이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가자."

"예, 아가씨."

끊어질 듯 말 듯 한 신음만이 조용히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녀들은 칙칙한 거리를 떠났다. 조용히 실비아의 뒤를 따르던 시녀가 힐끗 뒤를 돌아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뒷일은 잠시 후 도착할 관병들이 알아서 처리하리라.

***

'평탄하게 살아온 자는 아니란 말이지.'

곱상한 외모 때문에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소 선입견을 가졌던가. 무대 위에서 고상하게 노래하던 사내가 거친 면모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흥미가 더 커졌다.

"어떤 자인지 알아봐."

수상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꽤 시간이 지난 후에도 마땅히 들려오는 것이 없었다. 솔롬은 물론, 판니른 전역에 눈과 귀를 가진 이들이 사내 하나의 과거를 캐지 못한 것이다. 이는 한 가지를 의미했다.

"판니른 밖에서 온 자입니다. 그것도 아마, 남쪽에서 올라온 것 같습니다."

"남쪽…?"

판니른에서 남쪽이라면 7황자 자콥 트라소프의 영역 밖이다. 그렇다면 수하들이 그 카인이라는 자에 대해 알아오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흐음."

가뜩이나 불이 붙고 있던 호기심이 한층 더 강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