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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05화 (805/1,064)

805화

얼굴을 본 적은 당연히 없지만, 이름만큼은 귀가 따갑게 들었다.

그들에게 있어 바라눔 트라소프는 적의 수장이기 전에, 어떠한 목표였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자콥 트라소프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쓰러뜨려야 하는 대상이자 목표.

그렇기에 그들은 바라눔 트라소프의 위명이 전장에서부터 전해져 올 때마다 괜히 긴장하곤 했다.

그들이 맞닥뜨린 적은 분명 강대했으며, 그 꼭대기에 있는 바라눔 트라소프로 인해 그들은 칼날 위에 서 있음을 실감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있어, 바라눔 트라소프는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친근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자가 죽었단다. 자신의 영토에서 일어난 소란을 가라앉히다가 말이다.

"허위 정보… 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군이 먼저 움직이기를 노리고 말인가?"

아드리안의 물음에 살라스가 답했다. 아드리안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이런 회의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이 드문 아드리안이었기에, 그가 이렇듯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특별하다고 할 만했다. 그것도 이렇게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서, 하지만 이걸 두고 아드리안게 그답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사안이 사안이었으니까 말이다.

입을 연 것은 아드리안이지만, 자리에 있는 대다수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충격적이고,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전장의 눈먼 칼은 대상을 가리지 않지."

살라스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앙 조정에서 이만한 사안을 가지고 진중하게 움직이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이 충격적인 소식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뭐, 그렇다고 친다면…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바라눔 트라소프는 일찌감치 후계자를 세워둔 것으로 아는데, 그럼 그 후계자가 뒤를 잇는 겁니까?"

"그렇겠지."

그 뒤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군터가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두들기기 전까지.

"허위 정보는 아니든, 두고 보면 알겠지. 사실이라면 나쁘지 않은 소식임이 분명하고."

"그렇긴 합니다만."

"여기서 복잡하게 생각한들 뭐가 달라지나. 혹시라도 장졸들이 동요하는 일이 없도록 단속하도록."

"당분간은 외부인에 대한 검문을 강화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어떤 식으로든 혼란이 일어났다 싶으면 온갖,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까지 꿈틀대기 마련이다. 군터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선선히 그러라고 허락했다.

***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이들은 백성들이 어리석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백성들은 어리석지 않다. 다만 현명하지 못할 뿐.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에 뿌리째로 흔들릴 수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전쟁에 관련된 소식이라면, 조금만 생각해보면 헛소문이라는 것을 알 법한 터무니없는 것일지라 해도 일단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것이다.

"바라눔 트라소프가 죽었대. 그래서 우리 전하가 이참에 전쟁을 완전히 끝내버리려고 병력을 긁어모으신다는 거야."

사람의 입을 타고 흐르는 소문은 달리는 말보다 빠르다. 바라눔 트라소프의 허망한 전사 소식은 그가 죽은 곳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땅에도 전해졌다. 백성들은 그들의 윗사람들과는 달리, 그 어마어마한 소식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바라눔 트라소프의 죽음 자세가 가진 의미보다는, 그 죽음이 불러일으킬 일들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이를테면 지금 떠들어대는, 입담이 제법인 중년 사내의 이어지는 말같은,

"판나른에 할당된 것이 3만이라더군. 기한 내에 병사 3만 명을 서부 전선으로 보내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이 3만을 징집병으로 채운다는……."

"징집병?"

"원래 병사였던 이들을 보내는 게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을 동원한다는 말이네."

"그, 그럼 우리가 끌려갈 수도 있다는 말인가?"

"자네는 아니더라도 자네 아들내미는, 글쎄. 모르는 일이지.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구먼."

입담 좋은 중년인과 동년배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그, 그러면 어떻게 하지? 미리 손이라도 써둬야 하나?"

"손을 쓴다고?"

"그, 관리들에게 잘 보여두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겁니다."

"음?"

나이 지긋한 사내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맑은 목소리.

"그게 무슨 말인가?"

칙칙한 중년 남성 둘이 앉아있던 자리에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 끼어들었다. 청년은 자연스럽게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더니, 빈 잔 하나를 쓱 내밀었다.

그러자 관리 운운했던 사내가 그 잔을 채워주며 다시 물었다.

"카인, 말해보게.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니?"

카인이라 불린 청년이 느긋하게 목을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재촉에도 적당하게 사람의 애를 태우는 것이 중년의 재담꾼 못지않았다.

"할당된 병력이 3만, 그 숫자가 정확한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그 숫자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부터 생각해보시죠.."

"음? 무슨 뜻인가? 어디서, 어떻게?"

"판니른에 할당된 머릿수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는 총독에게 맡겨진 임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아아. 그렇군."

말솜씨가 좋던 중년인은 뭔가 이해했는지 탄성을 흘렸고, 다른 한 명은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판니른에서 3만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잘에서도 긁어모을 것이고, 뭐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어떻게든 머릿수를 맞추겠지요. 그리고 이곳은 솔롬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곳이 솔롬인 것을 모르는 이가 있는가?"

"거듭 설명하지만, 병력을 만드는 것은 총독의 임무입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위해 지방의 관리들에게 명령하거나, 협조를 구할 테지요. 솔롬의 성주께도 말입니다."

"그래서?"

"일을 하고 세금을 바치는 사내들을 보내라는 겁니다. 재물을 내놓으라고 하는 격이지요. 그런 명령, 혹은 협조 요청을 누군들 좋아하겠습니까? 힘 있는 자는 거절할 테고, 힘없는 자는 욕하면서도 따를 테지요. 그럼 이 솔롬의 성주께서는 어떻겠습니까?"

"으음."

이쯤 되자 중년 사내도 어느 정도 이해한 듯 찌푸린 미간을 펴고 침음을 흘렸다.

"아마, 거절하시지 않을까?"

카인이라는 청년의 논리대로라면 말이다.

솔롬의 성주이자 판니른의 방위군단장인 군터 크렘보르는 판니른에서 가장 힘 있는 귀족 중 한 사람이었다. 이번 전쟁에서도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고 하지 않은가. 판니른의 군권이 그의 손에 있고, 힘 있는 귀족 가문들도 그와 대적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총독마저 그의 눈치를 본다는 말이 돌

정도였으니, 그와 그의 가문이 지닌 권세는 판니른에서한 손에 꼽힌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이는 테리브란에 있는 조정의 명이니 성주께서도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솔롬의 젊은 사내를 순순히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 다른 수를 쓰겠지요."

"그럼, 염려할 필요는 없다는 게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청년, 카인은 안도하는 중년인을 보며 내심 조소했다. 장사하는 재주는 꽤 쓸만한 자가 이째 정국을 살피는 시각은 이리도 협소한지 모를 일이다. 늦둥이 아들을 그리도 아낀다더니, 그래서일까?

"그럼."

"아, 벌써 일어나려는가?"

"오늘 저녁 무대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준비가 필요한가? 자네가 만취해서 무대 위에서 통곡한다고 해도 관객들은 환호할 텐데."

"하하."

저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 때때로 머리가 굳는 중년인이 그의 고용주다. 처음에는 매일, 매 순간 깐깐한 눈으로 위아래를 훑어보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렇듯 무조건적인 호의를 드러내고 있다.

'아니, 무조건은 아니지.'

그가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부터였다. 촌구석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른, 황도의 세련된 시가(詩歌)를 선보였을 때부터.

"그나저나, 정말 생각 없나?"

"예."

"아쉽구만, 그들 중 누구 하나만 붙잡더라도, 자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인데."

"한 사람만을 위해 부르는 노래는 알지 못합니다."

"그게 뭐가 어렵나? 그냥 눈만 계속 마주치면 그만일 것을."

카인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중년 인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그저 자신에게 저런 재주가 없음을 아쉬워할 뿐. 젊었을 적의 자신에게 저런 재주가 있었다면 귀부인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사교계의 풍운아가 되었을…….

'이거 참. 주책이군.'

부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저 준수한 외모의 청년은 빛나는 재능을 갖고 있다. 그 재능 때문인지, 사람 자체가 빛나 보이기도 했다. 말 한마디에도 뭔지 모를 기품이 있는 것 같고, 행동도 저 나이대의 청년들 같지 않게 진중한 면모가 있다.

귀부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단순히 근사한 노래를 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만으로는 도도한 여인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얻을 수 없다.

'뭐, 아무렴 어때.'

어느 날 찾아온 선물이다. 먼지로 덮인 외관에 속아 내쳤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그러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오늘도 칭찬하면서, 중년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

나는 헤매고 있소. 제도의 거리를, 성상(聖像)이 우뚝 선 광장의 한복판을, 스치는 얼굴 얼굴에서 보고 있소. 비탄의 자국을, 식은 영혼을, 기만자의 열변, 눈먼 자들의 두려움 속에서.

나는 듣고 있소. 영광의 황혼을, 마음에 맺힌 구속을.

"여느 때와 다르네요."

실비아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어떤 점이?"

"글쎄요. 분위기도 분위기지만…주제부터가 다르잖아요?"

"그렇긴 하지."

낯설지만, 그래서 더 좋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매일 듣다 보면 질리는 법. 노래도 마찬가지다. 달콤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색다른 자극도 필요하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실비아는 저 웅장하면서도 씁쓸함이 묻어나는 제목 모를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

"카인이라고 했었나?"

"예. 아가씨."

어느덧 노래가 끝나고, 무대 위의 청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아가씨. 원하신다면 따로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내 자그마한 욕심 때문에 이 즐거움을 잃을 수는 없지."

"예?"

실비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요란한 박수갈채가 이어지는 가운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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