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804화 (804/1,064)

804화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바라눔 트라소프의 장자이자 후계자였다. 그 바라눔 트라소프가 무샤라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것은 단순히 그가 아들 중 나이가 제일 많아서가 아니었다. 무샤라트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자질을 줄곧 증명해왔고, 그를 통해 그는 부친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야심과 패기. 바라눔 트라소프의 장자는 부친의 장점을 물려받은 걸물이었다.

그런 그는 자신이 있었다. 언제고 부진이 자신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날이 온다면, 부친이 일군 가업을 더욱 발전시킬 자신이.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부친의 뒤를 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하."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이 낯선 호칭에 아직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 누가 감히 짐작이나 했을까. 옥좌에 가장 가깝다고 세인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던 그가, 바라눔 트라소프가 그렇게 허망하게 쓰러질 줄이야.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단단히 먹으셔야 합니다."

"포트락 장군은…그는 어디쯤 왔다던가."

"닷새 전에 알힐레를 지났다고 합니다. 최대한 길을 서두르고 있으니, 보름 내로는 도착할 것입니다."

"보름. 보름이라."

아비이기 전에 주군이었다. 무샤라트 트라소프에게 있어 그의 부진은 하나의 거대한 산이었다. 우러러볼수밖에 없고, 닭고 싶을 수밖에 없는.

그에게 물려받을 가업은 상처투성이일지언정, 하나의 완전한 제국일 것이라 믿었다. 그렇기에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상처와 혼란이 가시지 않은 제국을 어찌 다스려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의 부친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그것이었다. 네 대에는 칼보다는 깃펜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한다.'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하지만 충격적이라고 하여, 현실부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세상사가 모두 머릿속에 그린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고, 이 참담한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혼자 생각을 좀 하고 싶구나. 일단은 모두 물러가라."

"예. 전하."

신하들은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들 역시 머릿속이 복잡한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낫군. 그럴듯해 보여. 적어도 겉으로는.]

신하들이 모두 물러간 대전, 한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세웠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단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나, 그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걱정? 그대도 걱정이라는 것을 하시오?"

설령 그런 감정이 있다고 해도, 그가 자신을 걱정하지는 않았으리라. 알 수 있다.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가 그리 말하고 있었으니.

[글쎄. 좋을대로 생각해라. 그나저나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군.]

"내게 해코지라도 하러 오셨소?"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렇게 독대하는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겠지.]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확답을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무샤라트 트라소프의 굳은 몸이 살짝 풀렸다.

"용건은?"

[알고 있겠지만, 나는 네 아비를 도왔었다. 비록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기는 했으나, 생각은 여전해.]

"생각?"

[그래, 자콥이 옥좌에 올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지.]

"그렇다면……."

[네 아비를 도왔듯, 이제는 너를 돕겠다. 물론, 네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그의 부친이 생전에 이 비밀스러운 동맹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믿을 수 없는 자들.'

이런저런 사감이 섞인 말들을 걸러내고 남는 결론은 그것이었다. 음험한 꿍꿍이가 있으며, 그렇기에 당장 손을 잡았다고 해서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는 자들.

부친은 이들과 손을 잡았으면서도 그들의 도움은 최대한 배제했다. 그들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실 부친에게 이들의 힘은 필요치 않았다. 다만 적이 될 수는 없었기에 손을 잡았을 뿐.

'하지만 내게는, 이들의 힘이 필요하다.'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또한 그가 후계자로 선택받게 한 자질이었다. 그는 자신의 불안한 정치적, 현실적 입지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잠재적인 적까지 신경 써야 하는 처지였다.

일찌감치 후계자로 임명되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부친의 선택이었다. 자질을 보였다고 해도 그 자질을 바탕으로 이렇다 할 실적을 세운 적도 없다. 지금 모든 일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났고, 이제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자신에게 부친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와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려움이 많겠지. 외부의 적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당장 네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다른 문제들부터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오."

[여유롭군. 쥬드 포트락을 믿고 있나?]

비웃음. 거짓이 없다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진의를 느껴야 한다는 점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

[잘 생각해라. 그 녀석이 충성한 것은 네가 아니라 네 아비다. 네 아비가 너를 후계자로 삼았다지만, 그 녀석의 속내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지.]

옳은 말이다.

[게다가… 그 녀석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번에 전선으로 나간 것은 가뜩이나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더 부추기는 행위였지. 녀석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 녀석이 네 뒤에 서준다고 해도, 그건 잠깐뿐일 거다.]

이 또한, 옳은 말이다.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침묵했다. 환아는 그 침묵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기에 가만히 기다렸다.

고민은 짧지 않았으나, 어차피 나올 답은 뻔하다. 어느 정도 야심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식으로 나를 도울 수 있소?"

[네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

무샤라트 트라소프를 비롯하여 사실을 감추고 싶었던 이들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결국 바라눔 트라소프가 허망하게 쓰러졌다는 소식은 감추려고 했던 노력을 비웃듯, 그 노력만큼 더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소식을 들은 이들 대다수는 처음에 그 이야기를 헛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헛소문이 아님을 알았을 때,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말이냐."

"어찌하여 기뻐하지 않으십니까?"

"왜 기뻐하지 않느냐고?"

자콥 트라소프는 카자쿠의 물음에 슬쩍 입매를 매만졌다. 그의 입은 꾹 닫혀 있었다. 당연히 입꼬리도 올라가거나 하지 않았다. 그 말대로, 그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왜냐고 묻는다면.

"핏줄에 대한 정 때문은 아니다. 그런 감정 따위는 옛적부터 없었으니, 새삼 이제 와 핏줄 타령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그렇다면 어째서."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앞만 보고 빠르게 달리던 자가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드문 일도 아니다. 사감을 접고 봐도 바라눔은 확실히 대단한 자였으나, 그렇다고 그가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크루트니악이 제 역할을 제대로, 아니 기대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게 해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콥 트라소프는 자꾸 차오르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들, 어차피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상대가 바뀌었을 뿐이다. 상황이 조금 더 여유롭게 흘러갈 가능성이 커졌으나, 낙관할 수는 없다. 이제껏 그러했듯, 전력을 다해 상대하면 그뿐.

"전해라.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 이전에 내린 명을 충실히 수행하라고."

"예."

***

군터는 솔롬의 성주이기 전에 판나른의 방위군단장이었다. 판니른 총독 로드니 캄브라이는 하잘에 있을 당시에도 군무에 관한 중대사는 군터와 의논하곤 했는데, 현재 그의 대리로서 일하고 있는 운바소르 아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서쪽에서 날아온 전갈을 받자마자 그 사실을 군터와 공유하고, 의논하고자 했다.

"아주 쥐어짜려는 모양이군요."

토어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병력을 마련해라. 잡다한 것들은 다 쳐내고, 본론만 말하자면 이것이었다.

"여력이 있나?"

"없습니다."

살라스가 즉답했다.

"귀족들이 그들의 사병을 모두 내놓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들이 그렇게 자발적으로 나서줄 리는 없으니……."

"징집뿐입니다."

시간도 촉박하다. 끌어모은 병력을 제대로 훈련도 못 시키고 전선으로 보내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머릿수만 채운 병력은 고기 방패에 불과하다.

황자가 바라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르지만.

"머릿수만 채우기 급급하다니. 그새 상황이 그리 안 좋아진 걸까요."

전해져 오는 소식은 늘 단편적이다. 그것만 가지고 전체적인 상황을 그리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뭐,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니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마하니, 총독 대리가 허튼짓을 하지는 않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허튼짓이란, 채워야 하는 머릿수에 방위군의 비중을 높이는 일을 의미했다. 머릿수만 채우는 게 아니라 병력의 질까지도 신경 쓰는, '제가 이만큼 전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하고 외치기 위한.

"공명심에 불타는 자는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도 아니지요. 총독의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알고 있을 테지만, 총독이 된 이후에 무탈하려면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또한 알고 있을 겁니다."

판니른에서 군터 크렘보르의 영향력은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 크렘보르 가문은 이제 솔롬에 완전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몰던을 비롯한 유력 귀족 가문들과의 관계 또한 착실히 다져가고 있다. 그런 판국에 운바소르 아실이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애초에 그자는 장군의 협조가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낙관적인 전망 덕분인지 재미없는 주제가 오르내리는 와중에도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바로 그즈음이었다. 바라눔 트라소프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솔롬에까지 닿은 것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