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3화
환야는 제국의 군주 중 가장 신비로운 자라 할 수 있다. 과거는 물론, 그가 황제의 밑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황제의 온갖 비밀스러운 명령을 수행한다는 것. 진명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드러난 이름으로 보아 그가 동방 극지 출신이거나 그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제국의 어둠을 지배한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다른 군주들과 달리 영지가 없지만, 제국에 미치는 영향력은 오히려 영지가 있는 자들보다 더 크다. 그의 은밀한 행사와는 반대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상술한 황제의 비밀스러운 명령을 수행한다는 점때문이다. 드러나지 않기에 더 두렵다는 말은 환야에게 정확히 적용할 수 있으리라.
-우슬라 익세이온 저(者), 제국의 여섯 군주 中 편 일부 발췌 -
[바라눔, 그 녀석은 이제 슬슬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
진의만을 전하는 소리에는 거짓은 물론, 농담이 끼어들 자리도 없다. 그러니 지금 한 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리라.
잘 알지만, 그럼에도 그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군.]
함께 움직이고는 있지만, 서로의 속내까지 다 터놓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손을 잡고 있을 뿐. 잡은 손은 그럴 만한 이유만 있다면, 언제든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키리스트의 속내를 알지는 못했다. 단지 짐작할 뿐.
[녀석의 쓸모가 다했다고 생각하나?]
[바라눔은 뛰어난 녀석이다. 적어도 녀석의 형제들 가운데는 그렇지. 녀석은 자신만의 힘으로 지금의 세력을 일궈냈다. 땅은 병사만 있으면 얻을 수 있다지만, 사람은 아니지.]
키리스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조금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바라눔 트라소프에게는 인망이 있다. 물론 바라붐 트라소프가 용맹한 만큼 사나운 사내라는 것은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런 사나움조차 어떤 이들에게는 매력으로 다가왔을까.
바라눔 트라소프를 따르는 이들 가운데, 쥬드 포트락 같은 자는 만인을 내려보는 키리스트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인사였다. 그런 자가 황제도 아닌 일개 횡자의 밑으로 들어갔을 때, 키리스트는 뜻밖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대로 두면 놈은 점점 더 커질 거다. 그렇게 되면 여차할 때 통제하기가 힘들어져.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부인할 수 없군.]
지금도 틈만 나면 삐딱하게 굴고 있는 바라눔 트라소프다. 만약 그가 지금의 혼란을 수습하고, 잠시 미뤄둔 전쟁을 다시 이끌기 시작한다면…….
[자콥도 만만한 녀석은 아닐 텐데.]
[그렇긴 하지만, 역시 바라눔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
[줄카가 개입한 정황이 있지 않나.]
바라눔이 물러나고 꽤 한산해진 아록 쪽 전선에 정체불명의 정예 병력이 등장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붉은 안광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부를 드러내지 않는 갑옷 등에 대해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한 가지였다.
[그래. 그렇기 때문이다. 녀석이 개입한 이상, 이쪽도 손을 써 줘야 균형이 맞겠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라눔은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힘을 실어줘야 하는데, 그 대상이 바라눔이라면 부담스럽다는 거다. 만에 하나라도 그림에 먹물이 튀는 것이 싫다는 것이겠지만, 그 정도의 위협이라도 느끼게 했다는 것이 바라눔 트라소프의 저력에 대한 반증일터.
[당신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살기등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눈이 떠올랐다. 머지않아 그 형형하던 눈빛을 더는 보지 못하게 되리라 생각하니, 조금 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같았다.
아마도 착각이겠지만.
***
[크트루니악이라는 녀석은 자신이 막다른 곳에 몰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녀석은 이곳을 자신의 무덤으로 삼고자 한다. 하지만 혼자 묻힐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악에 받친 건가.
[다르지. 녀석은 과거 왕이라 불렸으며, 많은 땅과 사람을 다스렸다. 시대는 변했어도 녀석은 변하지 않았으니, 자신의 최후가 자신과 걸맞기를 바랄 테지. 하물며 싸움에서 패해 비참히 쓰러지기를 바랄까.]
"그렇다면?"
[이 산맥 자체가 녀석의 무덤이고 함정이다. 준비가 끝나면 녀석은 함정을 발동시킬 테고, 그러면 끝이다. 적어도 녀석과 인접해 있는 모든 산 것들이 그대로 이 산맥에 묻힐 것이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부관이 다급히 외쳤다.
"전하! 지금이라도 병력을 물리시지요!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어울려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 물러나면? 저 역병 같은 놈은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회복해서 골치를
썩이겠지. 이번 같은 기회가 다시 오리라 생각하느냐?"
"전하. 하지만……."
"위험 없는 전장은 없는 법. 함정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놈이 대응하기 전에 목을 치면 그만이야."
[호오.]
순수한 감탄, 바라눔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쁘게 명령을 내렸고, 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혹자는 무모함이라 말할 테지만, 그의 눈에는 무모함이 아닌 패기로 보였다. 전후 사정을 이해한 상황에서 할 수 있다는, 해야만 한다는 마음으로 가시밭길에 발을 딛는 것이다.
이런 패기라니. 왕년의 황제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어째서 키리스트가 바라눔을 신경 썼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확실히 바라눔을 이대로 둔다면, 어쩌면 키리스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망칠 먹물 한 방울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걸 지켜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재미, 그 정도 흥미만으로는 키리스트를 거스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조용히 망토로 자신을 가렸다. 어둠 속에 묻혀 사라지던 중, 아주 잠깐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으나 반응하지는 않았다. 발칙한 애송이를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
지옥의 한복판이 이러할까. 매캐한 검은 연기가 어둠을 더욱 검게 물들이고, 흩어진 불씨가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서 뛴다. 간혹 아직 그치지 않은 바람에 덩치를 키운 불씨는 자그마한 불길이 되어 풀과 나무를 계속해서 태웠다.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실제로 귀신이 내는 소리는 아니었으나, 그와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비슷한 정신체라고 할 수 있는 정령들이 내지르는 울음이었으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군.]
크트루니악은 저 앞,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인형을 눈에 담았다.
적장. 아니, 황자라고 했던가?
황자. 황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한번은 그자의 수하에게, 또 한번은 그자의 아들에게 패하는군.]
왕의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패배보다도 화가 나는 것은, 마지막까지 남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는 굴욕감이었다.
[년 누구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허공이 비틀린다. 균열이 이는 듯하더니, 흐릿한 어둠이 점차 자신의 색을 드러낸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크트루니악은 정체불명의 상대가 자신과 동류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자렸다. 기운이 쇠하고, 육신은 빠르게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으나 그럴수록 그의 영혼은 예민해졌다.
그렇게 한껏 예민해진 감각이 알려주었다. 저자는 자신의 동족, 있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것을.
[깔끔하게 끝나기를 바랐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렇게는 안 되는군.]
[누구냐고 물었다.]
[그게 중요한가?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텐데.]
[난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세상은 내 생각보다 넓은 모양이군.]
[그렇지도 않아. 소란이 이는 곳에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렇군. 내가 너무 눈에 띄었던가.]
[우리는 개인이 아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지.]
크트루니악은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저항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은, 일말의 자존심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무뎌졌다고 생각한 감정이 들끓고 있지 않나, 환야는 크트루니악의 도전적인 눈빛을 응시하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허리춤에 잠들어 있던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이렇게 되기를 바란 적은 없다.]
[스스로 삼켰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후회하나?)
[글쎄.]
크트루니악은 잠시 생각했다.
후회하는가?
어린 시절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겨 했던 땅따먹기가 어느 순간부터 시시하게 느껴졌다. 나이를 먹어서, 머리가 굵어져서라고 이유를 대지만 정말 그게 전부일까?
아니. 그게 아니다. 눈높이가, 사고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달라졌기 때문에.
마찬가지다. 신을 삼킨 후, 그는 이전과 달라졌다. 평범한 인간이었을 당시의 자신이 남처럼 느껴졌다. 그게 이상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될 줄 몰랐지만, 알았다고 한들 다른 선택을 했을까?
[아니. 아닌 것 같군.]
[그래, 좋고 나쁜 것도, 옳고 그른 것도 없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흐름의 일부이니.]
생명은 땅에 묻히고, 구름은 비가 되어 내려온다. 모두가 흐름이다. 어떤 이들은 거창하게 운명이라고도 부르겠지.
[그럴지도. 하지만 선택은 내 몫이다.]
[그 말이 옳아. 년 선택했고, 이것이 그 결과다.]
크트루니악은 창을 들었다. 긴 나뭇가지처럼 보이던 그것은 그의 의지가 깃들자 점점 날카로워지더니, 곧 한 자루 창으로 변했다.
[나는 다시 잠들게 되겠군.]
[아니.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그랬겠지만, 지금의 너 정도는 그럴 필요도 없지. 끝내주겠다.]
크트루니악이 달려들었다. 삐걱대는 몸이었으나 움직임은 화살처럼 빨랐다.
환야는 일직선으로 덤벼드는 크트루니악을 응시하다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흩날림과 동시에, 크트루니악이 발을 뻗어 땅을 찍었다. 그리곤 대뜸 창을 휘둘러 좌측의 허공을 갈랐다.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
차갑게 가라앉아있던 크트루니악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훌륭하다.]
그의 창이 가른 허공의 한복판, 공간이 일렁이며 환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몸을 가린 어둠의 작은 한 부분에 가느다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애석하군. 만전이었다면 좋은 승부가 됐을 터인데.]
크트루니악의 무릎이 꺾였다. 하얗게 질린 입술 사이로 핏물이 새어 나왔다.
[닿지 않았군.]
[운이 좋았지.]
환야의 망토는 법보였다. 그것도 어지간한 법보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진귀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이 암벽(暗壁)에 상처를 낸 건 네가 처음이니.]
[그렇…군.]
크트루니악이 쓰러졌다. 몇 번 작게 이어지던 호흡이 끊기자, 그의 육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빗물이 땅에 스며들듯, 그의 피와 살, 뼈가 검은 재사이로 사라져갔다.
크트루니악이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환야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 그곳에 피투성이가 된 인형, 아니 시신이 있었다.
[승리하면 용맹이고, 패배하면 만용이지.]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으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과뿐이다.
성공은 때로 눈을 멀게 만든다. 이제껏 그래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착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심어준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이상, 그 누구라도 미래를 확언할 수는 없음에도.
[너의 선택이었다.]
환야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떨어진 작은 불씨 하나가 시신에 떨어졌다.
좁쌀보다도 더 작았던 불씨는 다 식은 살점에 당자마자 무섭게 덩치를 키우더니, 곧 흔적도 없이 시신을 태워 없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