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화
한밤중인데도 전혀 어둡지 않았다. 산 아래 포진한 병사들이 든 횃불 때문에?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그건 아주 작은 요인에 불과했다.
빛.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무리가 거대한 산맥 곳곳에 떠올라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 아니 아늑해지는 아름다운 빛무리가.
"현혹되지 마라!"
주변의 장교들마저 작게 한숨을 내쉴 때, 바라눔 트라소프가 사납게 일갈했다. 그의 외침에 그 주변의 장졸들은 풀어진 표정을 지우고 낯빛을 굳혔다.
"숱한 아군이 저것들로 인해 죽어 나갔음을 잊지 마라!"
옳은 말이다. 어찌 잊겠는가.
저것은 정령의 빛이다. 말 그대로 정령들이 발하는 빛으로, 당연하지만 비슷한 이름을 가진 법구들과는 아무런 관련이나 유사성도 없었다.
저것은 무시무시한 마성을 지닌 빛이다. 사람을 홀리며, 정신을 흐리고 결국 죽음으로 이끈다. 저 삿된 아름다움에 속아 명을 달리한 이들이 몇이던가.
"기름 준비!"
기름 준비-!
기름! 기름 준비-!
콸라카이.
저 거대한 산맥의 이름이다. 옛 언어라는 것은 짐작하지만, 그 뜻이 뭔지는 알 수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 오늘이 지나면 저 산맥은 민둥 산맥이나 검은 산맥으로 불리게 될 테니.
"쿼르테즈에게 신호를 보내라!"
바라눔 트라소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푸른 빛을 흘리는 화살 한 대가 밤하늘을 갈랐다. 가느다란 빛이었으나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신호, 그 신호를 읽은 쿼르테즈 파바노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청색 전포가 움직이는 몸을 따라 펄럭였다.
"신호다! 불을 놔라!"
어마어마한 양의 기름이 날아들었다. 병사들이 직접 기름 주머니를 던지기도 했고, 투석기로 기름을 가득 담은 항아리를 날리기도 했다. 술사들이 놓은 불씨가 기름에 달라붙고, 피어오른 불의 띠가 삽시간에 산을 에워쌌다. 하나, 돌, 꼬리를 물고 이어진 산들에 불길이 일기 시작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좋아! 다음!"
불을 일으켰으니 다음에는 목표를 향해 퍼뜨려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밤에는 바람이 없었다.
"쯧! 힘써주셔야겠소."
쿼르테즈의 시선이 곁에 있던 중년인에게 옮겨갔다. 상대적으로 가볍게 무장한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곤 미리 준비해둔 제단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와 비슷한 차림을 한 이들 백여 명이 미리 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다시피 바람이 불지 않는다. 우리의 준비가 헛되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헛된 준비였어도 좋으니 고생할 일이 없기를 바랐습니다만."
개중 한 명이 우스갯소리를 우스갯소리로 받았다. 중년인을 포함, 제단 주변에 있던 이들 모두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좋아. 다들 긴장은 던 모양이군. 부담 갖지 마라! 상대가 대단한 존재인 것은 맞지만, 어차피 한번 패하여 사라졌던 자일 뿐이다. 이제껏 우리가 그자의 여러 기이한 힘에 낭패를 본 것은 맞으나, 그래도 결국 우리는 저자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어려울 것 없이, 간단하게 바람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우리는 저자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간단하게는 아니다. 어지간한 바람으로는 산맥을 감싸다시피 한 불을 번지게 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커다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괜찮은 것 같군.'
중년인은 내심 안도했다. 그간 크트루니악과의 전투를 거듭하면서, 그가 부리는 온갖 신비에 여러 번 낭패를 겪어야 했다. 그 전투들은 그를 비롯한 여러 술사의 마음속에 깊은 패배감을 새겼는데, 그 보이지 않는 상처는 그들의 정신을 크게 좀먹었다.
술법을 사용하기 위해 적잖은 정신력을 소모해야 하는 술사들에게 정신적인 부담이 생긴다는 것은,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수준의 장애가 생긴다는 것과 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일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중년인은 그들이 최대한 마음의 부담을 덜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게 농을 던져봤는데, 다행히 어느 정도는 효과를 거둔 듯했다.
"시작하지!"
술식을 강화하기 위한 제단에, 솜씨 좋은 궁정 술사가 백 하고도 일곱이 모였다. 그들이 힘을 합치니 곧 잔잔하던 대기가 격랑을 맞았다. 태풍이라도 몰아치는 것처럼 크게 바람이 일더니, 산맥 전역에 휘몰아쳤다.
바람을 맞은 불길이 한층 더 거세게 타올랐다. 산맥 전역을 태울 것처럼 번져간 불길은 산맥 외곽만이 아니라 그 내부에까지 밀고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산맥 곳곳에 떠올라 있던 빛무리가 한층 더 강하게 빛났다.
"으음!"
중년인이 침음을 흘렸다. 산맥 전역에 걸쳐 일어난 아름다운 빛. 흡사 오로라 같은, 황홀한 광경에도 그는 마음 편히 감탄할 수 없었다. 그 오로라가, 빛의 장막이 산맥을 덮으면서 기세 좋게 뻗어가던 불길이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이다.
집어삼키려는 불과 밀어내려는 빛의 장막. 둘은 마치 기 싸움이라도 벌이듯 끊임없이 서로를 밀어냈다. 불길이 자아내는 검은 연기 속에 아름다운 및무리가 섞여 있었다.
***
"끝까지 쉽지 않군."
바라눔 트라소프가 혀를 찼다. 빛의 장막과 불길의 제법 길게 이어진 싸움은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하고 끝났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장막의 승리라고 봐야 하리라. 비록 불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했어도 산맥 안쪽까지 번지는 것은 막아냈으니.
"전하. 어찌 하오리까?"
"하는 수 없지."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진입한다. 공격 개시."
"옛! 공격 개시!"
빛의 장막에 가로막힌 불길은 기세를 잃었다. 하지만 그을린 땅은 여전히 열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뜨거워진 땅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게 정석이나, 바라눔 트라소프는 공격을 명했다. 땅이 식으며 진군이 편해지기를 기다리기보다. 적의 힘이 조금이라도 빠져있을 때 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공격 개시-!
전열에 선, 철퇴와 방패를 든 중장보병이 경사진 땅을 밟았다. 그들의 발걸음을 방해할 수풀은 없었다.
그나마 덩치가 있는 나무들도 벌거숭이가 됐기에 시야를 가리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방패를 가슴 높이까지 든 채, 살기 가득한 눈으로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전의 전투에서 교훈을 얻은 것은 술사들만이 아니었다.
"온다!"
산맥의 외곽은 다 타버렸으나, 어디까지나 외곽뿐이었다. 빛의 장막이 가로막은 지점 이후부터는 불길이 미치지 않아 울창한 삼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적의 반격이 시작됐다. 멧돼지, 산새, 승냥이, 온갖 산짐승들이 사납게 덤벼들었다.
일반적인 짐승이 아니었다. 어딘가 기괴하게 뒤틀린 외형의 괴물들이었다.
쾅!
"커헉!"
멧돼지와 부딪친 중장보병들이 공성주에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떠서 나가떨어졌다. 멧돼지는 그러고도 기세를 줄이지 않은 채 사납게 주변을 휩쓸었다. 일반적인 멧돼지보다 덩치가 두 배 정도 커지고, 몸의 털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솟았으며, 튀어나온 엄니는 창처럼 길고 뾰족했다. 그 흉악한 모습을 보고 멧돼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안광을 본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사라져라!"
백인대에 배치되어 있던 술사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는 손에 쥔 구슬 형태의 법구, 흔히 보주라고 불리는 것에 정신과 술력을 집중했다.
그의 의지가 목소리에 담기고, 일으킨 술력이 술식을 구성했다. 그는 본래 불을 다루는 것이 장기였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 그의 장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렇기에 보주의 힘을 빌려 저 짐승안에 깃든 정령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정령이다. 정령이 깃든 짐승은 이미 마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온전한 하나의 존재가 아니기에 연결고리를 끊는다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다. 물론, 그 연결고리를 끊을 만한 힘이 있다는 전제하에.
"사라져라!"
의지와 술력이 어우러져, 무형의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다. 그 칼은 멧돼지를 갈랐으나, 피는 흐르지 않았다. 칼날이 가른 것은 멧돼지에 깃든 정령이었으므로,
카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은 기감이 발달하지 않은 자들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 정령을 공격한 술사의 귀에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그의 정신이 흔들리자, 술사는 구역질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런 일들이 산맥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나마 구역질하며 무릎을 꿇는 정도는 양호한 축에 속했다. 이 경우는 어쨌거나 성공한 것이었으니까.
구어어억!
"흐읍!"
날다람쥐처럼 재퍼르게 뛰어오른 적. 바라눔 트라소프는 그 움직임을 눈에서 놓치지 않다가, 번개처럼 검을 뻗었다.
거의 그의 상반신만 한 앞발이 머리 옆을 스치고, 그의 검은 정확히 괴물의 목을 꿰뚫었다.
쿠웅!
곰. 아니, 곰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괴상하게 생긴 괴물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온기를 잃어가는 고깃덩어리에서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이 빠져 나왔다. 바라눔 트라소프는 재차 검을 휘둘러 그 반투명한 것을 베었다. 그에게만 들리는 나직한 비명이, 비로소 확실하게 끝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끝이 없군요."
"이곳을 싸움터로 정한 것은 그놈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줬겠지."
"예. 하지만 이대로는 끝이 없겠습니다."
"아니."
그는 수하의 한숨 섞인 말을 부정했다.
"예?"
"놈의 목만 치면 된다. 그러면 다 끝나."
"전하.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이 넓은 산맥에서 그놈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아냐는 것이겠지.
바라눔 트라소프는 잠시 호흡을 고르며 정신을 집중했다. 따로 수련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기감은 고위 술사들 못지않았다. 단순한 감각의 예민함만을 따지자면 오히려 그들보다 나았고, 술사로서 수행했다면 대성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으나, 그는 가만히 앉아 심심하게 수행하는 것보다 직접 칼을 들고 피를 보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고난 재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저쪽이다."
피 묻은 검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예?"
"정령이라는 것들이 저곳에 잔뜩 모여있다."
기감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거리가 너무 멀다면 특정한 기운 같은 것을 감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기운이 너무나 강렬하고, 심지어 숨길 생각도 없는 것처럼 훤히 드러나 있다면,
"아마, 놈도 한방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군."
이번 전투에 동원한 병력이 10만 하고도 3천. 하지만 놈을 궁지에 몰아넣고, 포위까지 마친 다음에도 승리를 확신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뭘 노리고 있지?'
[고민이 되는 모양이군.]
바라눔 트라소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커다란 나무가 만든 그늘, 짙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일렁였다. 곁에 있던 호위병들이 뛰쳐나가려 했으나, 그가 손짓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그렇게 날 세울 필요 없다. 네게 도움을 주기 위해 왔으니.]
"글쎄. 전혀 반갑지가 않은데."
[여기서 자존심을 세워 봐야 의미 없다는 걸 알 텐데.]
"…좋아."
바라눔 트라소프가 손에 쥔 검을 칼집에 넣었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경직됐던 분위기가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졌다.
"일단 들어는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