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1화
나짐은 바보가 아니었다. 순진하지도 않았다. 그는 할렌의 둘째 아들이 정말로 자신과 안면을 트기 위해서 찾아왔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뭔가 바라는 게 있으니 찾아오지 않았겠나. 바라는 게 있는 자가 할렌의 둘째 아들이든, 아니면 보리스 공자는 말이다.
'뭐든 상관없지.'
보리스 공자가 요즘 열심이라는 이야기는 그도 들은 적이 있었다. 후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단단하게 굳히는 데 여념이 없는 그의 모습은, 여러 가지 소문을 낳기도 했다. 크렘보르 장군이 보리스 공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느니, 그래서 아들 대신 딸에게
가문을 잇게 할 생각을 하고 있다느니…….
물론 헛소문이겠지만, 이런 소문이 도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보리스 공자도 그래서 더 열심인 걸지도 모르지. 뭐, 그게 아니라고 해도 기반이 튼튼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시기지. 그래서 나 같은 자에게도 기회가 오는 건가.'
솔롬에 온 지 꽤 되었으나, 나짐은 여전히 자신이 외부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대접이야 부족하지 않게, 아니 만족스럽게 받고 있지만 교류하는 사람도 한정적인 데다 지시받은 업무 외에 다른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이 솔롬이라는 성, 혹은 도시조차 아직 낯설었다.
그런 점이 유감스럽지는 않았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리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도망자, 방랑자의 삶을 살아왔다. 머무는 것보다는 떠나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크렘보르의 밑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으면서도 그 시간이 그리 오래 계속되리라 생각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사령술사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부족함 없는 대접을 받으며, 여러 가지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면서 그는 점점 이 볼품없는 곳에 정을 붙이고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떠돌이의 삶을 살았지만, 그런 삶이 좋아서 산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가능하다면 한 곳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크렘보르 장군은 후계 문제에 관심이 없다.'
그에게 직접, 대놓고 물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짐작할 수 있었다. 군터 크렘보르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다. 고귀하고 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권력욕이 거의 없다. 적어도 나짐은 그렇게 느꼈다. 물론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짐은 사람의 숨겨진 면을 훔쳐보는 데 재주가 있었다. 긴 도망자 생활이 자연스레 그런 재주를 길러주었다. 그는 약속을 저버리는 고용주, 교단에 사령술사를 넘겨 한몫 쟁기려는 자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야 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군터 크렘보르는 대하기 어려운 것과는 별개로 무척이나 담백한 자였다.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으나, 의심 많은 이들이 지레짐작하고 알아서 착각하는 듯했다. 후계 문제도 그렇고, 다른 것들도 그렇고.
'크렘보르 가문은 보리스 공자가 이어받을 것이다.'
보리스 크렘보르에게 일신상의 중대한 문제라도 생기지 않는다면, 그가 크렘보르 가문을 잇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니 그와 연을 만들어둔다는 것은 크렘보르의 미래와 이어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터.
'그가 아비와 같은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만약 보리스 크렘보르가 그의 부친과 같이 술사를, 사령술사를 배척하지 않고 후대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한번 기대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꽤나 먼 미래의 이야기일 테지만,
'그래도 적당히 어울려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나짐은 자신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던 로우렌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남이 자신의 앞에서 그렇게 공손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궁금해졌다. 할렌의 아들은 자신이 사령술사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같은 태도를 보였을까?
'뭐, 생각이 달라졌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겠지.'
당장 이곳의 주인부터가 사령술사 아닌가. 대놓고 눈을 게슴츠레 뜨지는 못했을 것이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할지 몰라도.
"나짐님, 모페이브님께서……."
"아아. 그래, 곧 가겠다 전해드리게."
잠깐 홀로 상념에 잠겨있는데, 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모페이브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전날 그와 의논했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촉매에 관한 연구를 떠올렸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이 한순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뜨거운 학구열이 그의 머리를 기분 좋게 답했다.
***
'성주의 측근이라고 하면 다들 살라스님이나 그 밑의 군부 인사들만을 생각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지.'
물론 살라스나 토어릭, 아드리안 등이 군터 크렘보르의 측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간과하곤 한다. 그들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더 오랫동안 성주를 따라온 이가 있다는 것을.
모페이브.
그 이름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누구라도 그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크렘보르 가문의 집사라는 직책은, 그가 상당한 실력을 지닌 술사라는 점과 성주에게 살라스만큼이나 신임받는 중신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가리곤 한다.
그러나 로우렌은 그가 솔롬에서 살라스에 버금가는 중신이며, 때때로 성주의 마음까지도 움직이곤 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모페이브 공이 저 나짐이라는 자와 어울린단 말이지.'
크렘보르 가문의 집사가 떠돌이 술사와 어울릴 이유는 없으니, 그가 저 나짐이라는 자와 어울리는 것은 술사로서의 이유 때문일 터.
'비밀스러운 연구. 뭐 그런 것이겠지?'
성주의 지원을 받는 연구. 뭔지는 몰라도 중요한 것이겠지만, 사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성주가 저 나짐이라는 자에게 따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게 연구 때문이든, 아니면 인재를 후대하는 차원에서 그러는 것이든 상관없다.
'결국 크렘보르와 솔롬의 모든 질서는 성주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보리스 공자가 크렘보르의 독자이며 후게자라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가 성주에게 밉보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지금 세간에 떠도는 헛소문이 사실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성주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게다가.
'후계 문제에도, 외부의 중대사에도 시들시들한 자가 따로 관심을 두고 있는 일이라.'
개인적인 궁금증도 있었다. 성주는 이번에 해들리르의 일을 처리할 때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일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것은 이쪽이었고, 성주는 그의 허락이 필요한 일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 게 다였다.
물론 성주가 그런 모습을 보인 게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세상만사에 관심 두는 일이 없을 것 같았던 그가 따로 살피는 일이 무엇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해졌을 뿐.
'지금은 아니지만, 언제고 적당히 구슬리면 되겠지.'
짧은 시간이었으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짐이라는 떠돌이 술사는 떠돌이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자신을 감추고, 상대를 의심하며, 그러면서도 경계하는 눈초리는 최대한 가렸다.
이렇듯 가시를 세우니 이런 자와 친분을 쌓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방법만 알면 그리 어렵지 않다.
자연스럽게 다가가면 된다. 적당히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며 적의가 없음을 꾸준히 보여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겉으로 보이는 가시는 속이 굶주렸음을 증명하는 허세다. 떠돌이가 떠돌고 싶어서 세찬 바람을 맞아왔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기에 떠돌이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자들은 약간만 경계심이 풀어져도 알아서 가시를 거두기 마련이다.
그러니,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
"왕이여! 적들이 산 아래에 포진했습니다!"
크루트니악은 들려온 말을 곱씹었다. 내용이 아니라, 가장 앞에 나온 왕이라는 호칭을.
왕이라. 한때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 울림이라고 생각했다. 만인의 위에 있다는 뜻 아닌가. 대장이나 족장 같은 호칭보다 한층 더 높이 있는 느낌. 그래서 그는 그 호칭을 좋아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랬었던 것 같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대로라면……."
목을 타고 나오는 소리지만, 그 안에 깃든 불안감을 읽을 수 있다. 적의 수가 많고, 포위되었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
[꽤 오래 싸웠군.]
"예?"
얼간이 같은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머리까지 굳어버린 것인가? 이런 하찮은 것들을 이끄는 것도 고역이라면 고역이다.
산 아래, 점점 많아지는 적들을 보며 크트루니악은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먼 옛날, 신을 삼키기 전의 자신도 저 얼간이와 같았을까? 아니,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면이 어느 정도는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저런 모습이야말로 평범한 인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감정에 휩쓸리고, 이성적이지 못한 상태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
[그랬을지도 모르지.]
무턱대고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자세하게 떠올려보고 싶지만, 그 시절의 일들은 이제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흐음.]
높은 산에서 아래를 보는 것이 어쩌면 이와 다르지 않다.
아래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작고 하잖게 보인다. 자신이 저 자그마한 점 하나로서 한 걸음 한 걸음 이곳까지 걸어 올랐음을 잊은 채, 한껏 고양되어 오만해진다.
어떤 이는 바로 얼마 전의 자신을 부정한다며 코웃음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진정 같은가? 과거와 현재가 같은가?
크트루니악은 그 질문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과거의 나약했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구분하는 것이다.
과거의 그는 인간이었고, 전사였으며, 대장이었고 족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왕, 아니, 그 이상,
[황제의 아들이라.]
제국의 황제를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를 패퇴시킨 것은 황제의 군대였으나, 그 군대를 지휘한 것은 저주스러운 줄카였으니.
그러나 황제가 대단한 존재라는 것은 안다. 어쩌면 자신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의 피를 이은 아들도 꽤 인상적인 실력을 보여주었다.
[패자는 쓰러지고 승자는 일어선다.]
간단한 이지다. 이제 오래지 않아 승자와 패자가 갈리면, 남은 일들은 그 이치대로 흘러가리라.
[나를 위해 싸워라.]
거대한 산맥에 잠들어 있던, 혹은 숨어있던 정령들이 그의 강압적인 부름에 이끌려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바람이 불고, 산이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 은밀하고도 웅혼한 울음은 머지 않아, 산 아래에서 병력을 지휘하던 바라눔 트라소프의 귀에까지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