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화
허수아비 군대.
바라눔 트라소프가 돌아간 후, 전선에 남아있는 적을 가리키는 데 그보다 적합한 표현은 없으리라. 리바스트라 쪽에는 아직 쥬드 포트락이 버티고 있다지만, 아록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같이 듣도 보도 못한 이름들뿐.
그런 이들을 상대로 거둔 자그마한, 어쩌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승리. 그런 것에 기뻐할 이유는 없다. 자콥 트라소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감축드립니다. 전하."
그렇기에, 그는 승리를 축하하는 신하들을 보며 한심함을 느꼈다. 다만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억지로 도취 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사기를 꺾을 필요도 없기에.
"대단하더군."
잠깐의 소란 아닌 소란을 파하고, 막사로 돌아온 그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카자쿠를 치하했다.
카자쿠는 오늘 전투에서 친위대를 거느리고 선봉에서 싸웠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다.
"상대가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알고 있고, 당연한 사실이지. 하지만 그걸 제하더라도, 내가 보기에 친위대의 힘은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용의 피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출가의 피라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그의 용혈을 받아들인 친위대 병사들은 신체적인 능력은 물론 정신적인 능력까지 크게 강해졌다. 그들 하나하나가 반쯤 조인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줄카가 거느린 용아에 비하면 어느 정도일지 모르나, 자콥 트라소프는 차이가 나더라도 그 차이가 그리 크지는 않으리라 짐작했다.
대단한 일이다.
혹자는 수만, 혹은 그 이상이 뒤엉켜 싸우는 전장에서 소수의 정예 병력이 뭘 할 수 있겠나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다.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중요한 장소에서 크게 힘을 쓸 수 있는 전력의 존재는 활용하기에 따라서 어쩌면 전투의 승패를 가를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예. 이 힘은… 놀랍습니다."
카자쿠의 검은 피부에 윤기가 도는 듯했다.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나이의 흔적이 엿보이던 얼굴은 용혈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20대의 가장 활력 넘쳤던 때로 돌아갔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그래. 적응은 끝났나?"
"아직입니다. 오늘 전투만 해도, 분위기에 취해 날뛰려는 놈들이 많았습니다."
"하루빨리 적응을 끝내도록 해라.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으니."
"머지않았다고 보십니까?"
"그 오래된 괴물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지만, 바라눔도 만만한 녀석이 아니다. 게다가, 황도에 웅크린 그자가 바라눔을 돕는다면 서쪽의 소란은 오래지 않아 가라앉을 것이야."
그리되면 소강상태를 맞은 이 전쟁도 다시 활활 타오르겠지. 자콥 트라소프는 뒷말을 삼켰다. 카자쿠는 그의 측근, 따라서 그 역시 드러나서는 안 되는 비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지금으로서는, 그 괴물이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기를 바랄 수밖에.'
다른 이에게 기대려는 나약함. 평소 그런 태도를 혐오해왔던 그였으나, 지금은 그저 옛 시대의 망령이 이름값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활약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언약비.'
유력한 황자로서, 그는 황제와 군주들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었다.
황제가 군주들을 옮아맨 목줄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그때는 더 깊게 알아볼 방법도, 그럴 이유도 없어 그 존재만 알아둔 상태에서 숨죽였었지만…….
'그것만 찾을 수 있다면.'
필시 황도에 웅크린 그자도, 다른 자들도 눈에 불을 켜고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끔찍한 가정이지만, 어쩌면 이미 몇 개 정도는 그자의 손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아간투스베록은 넘어갔다고 봐야겠지.'
아닐 수도 있지만, 아간투스베록과 앙숙인 줄카와 손을 잡은 이상 그와는 함께 갈 수 없게 됐다고 봐야 한다.
'한심하군.'
괴물들이 멋대로 인간을 주물럭대는 것이 끔찍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그들의 시대를 끝내고자 마음믹었다. 그런데 결국 이 꼴이라니.
'가지지 못하면 바꿀 수 없다.'
슬슬 고개를 드는 자기 혐오에 그렇게 변명하며, 자콥 트라소프는 지도로 눈을 돌렸다. 제국 전역을 그린 지도에는 앞으로 남은 여정이, 넘어야 할 산들이 그려져 있었다.
문득, 부담감이 치밀어 숨이 막힐 듯했다. 자콥 트라소프는 호흡을 조절하며 뼈근해진 목덜미를 주물렀다.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황제의 피가 몸에 흐르고 있지만, 그 피는 불완전한 반쪽짜리다. 그렇기에 황제의 자식들은 황제처럼 불로불사 할 수는 없다. 아니, 그 황제조차 죽기는 했으니 불사라는 말은 틀린 것인가.
어쨌든, 자콥 트라소프는 그의 형제들이 하루아침에 급격한 노화를 겪고 오래지 않아 명을 다했던 것을 기억했다. 못해도 수십 년은 더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높게 쳐도 30대 정도의 외모를 유지하던 이가 하루아침에 얼굴에 주름이 늘고 흰머리가 늘며 한달이 가기도 전에 노인이 되어버렸던 일은 그에게도 충격적이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피를 이은 자식들이 대부분 노화가 늦고, 긴 수명을 누리긴 했으나 모든 것이 다 그렇듯 예외도 있었다. 그리고 자콥 트라소프는 자신이 그 예외에 속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었다.
많이 왔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지난해 보이는 대업 때문일까. 소리 없이 덩치를 키운 조바심과 불안감이 시시때때로 그를 괴롭혔다.
사람으로서 죽음이 달갑지 않은 것은 당연하나, 그렇다고 두렵지도 않았다. 진정 두려운 것은 시작한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 짐을 자식에게 떠넘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걱정과 불안이 쓸모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아직 남은 시간이 충분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동부 3주의 총독들에게 전령을 보내라."
"말씀하십시오."
"석 달. 석 달 안에 각기 병력 2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예."
그동안 동부 3주에는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다.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징집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을 우려한 것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3주에는 이전의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여력이 있을까요?"
카자쿠의 의문은 타당했다.
동부 3주가 이번 전쟁에서 아예 손을 떼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도 병력을 보냈다. 심지어 판니른 총독은 직접 군을 이끌고 전선에 와 있기까지 하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2만씩을 더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여력이 없어도 짜낸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
모든 것을 건 싸움이기에 총력전이 아니던가. 자콥 트라소프는 기껏 힘들게 취한 칼을 칼집에서 썩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설령 휘두르다가 날이 상하고, 심지어 부러진다고 해도, 그게 칼의 쓰임새 아니겠는가.
"충분히 이 이상을 란다면 욕심이지."
3주의 총독들은 그의 뜻을 헤아릴 것이고, 그래야만 할 것이다. 물론 그 땅의 백성들도 마찬가지.
***
나짐은 요즘 살맛 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날이 실감하고 있었다.
연구는 성공적이다. 아직 지켜봐야 할 부분이 있으나 일단은 성공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죽었던 자가 새로운 몸을 얻어 멀쩡히 움직이고 있으니,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할렌을 볼 때마다 나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성취감을 느꼈다.
술사로서가 아닌, 인간 나짐으로서의 삶도 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군터 크렘보르는 인색한 고용주가 아니었다. 그는 능력 있는, 정확히는 능력을 보인 수하를 어찌 만족시켜야 하는지를 아는 자였다. 거의 평생을 도망자, 은둔자로 살아왔던 나짐으로서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솔롬이 별 볼 일 없는 성, 아니 작은 도시라는 점은 그 만족감을 조금도 깎아 먹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더 바랄 것 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중에 뜻밖의 손님이 그를 찾아왔다.
"면식도 없던 제가 이렇게 공을 찾아뵈어 당황하셨을 것 같습니다. 우선은 그 점에 대해 사과드리지요."
"아니.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사과는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라는 듯 손을 저은 나짐이 손님을 맞이했다. 상대의 얼굴은 낯설지만 이름만은 익숙했다. 손님이 다름 아닌 그 할렌의 아들이었기에.
"처음 뵙겠습니다. 로우렌이라고 합니다."
"아, 예. 나짐입니다."
로우렌, 할렌의 둘째 아들.
할렌이 지하실에서 온전치 못한 기억에 심심하면 인상을 찌푸리던 때, 나짐은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그의 아들들은 지겨울 정도로 자주 등장했다. 할렌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의 정체성을 자각하게끔 만들려 일부러 그런 쪽으로 대화를 유도하기도 했고.
"꾀만 많아서 불안한 녀석."
할렌의 기억 속에 남은, 그의 둘째 아들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만 들었던 이를 이렇게 직접 보니, 예상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머리만 굴리는 약삭빠른, 나쁘게 표현하자면 조금 야비한 모습 같은 것은 적어도 겉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차분한 인상이었고, 짧은 대화에서 보이는 행동이나 말투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이쪽을 존중해주는 느낌을 뚜렷하게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
"아아. 실례했습니다. 잡설이 너무 길었군요. 저는 보리스 공자를 모시고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시는지요?"
"할렌님의 두 아들이 보리스 공자님을 곁에서 모신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실은, 나짐님이 말씀하셨다시피 공자를 곁에서 모시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 편입니다. 모페이브님과 나짐님이 장군을 위해 재주를 발휘하고 계시다는 것도, 그렇게 들어 알고 있었지요."
"음."
"궁금하기도 하고, 중요한 일을 하시는 분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두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중요한 일이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모페이브님은 비록 공식적을 관직을 맡고 계시지는 않으나, 그분께서 솔롬의 중신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요. 그러니 그런 분과 함께 일을 하고 계시는 나짐님 또한 솔롬의 중신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거야말로 당치 않은 말씀이군요. 저는 그저 모페이브님의 일을 거들 뿐입니다."
"겸손하시군요."
나짐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주 짧은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치지 않은 그 순간. 로우렌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너무 부담스럽게 여기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정말 순수하게, 나짐님과 친분을 쌓기 위해 찾아 것뿐이니까요."
두 사람은 그 후로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로우렌은 결코 나짐이 부담스러워 할 만한 주제는 꺼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짐도 대화가 이어질수록, 처음과 달리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열 수 있었다.
"인사를 하러 온 처지에 빈손으로 올 수는 없어 가볍게나마 준비했습니다. 받아주시지요."
"아니. 뭐 이런 것을……."
나짐은 몇 번을 사양하다가 로우렌이 거듭 권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선물을 받아들었다. 난처하다는 표정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가볍게 들떠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러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