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9화
누군가에게 음유시인과 가객의 차이를 묻는다면 그는 고민할 것이다. 어찌면 음유시인은 말 그대로 시인이며, 가객은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라고 확신 없는 목소리로 답할지도 모른다.
사실 둘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둘 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둘은 다르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음유시인의 노래는 시다. 그들의 노래는 형식이 있으며, 때문에 계속 듣고 있으면 조금은 딱딱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그 경직된 형식은 절제미를 품으며, 그들의 가사는 대부분 고상하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음유시인들의 노래를 가리켜 귀족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반면 가객의 노래는 말 그대로 노래다. 그들의 노래는 자유로운 형식을 갖고 있으며, 그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들의 노래가 천박하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성들은 (가객의 노래를 찾아가 듣는 이들은) 그 자유로움을 즐긴다. 어떤 이들의 귀에는 천박하게 들리는 그 노랫말은 그들에게 천박함보다는 친숙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즐긴다.
"오. 나는 노래했다네. 흐릿해져 가는 그대의 뒷모습이 내 눈망울에 맺힐 때, 웃는 얼굴로 눈물흘리며 노래했다네."
흥에 젖은 목소리가 사랑을 노래한다. 실비아는 말 위에서 작은 인파에 둘러싸인 가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삐를 흔들었다. 얇은 로브로 얼굴을 반쯤 가린 그녀는 뒤따르는 호위병들과 함께 대로를 거닐었다.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호객하는 상인의 목소리, 자식에게 길을 잃지 말라 소리치는 어미의 목소리,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시비가 붙은 사내들의 거친 목소리, 혹은 방금 같은 가객의 노랫소리.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한데 묶는다면, 그것은 활기라고 표현하기에 적합할 것이다. 비록 테리브란만큼은 아니지만, 솔롬은 전보다 훨씬 시끌벅적해졌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비교해도 그랬다.
"비켜라."
그녀의 조금 앞에서 그녀의 호위 무관이 길을 막는 이들을 몰아냈다. 실비아는 그 모습에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길을 내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꼭 저렇게 죽일 듯 위협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아가씨. 지금 이 도시에는 외지인들이 많습니다. 수문병들이 검문 하지만, 그래도 어떤 수상한 자들이 들어와 있을지 몰라요. 비트리 공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녀의 살짝 뒤에서 따라오던 시비가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속삭였다. 시비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여느 평범한 시비들과는 달랐다. 무술을 상당한 수준까지 익힌 그녀는 실비아의 근접 호위를 담당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앞에서 길을 열고 있는 호위 무관 비트리의 고충을 이해했다.
사실 크렘보르의 독녀인 실비이가 이렇게 대로를 활보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달랑 열 명도 안 되는 호위와 함께 말이다. 그러니 비트리의 신경이 한껏 날카로워져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아무래도 이 마음 약한 아가씨는 비트리의 사나운 기세에 움찔하며 물러나는 백성들이 불쌍해 보인 모양이었다. 정작 진짜로 불쌍한 이는 물러나는 백성들이 아니라 사납게 눈을 치뜬 비트리일 것인데 말이다.
"아가씨. 비트리 공은 아가씨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아가씨의 안전이 최우선이죠. 그 자신의 안위보다도 말입니다."
무언가를 느꼈을까. 실비아의 찌푸린 얼굴이 풀어졌다. 비트리를 포함해서, 여러 사람이 자신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래. 알겠어."
그러나 아랫사람들의 고충을 이해했다고 해서 말머리를 돌리지는 않았다. 시끌시끌한 거리를 거닐면서 사람 구경하는 것은 사냥과 더불어 그녀의 가장 소중한 취미였다. 약간 마음에 불편함이 생긴 것은 사실이나, 그 때문에 지금 느끼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 보고 가십시오! 저 멀리 남쪽 땅에서 지금 막 올라온 귀물들입니다!"
"황도에서 어렵게 가져온…!"
온갖 인간군상을 보며, 실비아는 그들의 과거를 상상했다.
저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저들이 온 곳은 어딜까. 그곳은 어떤 곳일까. 그녀는 가보지 못한, 보지 못한 세상을 저들은 보았으리라. 실비아는 할 수만 있다면 저들의 기억을 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그녀는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상상했다.
***
시끄럽다.
사내는 자신의 귀를 막거나, 저들의 입을 막을 수 없음에 짜증스러웠다.
사실 단순히 시끄러운 것에 짜증 난 것은 아니었다. 이 시끄러운 소리가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것이 두려울 뿐.
이미 충분히 멀리 왔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그는 먼 길을 추적해온 암살자가 갑자기 칼을 찔러오지 않을지 두려웠다.
그래서 수문병들의 신경질적인 검문은 오히려 반가웠다. 그들이 자신들의 일을 더 열심히 해서, 혹시 뒤따라올지 모를 추적자들을 막아주기를 바랐다. 만약 추적자들이 따라붙었다면 검문이고 뭐고 다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
오늘로 이 자그마한 도시에 온 지 닷새째였다. 그는 이제 현실적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쳐오면서 재물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왔지만, 오랜 도망자 생활은 착실하게 그의 주머니를 갉아 먹었다. 세상을 모르는, 경제관념이 전무하다시피 한 그였기에 적지 않았던 돈은 물 새듯 그의 주머니를 빠져나갔다. 그러다가 결국 지금에 이르러, 여관비를 내는 것조차 빠듯한 상황이 됐다.
'이곳에 얼마나 머무르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돈을 마련해야 한다.'
그는 설마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는 이제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사내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성벽 외곽 확장 공사에 인부를 모집한다던데, 그곳으로 가볼까? 몸 쓰는 일을 해본 적은 없지만,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거기서 일해봐야 얼마나 벌겠는가.'
이런 고민 자체가 낯설다. 그러나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주머니 때문에,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거리를 걸으면서 이곳저곳을 보고,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지 생각했다.
"비켜라!"
너무 골몰하고 있었을까. 앞에서 다가오는 인마를 보지 못한 그는 위협 섞인 호통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들었다. 그러다가 목소리의 주인이 아직 충분히 떨어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지?'
용병처럼 가볍게 무장하고 있지만, 척 봐도 조정에 속한 무관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정규군 특유의 분위기는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내는 길을 열고 있는 사내의 뒤편을 바라봤다. 얼굴을 가리려는 듯 로브를 눌러썼지만, 체구만 보아도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역시 호위로 보이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 역시 무술을 익힌 듯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평범한 가문은 아니겠군.'
무술을 일정 수준 이상 익힌 여종을 호위로 붙인다는 것은, 어지간한 가문은 힘든 일이다. 사내는 로브로 모습을 가린 여인이 평범한 신분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필시 이 도시에서 힘깨나 쓰는 유력가의 일원이리라.
"……."
사납게 호통친 사내가 뻥 뚫린 길을 지나갔다. 말 위의 시선이 잠깐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내려보는 시선이 불쾌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고개를 뺏뻣이 들고 시건방진 놈과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처음 황도를 나올 때의 그였다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자로 보낸 긴 시간은 그에게 여러 교훈을 주었다.
상황이 변했다면 자신을 그에 맞춰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적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딪치고 긁힐 수밖에 없다.
'한탄스럽기 짝이 없군.'
머리로 이해한 바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나,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유력가 여인의 일행을 피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가느다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이여. 영원히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의 모습. 어제도 오늘도 내 눈에 선명하네."
귀 기울여 들어보니 가느다랗지는 않았다. 여러 소리에 파묻혀 작게 들렸을 뿐, 노래를 부르는 자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목정껏 크게 부르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실로 노골적인, 그래서 천박하게 들리는 가사도 가사지만, 노래 부르는 자의 목소리도 형편없었다. 어느 정도로 형편없냐면, 당장이라도 저 입을 들어 막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음?'
소음에서 멀어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려던 찰나. 사내는 '소음 생성자'의 발 앞에 자그마한 통이 놓여있는 것을, 정확히는 그 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꽤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음이 멎고, '소음 생성자'는 환히 웃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고개 숙였다. 그러자 그의 인사를 받은 이들이 자그맣고 동그란 무언가를 통에 던져 넣었다.
"……!"
그 모습이 사내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저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놀란 것은 귀머거리, 아니 듣는 귀 없는 이들이 저렇게나 많다는 사실이었다. 돈을 내다 버린다는 말은 흔히 쓰이는 표현이지만, 저거야말로 돈을 내다버리는 꼴이 아닌가.
'아니, 잠깐.'
어처구니없어 발이 멈춘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던 중, 사내는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눈을 빛냈다.
***
솔롬이 시끌시끌한 것처럼, 이곳도 시끌시끌했다.
다만, 솔롬과는 달리 이곳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막아라!"
중갑기병이 전열을 들이받았다. 방패를 벽처럼 세우고, 창을 가시처럼 뻗은 채 버티던 대열은 한순간에 와해 되고, 막으라고 소리쳤던 장교의 입에는 기다란 화살이 파고들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하지, 허수아비가 따로 없군. 모조리 쓸어 버려라!"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붉은 안광이 새어 나왔다.
"대단하군요."
교전 현장에서 제법 떨어진 언덕 위.
자콥 트라소프는 옆에서 들려오는 감탄을 한 귀로 흘려듣고, 적진을 휘젓는 수하 병력을 지켜보았다.
"그래."
아군이 압도적으로 승 가져가고 있음에도, 그에게서는 조금의 회색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허수아비를 쓰러뜨려 놓고 기뻐해서는 안 되겠지."
그의 시선이 끝을 향해 가고 있는 전장을 떠나, 저 먼 서쪽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