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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97화 (797/1,064)

797화

솔롬은 성치고는 크고, 도시치고는 작았다. 지금도 계속, 나날이 커지는 중이지만 현재의 규모만 놓고 보면 번듯한 도시라기에는 다소 부족한 점이 있었다. 게다가, 솔롬은 본래 요새로 지어진 성이었다. 이 말인즉, 거주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곳이라는 뜻이다.

"터놓고 말해서, 즐길 거리가 부족하다는 말이지."

바오룸이 투덜거렸다. 그의 얼굴은 지금껏 신나게 들이켠 술 덕에 적잖이 붉어진 상태였다.

"예를 들어, 테리브란에는 극장이 있네. 투기장도 있지. 주점이나 유곽이야 말할 것도 없어. 가본 적은 없네만, 귀부인들을 위한 사설 무도회장도 있다더군. 그런 게 장사가 될까 싶었는데, 그게 그렇게나 인기가 좋다더만?"

"하하. 뭐, 귀부인들은 자신의 품위가 씀씀이에서 나온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는 건 내가 귀족이 아니어서겠지?"

"그럴 수도 있지요."

로우렌은 자신이 왜 이 별 볼일 없는 작자와 어울려서 그의 헛소리를 들어주고 있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직은 이 작자와 어울려 줘야 한다.'

바오룸을 끌어들인 것이 자신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보리스의 밑으로 들러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유할 때만 성의를 보이다가, 끌어들인 다음에는 태도를 바꿨다는 말이 돌면 좋을 게 없다.

"그래서 말이네만, 내가 앞으로 솔롬에서 사업을 해보려고 하네."

"사업… 말입니까?"

사업이라는 말만 들었는데 벌써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자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투기장을 열어볼까 하는데."

"흐음."

"테리 브란에 있던 점잖은 투기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난폭하고 잔혹한 살육전이지. 마침 쓸만한 노예들도 꽤 있지 않은가."

일전에 잡아들인, 그리고 지금도 간간이 잡아들이고 있는 도적들을 말함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쓰임새가 있습니다만?"

"광산에서의 노역을 말함인가? 그거라면 고렘이 있지 않나."

"……."

고렘에 관한 사안은 극비지만, 이미 솔롬의 일정 지위 이상 인사들은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모페이브의 위대한 발명품이 이제 본격적으로 생산량을 늘리려 한다는 것도.

"지하 광산 쪽에 고렘을 대거 투입하자는 말들이 돌고 있는 것으로 아네. 그렇게 된다면 현재의 광산 노예들이 놀게 되지 않겠나?"

"그들을 투기장으로 돌리자는 거군요."

"내 장담하지. 좋은 장사가 될 거야."

"글쎄요. 의미 없이 피와 살만 튄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에 열광하리라 보지는 않습니다만."

"물론 그렇겠지. 그러니 싸울 놈들에게도 적절한 보상을 줄 생각이네."

"예를 들면?"

"10승을 거두면 사슬을 끊어주겠다고 한다면 어떤가?"

"음."

괜찮은 방법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 식으로 투기 노예들을 부리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노예가 가장 원하는 것은 자유니, 그것을 약속해준다면 노예들은 죽기로 싸울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그들의 싸움도 치열하고 재미있어지겠지.

"솔롬의 모든 노예는 장군의 소유입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이는 장군에게도 좋은 일이야. 백성들은 그들에게 이득을 주는 존재를 좋아하기 마련이니, 그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준다면 그들은 장군을 칭송할 걸세."

"그 말씀을 장군께 직접 전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알면서 그러는군."

"무슨 말씀이신지."

"이 말을 그대로 장군께 전해도, 소용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네. 장군은 백성의 칭송 따위에는 관심이 없으신 분이니까."

로우렌은 바오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상향 조정했다.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한량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눈치가 제법이지 않은가. 게다가 단순히 눈치에서 끝내지 않고, 적절하게 그것을 이용하는 처세술까지.

'동생의 그늘이 그의 재주마저 다 묻어버렸던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그 그늘에서 벗어난 그가 이제야 자신의 재주를 펼치기 시작한 거라 봐도 될 터.

"장군께서 귀 기울여 들으시는 건 말이 아니야. 목소리지."

말의 중점은 내용이며, 목소리의 중점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바오룸도, 로우렌도 그 자이를 알았다.

"토어릭이나, 다른 이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공자를 따르기로 한 사람 아닌가. 이 일은 분명 공자께도 도움이 될 거야. 무료함에 지친 것은 백성들만이 아니니까."

"이해했습니다."

로우렌이 싱긋 웃었다.

"그 말씀 그대로, 공자께 전해드리지요. 아니, 그보다는 공께서 직접 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제가 옆에 서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그렇다면 나야 고맙지."

바오름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

보리스는 바오름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에 로우렌이 몇 마디를 더해주니, 오래지 않아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좋군. 안 그래도 필요성을 느끼던 참이네. 이 성, 아니 이 도시는 너무 적막해. 군사 도시로 남을 것이라면 지금처럼 유지되어도 나쁠 것 없지만, 그게 아니란 말이지."

솔롬은 크렘보르 가문의 등지다. 크렘보르 가문이 커지는 만큼, 그 기반인 솔롬 역시 커져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크기만 키운다고 다가 아니지 않은가. 솔롬의 성세는 크렘보르의 성세를 의미하니, 보리스는 그의 가문을 위해서라도 솔롬을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바오룸이 가지고 온 의견은, 비록 그가 구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투기장은 시작일 뿐입니다. 백성들은 열광할 테고, 그 후에는 더욱 목말라 하겠지요."

자극은 더 큰 자극을 부르는 법. 목이 마르다 못해 갈라진 이에게 물 한 모금은 오히려 고통이다.

"그들을 만족시켜주면 만족시킬수록, 그들은 크렘보르에 충성하게 될 겁니다."

"솔직히, 그대가 이 정도의 식견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 아, 이런 말은 조금 그런가?"

바오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실제로, 이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큰 그림은 제 동생이 그렸지요."

"야스메티 공 말인가. 그가 큰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동생은 크렘보르가 솔롬을 기반으로 삼았을 때부터, 이 도시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단순히 돈을 쏟아부어 덩치를 키우는 것은 하책이라고 보았지요. 녀석은 이 도시를 크렘보르에 종속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종속이라."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그 반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은 표현이나, 보리스는 그 표현에서 묘한 울림을 느꼈다.

"도시가 제대로 자라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바닥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도시의 모든 것에 크렘보르의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것이었지요. 공자께서도 아시다시피 동생은 그 구상을 끝마치지 못했습니다만……."

"그래. 그랬지. 참 안타까운 일이오."

사실 보리스는 야스메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몇 번 얼굴을 본 것이 전부고, 그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똑똑하다. 대단하다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그가 얼마나 똑똑하고 대단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그의 형을 통해서 생전 그가 구상하던 계획을, 비록 일부일지라도 접하게 되니 야스메티가 얼마나 대단한 자였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집을 어떻게 지을지 구상하는 것은, 집을 세우기 전에만 가능한 일이지.'

야스메티는 솔롬이라는 도시 전체를 구상했다. 비록 끝을 맺지는 못했지만, 한 사람이 그토록 멀고 거대한 미래를 내다봤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크렘보르의 솔롬.'

말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 야스메티는 크렘보르가 솔롬에 내려앉는 게 아니라,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그 뿌리가 너무 깊게 파고들어, 크렘보르가 존재치 않으면 솔름도 존재할 수 없도록.

"부끄럽습니다. 저는 단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던 중, 동생이 했던 짤막한 이야기를 떠올렸을 뿐입니다. 괜한 말로 공자의 심기를 복잡하게 한 것은 아닌지……."

"아니. 아니오. 정말 좋은 이야기였소. 그대의 이야기는…내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군."

너무 눈앞의 일에만 매달렸던 것일까. 본인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바오룸의 이야기는 보리스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투기장 건은 내가 직접 아뢰겠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될 좋을 것 같아."

"감사합니다."

보리스는 생각을 정리한 후 군터를 찾아갔다. 부친을 마주한 그는 조심스럽게 부친의 기색을 살폈는데, 다행히도 부친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가 아는 한,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그 감정이 긍정적인 것도.

"…하여, 향후 우리 가문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는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보리스는 바오룸에게 들은 것에다 본인의 생각을 얹었다. 시작은 투기장의 개설, 그리고 광산 노예들을 투기장으로 돌리는 것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시작도 물론 중요하지만, 보리스는 그보다는 앞으로의 계획이 더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리 해라."

허락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쉽게 떨어졌다. 약간의 얼떨떨함에 사로잡힌 보리스에게, 군터가 나직이 말했다.

"더 이야기할 것이 없다면 이만 물러가거라."

"아, 예."

몸을 돌려 부친의 집무실을 빠져나오기 전. 보리스는 한 낯선 자가 부진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틈 없는 전신 갑옷, 심지어 투구로 얼굴까지 가린 자였다. 실내에서 이렇게 중무장을 한 것도 특이하지만, 그보다는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더 눈길을 끌었다.

묘하게 차갑고 거친 분위기, 보리스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특이한 분위기였다.

'저런 자가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좀 더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물러나던 중이라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기도 마땅찮았다. 보리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자의 뒷모습만을 한 번 더 눈에 담은 뒤, 문을 닫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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