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796화 (796/1,064)

796화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영광?"

그라모트가 피 묻은 검을 털며 되물었다. 그의 발 앞에는 루안 해들리르가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솔롬 장병들의 위명은 판니른에서 전체에서 유명하니까 말입니다. 한 번쯤은 그 솜씨를 견식 해보고 싶었지요."

그라모트는 자신을 낮추며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이 불쾌할 수 있음에도 사내는 얼굴에서 잔잔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실없는 웃음에 자칫 상대를 가볍게 여길 수도 있었으나, 그라모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런 부류가 가장 위험한 자들임을 잘 알았다.

중요한 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라 그 속에 갖춘 실력이며, 마음이다. 이미 이 사내의 깔끔한 일 처리를 보았으니, 그를 경시할 이유가 없다.

"나 역시, 몰던의 솜씨에 감탄했소."

"실망을 드리지 않았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다음에도 함께 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글쎄. 어쨌거나 고생하셨소. 난 이만 돌아가야겠군. 이곳의 남은 일은 그대들에게 맡기리다."

"예."

그라모트는 끝까지 사내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그것이 불쾌할 만도 하련만, 사내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때까지 웃는 낯을 유지했다. 그것이 가면이든, 진실한 얼굴이든 간에 그 속내가 평범한 자는 아님이 분명했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돌아가면 반드시 보고해야겠군.'

몰던이 지금은 동맹이라고 하지만, 그 관계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른다. 이건 그만의 생각이 아니라 동생 로우렌도, 보리스 공자도 똑같이 했던 말이었다. 영원한 동맹이란 없다. 상황에 따라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적이 될 수도,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믿을 것은 오직 자신의 힘뿐.

오늘의 평안에 물들지 않고, 내일의 환란을 대비해야 한다. 그러한 대비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으니 그라모트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 특히 몰던의 심상찮은 솜씨에 대해 상세히 보고할 생각이었다.

***

해들리르가 무너졌다. 대외적으로 그들의 몰락은 가주 자리를 놓고 다투던 형제가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한 탓이라고 알려졌다. 서로가 서로의 목을 노렸고, 결국 원하는 바를 그들은 자신의 목이 상대의 목과 함께 떨어지리라는 것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권력을 탐한 형제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또한 해들리르라는 명문 귀족 가문의 최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로, 그 내막은 전혀 달랐다. 생각 있는 자들은 그 내막을 짐작하거나, 어느 정도 파악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 일이 몰던의 손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여겼다. 또 이는 자들은, 크렘보르가 관여했다는 사실까지도 짐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처음 약속했던 대로, 하잘에서는 이 일을 그대로 묻을 겁니다."

토어릭이 군터에게 보고했다.

"운바소르 아실은 그가 약속했던 대로 움직일 것이고, 약속받은 보상을 요구할 겁니다."

"차기 총독 자리 말인가?"

"예."

운바소르 아실.

현 총독이 서부 전선으로 나가 있는 사이, 그의 대리를 맡은 자다. 현 총독 로드니 캄브라이의 심복이자, 총독부의 이인자.

그는 똑똑한 자였으며, 동시에 야심가였다. 이제껏 그러한 면모를 대놓고 보여준 적은 없었으나, 그가 판니른에서 지낸 시간이 꽤 되는 만큼 이제 유력자들은 총독부의 이인자가 어떤 자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그렇기에, 총독이 부재중인 와중에도 대리인 그와 접촉하여 일을 꾸몄던 것이고.

"우리가 크게 해줄 것은 없습니다. 후에 현 총독이 테리브란으로 복귀할 때, 판니른에 남은 그가 총독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게끔 가볍게 지지해주는 정도면 될 것입니다."

해들리르가 무너질 때 도시의 관병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 그건 사전에 운바소르 아실이 조치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그의 묵인, 혹은 협력이 있었기에 해들리르를 무너프리는 것이 보다 수월했다.

"그 정도로 되겠나?"

가정에 가정이다. 로드니 캄브라이가 테리브란으로 복귀할 거라는 것도 가정. 그 이후에 운바소르 아실이 판니른 총독 후보에 오른다는 것도 가정, 운바소르 아실은 그런 불투명한 약속에 협력을 약속한 것이다.

"그를 끌어들인 것은 몰던입니다. 따로 대가를 줘야 한다면, 그건 그쪽에서 알아서 하겠지요."

맞는 말이다. 이번 일을 주도한 것은 몰던이다. 크렘보르는 거기에 살짝 발을 담근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 것치고는 가져가는 게 상당하긴 하지만, 몰던이 가져가는 것에 비하면 그리 많지도 않다.

"이번 일로 인한 소득이 상당합니다. 대놓고 자랑하기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지만, 할렌이 기뻐하겠군요."

이번 일에는 그라모트가 나섰다.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 모든 우려를 씻어내듯 그라모트는 모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로 인해 그라모트는 역시 할렌의 장남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가 따르는 보리스 역시 어느 정도 이름에 금칠을 할 수 있었다.

"상을 줘야겠군."

그라모트가 세운 공보다, 할렌이라는 이름에 군터의 마음이 미동했다. 그러나 토이릭은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할 것입니다. 그 두 녀석은, 특히 그라모트는 아비의 이름을 잇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지요. 장군께서 친히 녀석을 치하하신다면, 녀석도 그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겁니다."

"미를 필요 있겠나. 내일 바로 하도록 하지."

"예."

다음날,

군터는 수하들이 모두 모인 앞에서 그의 앞에 무릎 품은 그라모트를 내려보았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그 당당한 모습에서 과거의 할렌이 겹쳐 보였다.

"공에는 상이 따른다. 당연한 일이지."

담담한 목소리가 좌중을 자연스럽게 내리눌렀다. 군터에게서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부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변화였다.

"할렌의 아들. 그건 네 이름이 아니다. 네 이름은 그라모트지. 너는 그것을 모두에게 증명했다. 그러니 나도 더는 너를 할렌의 아들이라 부르지 않겠다."

군터가 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호위 무관이 조용히 다가와 공손히 검 한 자루를 전했다. 비록 검집에 담겨 있었으나,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검이었다.

"이번에는 훌륭했다. 하지만 그게 네 이야기의 전부이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군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라모트에게 다가갔다. 조용한 발걸음 소리에, 그라모트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앞으로를 기대하마."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고개를 든 그라모트가 두 손으로 검을 받았다. 그는 군터와 눈을 마주쳤다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

간단한 일을 마친 후, 군터는 지하로 향했다.

"어떤가."

"괜찮습니다. 느리기는 하지만, 나날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자각은 끝났습니다. 기억은 아직 온전하지 못한 부분이 조금 있지만, 그것도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짐이 자신 있게 답했다. 그러자 군터는 그를 지나쳐 할렌에게 다가갔다. 그 뒷모습을 슬쩍 본 나짐은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언젠가부터, 군터는 할렌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짐은 거기에 자신이 낄 자리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떠냐."

"혼란스럽습니다. 어느 정도 적응은 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이 몸뚱이는 낯설군요."

할렌이 피식 웃으며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 실제로도 그의 몸에 피는 흐르지 않았다. 살이 있고 피가 있지만, 그것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이 잔잔하게 흐르는 개천이고 강이라면, 지금 그의 몸은 꽉 막힌 호수였다.

물이 있지만, 그 물은 결코 흐르지 않는다.

"오늘, 네 아들에게 상을 주었다."

"그라모트 말씀입니까?"

씁쓸함만이 감돌던 할렌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반가움도 아니고, 그리움도 아닌, 뭐라 표현하기 힘든 미묘함.

"이상한 기분이군요. 아들 녀석의 일을 들었는데도 마음이 크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전의 저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이해한다."

할렌이 군터와 눈을 마주쳤다. 빚이 돌지 않는, 죽은 자의 눈이 군터는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희미해지지. 마치 기억처럼. 조금씩 희미해지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릴 거다."

"경험해보셨습니까?"

"끝까지는 아니다. 다만,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괴로우시겠군요."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이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최대한 늦추려고 노력 중이지."

"어째서입니까?"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책임이요?"

"그래."

다소 두서없는 말이었으나, 할렌은 군터의 말을 이해했다.

"보리스 공자가 꽤 의욕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

"장군께서 말씀하시는 그 책임이라는 건, 어디까지입니까?"

"글쎄.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군."

"느낌입니까?"

"그래."

할렌이 다시 한번 웃었다.

"부모의 품은 새장과 같다지요. 한 번 새장 밖으로 나간 새는 돌아오지 않는답니다. 제 날개로 세상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된 새들이 더는 새장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그럴듯하군."

"하지만 때때로, 세상의 풍파가 거세어 새장의 아늑함을 그리워하는 녀석들도 있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애달파한다던가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건 그 녀석들의 몫이지. 책임이고 할 수도 있겠군."

"옳은 말씀입니다."

할렌은 후련해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상하군요.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풀려버리니 말입니다. 모페이브님이나 나짐은 제 영혼이 장군께 속해 있기 때문일 거라더군요."

"그럴지도."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그 끈은 군터와 할렌을 연결하고 있었다. 다른 이는 그 존재를 전혀 감지할 수 없었지만, 당사자인 군터와 할렌은 그 끈의 존재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더군."

"예, 제게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기억을 다 찾고 나면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냐?"

"장군을 따라야 하니, 앞으로 나서긴 해야겠지요. 하지만 할렌으로서는 아닙니다. 할렌 이미 죽었으니까요."

"넌 할렌이다. 껍데기는 중요하지 않아."

"자신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빈 새장은 빈 채로 놓아두고 싶을 뿐입니다."

군터는 한동안 할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