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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95화 (795/1,064)

795화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퀄릭 해들리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구분 없이 들려오는 비명이 그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약속대로 성문 한쪽을 열어두었다. 약속된 시각에 그 문으로 일단의 병력이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해들리르의 저택을 덮친 순간. 칼을 때 들고 피아 구분 없이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이놈들이 설마…!'

처음에는 기만술이었던 것인가 생각했다. 저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고, 힘을 보태주겠다고 했던 것도 모두 속임수였던 것은 아닐까.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동생놈과 먼저 교감한 뒤, 자신을 끝장내기 위해 기만한 것은 아닐까 하고,

하지만 저들의 칼날이 향하는 방향은 중구난방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도, 동생 놈을 따르는 이들도 공평하게 모두 쓰러져갔다. 가문의 병사들이 나섰지만 잠시 발목을 잡는 게 고작이었다.

공들여 양성한 가문의 사병이 허무하게 쓰러져갈 때마다, 퀄릭 해들리르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어찌 된 일이냐! 수비병들은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게야!"

일이 틀어졌다고 느낀 순간, 그는 급히 관청에 도움을 청했다. 비단 해들리르 가문에서 터진 문제가 아니더라도, 도시 내에서 난리가 났으니 도시의 병력이 개입할 이유는 충분하다. 비록 솔롬의 병사들이 강군이라고는 하지만 수가 그리 많지 않으니, 관군과 함께 맞선다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전령을 보낸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만약 일이 잘 안 풀렸다고 해도, 보낸 전령은 돌아와야 할 텐데도!

"퀼릭!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설마 네놈의 짓이냐?!"

이제는 형이라는 형식적인 호칭마저 생략한 루안 해들리르가 다급히 달려왔다.

퀄릭 해들리르는 동생의 곁에 있는 중무장한 무관들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그 목을 쳐버렸을 것인데,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이 와중에도 아쉬웠다.

"여기까지 달려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따위 헛소리냐?"

속으로 찔끔했지만, 일단 여기서는 부정하고 봐야 했다. 저놈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여기서는 자신을 추궁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일단 저놈들부터 몰아낸 뒤에 이야기합시다. 내 하고픈 말이 아주 많소."

속으로 시퍼런 칼을 갈면서도, 형제는 일단 손을 잡았다.

"시장에게 사람은 보냈소?"

"한참 전에. 그런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너도 마찬가지겠지?"

"…맞소."

상황이 좋지 않다.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적은 이미 포위를 굳혔다. 저걸 뚫고 나가려다가는 자칫 목이 날아가기 쉬워 보였다.

사실 남은 사병을 긁어모아 탈출을 강행한다면 어찌어찌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형제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미 짜인 포위를 위험하게 뚫고 나가는 것보다, 저택에서 농성하면서 관군의 지원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아 보였다.

"가자."

그들은 저택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일단은 관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로 했지만, 혹시 모르는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 저택을 포위한 놈들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놈들이 둘로 나뉘어서 한쪽은 관군을 막아서고 있다면,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

"놈들이 미친 게 아닌 이상 관군을 상대로 그러기야 하겠소?"

"도시 내에서 우리 가문을 향해 칼을 뽑아 든 놈들이 미친놈들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이냐. 이미 한번 미친 짓을 저지른 놈들이 두 번이라고 못할 것 같으냐?"

"……."

그 미친놈들을 끌어들인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었으나, 퀼릭 해들리르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뻔뻔하게 나갔다. 그는 마치 이 일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이까지 갈아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루안 해들리르는 혹시 자기가 잘못 짚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까지 했다.

'일단 연기는 아닌 것 같군.'

가정했던 최악의 상황은 퀼릭 해들리르가 적과 내응하여 자신을 치는 것이었는데, 지금의 모습을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루안 해들리르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다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겠군. 그렇지 않소?"

"그래."

역사 깊은 가문의 저택은 단순한 집이 아니다. 하나의 요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택의 구조부터 시작해서, 내부 시설들까지 다 특정한 목적을 갖고 설계된 것들이다.

역사가 깊다는 것은 그만큼 사연이 많다는 것. 또한 성세를 누리는 가문은 그 성세를 위해 숱한 상대와 싸워왔기 마련이다. 그 수많은 적이 언제 덤벼들지 모르는 만큼, 가문의 저택은 그 가문을 지키는 요새, 그 자체였다.

그런 요새에는 외적과 맞서기 위한 갖가지 장치들은 물론,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방도까지 마련되어 있기 마련.

저택 밖, 시가지로 통하는 비밀통로도 그중 하나다.

"선조들의 안배가, 우리 대에 이르러 쓰이게 되는구려."

퀼릭 해들리르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네놈 때문에, 라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지금 그런 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적어도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성질을 죽이는 편이 좋다.

끼긱-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아버님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가문을 부흥시키셨던 선조들께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이 모든 일이 다 형님에게서 비롯된 것을 아직도 모르겠소?"

"내가 여태 살면서 들은 헛소리 중에서도 최고의 헛소리구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열리는 통로 앞에서, 형제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래. 인정하지. 몰던이 내 등을 떠밀었소. 하지만 날 막다른 곳에 몰아넣은 건 형님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내게 죽음 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내가 몰던의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들었을 것 같소?"

"치졸한 변명이군, 어쨌거나 반갑구나, 이제야 너 스스로 네가 가문의 역도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니까. 별 의미는 없다만, 그래도 속은 좀 시원하군."

퀄릭 해들리르가 루안 해들리르의 뒤편에 서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까지 듣고도 여전히 이놈의 뒤편에 서 있는가? 네놈들 역시 해들리르의 역도임을 인정하는 것인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말다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루안 공자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다는 말 정도는 해두고 싶군요. 저희에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몰아넣은 것은 퀄릭공자, 당신이었지요."

"꼭 비슷한 것들끼리 어울리는군. 흥! 뭐, 새삼 놀랄 일도 아니지."

혀를 찬 퀼릭 해들리르가 고개를 돌리던 순간이었다.

반쯤 열린, 어두검검한 통로에서 가느다란 무언가가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푸욱-!

"허억!"

그것은 검이었다. 일반적인 검보다 검신이 눈에 띄게 얇은,

"미안하오. 형님. 하지만 말했듯, 나를 이렇게 몰아붙인 사람이 형님 자신이라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소."

휘청거리며 무너지는 퀼릭 해들리르의 귀에, 루안 해들리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바깥의 상황은 어떤가?"

"소란스럽지요. 솔롬의 무뢰배들이 미친 것처럼 설쳐대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묻겠네만……."

"저희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퀼릭 해들리르가 놈들을 끌어들인 게 확실합니다."

루안 해들리르는 대놓고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사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피 묻은 검을 털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시죠. 아시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제 수하들이 밖에서 은밀히 대기하고 있으나,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발각되지 않더라도, 놈들이 공자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더욱 난리를 칠 테니……."

"알고 있다."

사내는 몰던에서 온 자였다. 이름도 모른다. 통성명이 필요한 사이는 아니었으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루안 해들리르는 검에 묻은 형의 피를 털어내고,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꺼림직한 자이지만, 어쨌거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지켜줄 강력한 조력자이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 따위는 잠시 문이둬야 할 때다.

'형님이 조금만 너그러웠다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거요.'

식어가는 형제의 몸뚱이를 넘으며, 루안 해들리르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은 해들리르의 가주가 되어 가문을 이끌어야 한다. 비록 몰던에서 여러 가지, 상당한 요구를 해오겠지만 일단은 급혀야 하겠지. 하지만,

'언제까지고 너희의 장난감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비밀통로는 음습했다. 선대로부터 전해져온 바에 따르면 이 통로는 지하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횃불에 의존해 걸음을 옮기는 내내 숨을 쉬는 것이 고역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불쾌함이 이 은밀한 통로가 얼마나 오랫동안 감춰져 왔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이 통로도 이제 못 쓰겠군.'

비밀통로는 비밀스러울 때 가치가 있는 법. 이곳에 외인의 발걸음을 허락해버렸으니, 이 통로의 가치는 이제 다했다. 여기서 말하는 외인이란 앞서가는 사내와 사내의 수하들만을 뜻하지 않았다. 뒤따라오는 자들 역시 포함이었다. 해들리르에게 있어 외인이란,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의 총칭이었으므로, 얼마나 걸었을까. 두 번째 경사(아래로 내려갈 때 한 번, 올라갈 때 한 번)가 꽤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앞서가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다 왔습니다.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시지요."

"나는 괜찮다."

숨이 조금 거칠어지기는 했지만, 루안 해들리르는 상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최대한 태연한 척 답했다.

"해들리르의 선대는 참으로 주도면밀한 분들이셨던 것 같습니다. 가문의 역사가 도시의 역사와 맞먹는다더니,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저택 지하에 이런 것을 만들어놓다니."

"몰던의 일원이면서 해들리르를 추켜세우는가?"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그리고…이제는 한 마차를 탄 동지가 아니겠습니까. 구원은 묻어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지요."

"흥."

루안 해들리르는 어느 순간, 귀밑을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사내의 말처럼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도착했습니다."

도착을 알리는 사내의 목소리 뒤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규직적인 몇 번의 소리가 멎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시원한 바람과 상쾌한 공기가 물밀 듯 몰려왔다.

사내가 먼저 나가고, 그의 수하들이 뒤따랐다. 루안 해들리르는 조금 천천히, 상쾌함을 만끽하며 걸음을 옮겼다.

"수고했소."

"별말씀을."

그러나 입구에 이르러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의 빛을 느끼기도 전에, 그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기껏해야 사내의 수하 몇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니, 수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그럼, 그라모트 공."

"음."

그라모트라 불린 건장한 사내가 검을 빼 들었다.

루안 해들리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늘게 떨리는 눈과 입술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의 시선을 받은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뿐입니다.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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