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4화
명분, 소롬의 병력이 해들리르의 일에 끼어들 수 있는 명분,
"역시, 그 방법뿐인가."
퀄릭 해들리르는 수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으나, 떠오르는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역시…무리가 아닐까요?"
퀄릭 해들리르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은 수하를 사납게 쳐다보았다.
"무리?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을 하나?"
찔끔한 수가 입을 다물자, 그는 한층 더 거칠게 언성을 높였다.
"우리는 뒤가 없다. 몰던의 마수가 우리 가문 전제에 드리우면, 나는 물론이고 여기 있는 모두가 끝장이야. 왜 크렘보르의 손을 잡았을까? 자네들도 알고 있지 않나. 무리라고? 할 수만 있다면 더한 것이라도 해서 몰던과, 저 가증스러운 놈의 목을 치고 싶은 심정이다."
목소리가 커지기는 했으나, 그가 마냥 감정적으로만 몰아붙인 것은 아니었다.
"명분이 부족하긴 해. 그래. 믿지 않겠지. 하지만 그럼 뭐 어떤가? 어차피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누가 명분에 대해 논하겠나? 명분이라는 건 요식행위일 뿐이야. 중요한 것은 힘이지. 내가 해들리르의 주인이 되고, 크렘보르가 그 뒤를 받쳐준다면 몰던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터."
그래. 그러면 끝이다.
"허면, 준비가 필요하겠군요."
"준비가 완벽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둘러대기 위한 명분일 뿐이니. 말했듯, 일을 마치고 나면 누구도 증거 따위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야."
이를 악다문 퀄릭 해들리르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
"퀼릭 해들리르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군요."
"그만큼 달아있었다는 거겠지."
그라모트가 사자로 다녀온 뒤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비밀스러운 동맹을 맺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은, 구상 자체는 그보다 먼저 시작했다는 것, 즉, 퀄릭 해들리르는 이쪽의 저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한 번쯤은 의심해볼 법도 한데."
"그럴 상황이 아니지요. 불길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뒤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뒷걸음질을 치겠습니까."
"뭐, 우리로서는 잘된 일이로군."
보리스는 로우렌이 자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그러느냐."
"아니, 공자께서 귀족이시라는 것을 새삼 깨달아서 말이지요."
보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칭찬이더냐?"
"당연하지요. 사람이 자리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는 것은 아무래도 바람직한 일 아니겠습니까."
"칭찬이라지만 별로 달갑게 들리지 않는군."
로우렌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이가 면전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정색을 하든 호통을 치는 했겠으나 로우렌이었기에, 보리스는 혀만 차고 넘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동무라는 것은, 간혹 이렇게 곤란할 때가 있다.
"그럼 이제 시작하면 되는 거군. 판은 저쪽에서 다 깔아줬으니."
루안 해들리르와 그를 따르는 무리가 아바시스와 내통했다.
다름 아닌, 같은 아비를 둔 혈족인 퀄릭 해들리르가 마련한 명분이다.
"즉시 움직이면 되겠습니다."
증거 따위는 필요 없다. 그런 것은 퀄릭 해들리르가 알아서 마련해야 하는 문제니까. 그럴듯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든, 아니면 적당히 뭉개고 지나가든, 이쪽에서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나서고 싶다만, 역시 안 되겠지?"
"또 왜 그러십니까. 공자께서 직접 나서시는 건 과합니다."
아바시스와의 내통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특히 크렘보르가 예민하게 반응할 주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리스는 크렘보르의 독자가 아닌가. 예민하게 대응할 문제이기는 하나 가문의 후계자가 무장하고 나설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실수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바로 그것이, 보리스가 아닌 그라모트가 나서야 하는 이유였다.
"잘 해낼 거라 믿소."
로우렌이 여느 때와 달리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라모트에게 이 일을 맡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했다. 할렌의 어린 아들이 아드리안이나, 다른 쟁쟁한 인사들을 제치고 활약할 기회를 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를 위해 노력한 보리스와 동생의 노고를 알기에, 그라모트는 어느 때보다도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염려 마라."
예상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이미 허락을 받은 상황이었다. 그라모트는 즉시 병사 이천 오백을 이끌고 솔롬의 서문을 나섰다. 갑작스러운 출병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에 이루어졌기에 큰 소란은 없었다. 오직 동원된 병사들만이 조금 당황했으나, 그뿐이었다. 한 귀족 가문에서 아바시스와 내통한 정황이 포착되었다는 짤막한 설명만으로 충분했다. 정예는 달리 정예가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에 정예인 것이다.
'사납고 과격하며, 오만하게.'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그라모트는 동생의 조언을 되새겼다.
***
퀄릭 해들리르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라도 표정 하나, 몸짓 하나에서라도 평소와 다른 모습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아마 지금쯤이면 소롬에서 출발한 병력이 부지런히 달려오고 있을 터. 그렇다면 그들이 최대한 서둘러서 온다는 가정하에 사흘에서 나흘이다.
"그놈이 소식을 접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늦출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늦춰야 한다."
그를 위해, 퀄릭 해들리르는 가문 회의에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동생의 심기를 건드렸다.
"지정 상단 건에 대해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은, 조금 독하게 말하자면 눈만 마주쳐도 칼을 뽑아 들고 싶은 상대지만 가문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들 형제가 불편하더라도 하루에 한 번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서로를 따르는 수하들을 호위처럼 거느리고, 두 패로 나뉘어 마주
보는 모습은 언젠가부터 해들리르 가문에서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우리 가문과 거래한 지 어언 5년이다. 사람은 익숙함에 젖으면 꾀를 부리기 마련이지. 근자에 들어 그들이 납품하는 물건의 질이 영 시원찮다는 발이 자주 들리더군."
"그런 말이 돌았소?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래? 그놈들이 푼돈을 아끼려고 엄한 데 돈을 쓰고 있다더니. 그게 네놈 이야기였나 보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정말이지 하잖기 짝이 없는 음해로군."
루안 해들리르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이럴수록 자신의 격만 떨어진다는 걸 모르나?'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내심 기뻤다. 이런 실책을 저지른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몰려있다는 방증이었으므로,
'한계까지 몰렸거나, 인내심이 바닥이 났거나, 뭐가 됐든 이제 곧이군.'
긴 싸움이었지만 이제 끝이 보이는 듯했다. 막다른 곳에 몰려 몰던이 내민 손을 잡을 당시에는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굴욕적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이렇게 가주 자리가 코앞까지 다가오지 않았나.
"형님. 형님이 나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가문을 위해서라도 조금은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떻겠소? 내 부탁하리다."
퀄릭 해들리르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그의 기색을 살피던 루안 해들리르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후로는 정말이지 쓸모없는 시간이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 트집을 위한 트집. 그 말이 딱 어울렸다.
퀄릭 해들리르는 모든 안건에 대해 의심을 내비쳤고,
처음에는 퉁명스럽게 받아넘기던 루안 해들리르도 나중에 가서는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간 그들 형제가 서로 죽일 듯 다투면서도 가문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든 해왔는데,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자는 거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모르시오?"
"네놈의 음험함을 더는 묵과할 수 없을 뿐이다! 이미 가문을 반쯤 몰던에 팔아넘긴 놈이 나머지 반도 팔아먹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
"내 입에서 뭐가 튀어나오든, 네놈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과 기만 섞인 구정물보다는 나을 것이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나도 어쩔 수 없소."
퀄릭 해들리르가 기어이 그의 약점을 찌르자, 루안 해들리르는 역정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아니 그 순간 부로 해들리르 가문의 행정은 반쯤 마비됐다. 윗선의 재가가 필요한 업무는 거의 다 멈췄다고 봐도 좋았다.
다 찢어져 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붙어있던 한 덩어리가 마침내 반으로 찢어졌다. 반씩 나뉜 덩어리는 각기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서로를 견제하는 대만 열중했다.
그렇기에, 해가 떨어진 이후에만 행군한 솔롬의 병력을 발견하는 것이 많이 늦고 말았다. 해들리르에서, 정확히는 루안 해들리르가 솔롬의 병력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들이 하루 거리에 당도한 뒤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루안 해들리르 진영은 혼란에 휩싸였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소식을 접한 직후 다시 그들이 종적을 놓쳐버렸지만, 여러 정황상 이천이 넘는 솔롬의 병력은 그들 가문으로 오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저런 대규모 병력이 움직였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게 생각하기 힘들었다.
"설마…!"
솔롬의 병력이 뜬금없이 움직일 이유에 대해 고심해 보았을 때, 나오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놈이 크렘보르를 끌어들였구나!"
루안 해들리르가 탁자를 부술 듯 내리쳤다.
***
"성벽이 보이는군요."
그라모트는 부관의 말이 들리기도 전부터 도시의 성곽을 눈에 담고 있었다.
"저곳이 마라시카인가."
해들리르는 크렘보르처럼 한 성을 통째로 다스리는 가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저 마라시카라는 도시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가문이었다. 교역 도시이자 관문 도시인 마라시카는 판니른과 오젠, 헤루스를 잇는 교역의 창구였다. 해들리르는 그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해 부를 일궈왔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로군.'
짤막한 상념. 오랜 세월 성세를 유지해온 가문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이라 그런지 조금 감상에 젖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문이 열려 있습니다."
"약속을 지켰군."
낯선 군대가 접근해오면 문을 걸어 잠그고 상황을 살펴야 하건만, 마라시카의 성문 한쪽은 활짝 열려 있었다. 어서 오라고 환영이라도 하듯이.
"퀄릭이든 루안이든 가릴 필요 없다. 오늘 우리는 해들리르를 무너뜨린다."
물론 마라시카에도 도시를 지키는 병력은 있다. 수만 놓고 보면 그라모트가 이끄는 병력은 그들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 밤, 그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자, 가자."
그라모트가 검을 빼 들었다. 전장에서 여러 번 살을 베고 피를 적시며 무뎌진 날을 직접 공들여 갈았다.
그래서인지 칼날은 예전처럼 날카로웠지만, 그 예기 속에는 예전에 없던 피 냄새가 감돌았다.
오늘이 지나면, 아마도 그 피 냄새는 조금 더 진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