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793화 (793/1,064)

793화

"보리스 공자는 꽤나 자신만만해 보이더군요."

토어릭은 말을 하며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대화하면서 상대의 기색을 살피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솔롬에서는 오직 두 명의 눈치만 살폈는데, 한 명은 당연히 군터였고 다른 한 명은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살라스였다.

솔롬의 이인자라는 직함 때문만은 아니다. 토어릭은 그런 것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어려워하는 것은 지위가 아니라 살라스라는 사람 그 자체다.

"그랬지."

본래 냉정 침착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예측할 수 없는 사나움까지 더해졌다.

그게 문제다. 예측할 수 없다는 것. 살라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군터와 비슷해졌다.

"그래서, 그게 눈에 걸리던가?"

"아니요. 그렇지는."

토어릭은 오늘 낮에 있었던 회의를 떠올렸다. 보리스는 그가 예고했던 것처럼 몰던과 손을 잡고 해들리르를 집어삼킬 것을 주장했는데, 그 모습이 보는 이에 따라 다소 급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토어릭은 그것이 철저하게 의도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경험 부족한 젊은이의 자신감은 때때로 독이 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려일 뿐이지요. 반면, 패기 없는 젊은이는 누구의 지지도 얻지 못합니다."

현재 보리스의 지지기반은 서부 전선에서 함께 했던 젊은 군관들이다. 그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전장에 가지 않고 솔롬에 남았던 이들도 감화되어 가고 있고, 나이에 맞게 혈기 넘치는 그들은 신중함보다는 과감함을 선호한다. 필시 보리스는 그들의 지지를 더 단단하 굳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덤으로,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공자를 지지하기로 했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일단은 긍정적으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신하 된 자가 주인 될 자를 재단하는군."

"지금 제 주인은 아니니까요. 살라스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본래 군터 장군에게 충성했지.

크렘보르에 충성한 게 아니니까요."

"말솜씨는 여전하군. 아니, 더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해."

살라스는 피식 웃었다. 부인하지 않고 웃은 것만으로 그는 토어릭의 물음에 답한 셈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여쭤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살라스님께서는 어찌하실 요량입니까?"

"……."

살라스가 슬쩍 몸을 뒤로 젖혔다. 입가에 걸린 웃음은 어느새 희미해졌다.

토어릭은 그런 살라스의 기색을 살피며 조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보리스 공자를 지지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보리스 공자를 지지하는 것이 장군께 충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보리스 공자는 장군의 독자시며, 장군께서 인정한 후계자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네는 어찌하여 공자를 시험하고 있나?"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아서 그렇습니다."

토어릭은 처음으로 자신의 속을 털어놓았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것 같으면서도 묘한 사나움을 동반한 살라스의 눈앞에서, 아무리 그럴싸한 말을 꾸며낸다 한들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직감이었다. 또한, 살라스에 대한 나름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짧지 않은 세월, 함께 한 주인을 섬겨온 동지가 아닌가.

진심이 통한 것일까. 살라스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는 가죽 장갑을 낀 손을 작게 쥐었다 피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나 또한 비슷하네."

"그렇다면 살라스님께서는……."

"아니. 정정하지. 비슷하면서도 달라. 자네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그렇고…… 어째 장군의 이후를 벌써 대비하고들 있나?"

"예?"

"그래. 장군의 연세가 이제 적은 편은 아니지. 보리스 공자가 장성하여 활약하는 만큼, 장군의 시간이 끝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토어릭은 그제야 살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살라스님은, 후계자라는 존재 자체가 거슬리시는 겁니까?"

"비슷하지만 다르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장군의 시간이 끝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라는 거야. 자네도 오늘 장군을 보지 않았나. 그분께서 기력이 쇠하신 것 같던가? 그 나이대의 평범한 무부처럼 보였느냔 말일세."

"하지만, 장군께서도 연세가."

"장군께 평범한 인간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되네.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아니면 혹시 잊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장군께서는 죽음에서 일어나신 분이야."

"……."

토어릭이 입을 다물자 살라스는 장갑을 벗었다. 그러자 연한 회색 피부가 드러났다. 보는 순간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살라스의 얼굴색과는 전혀 다른 색의 손이.

"보이나? 이 새로운 팔을 얻은 후, 나는 달라졌네. 자네들의 시선이 아니더라도 진즉부터 느낄 수 있었지. 다만 확신하지 못했을 뿐."

살라스가 옅은 회색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세월이 흘렀고, 나는 나이를 먹었네.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러나 나는 내가 노쇠했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스무 살이었을 때보다 더 기운이 넘쳐. 믿기나? 아니겠지. 하지만 믿어야 하네. 사실이니까."

평소의 살라스를 알기에, 나이 먹어 가는 사내의 허언 같은 이 말이 우습게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살라스의 말이 전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살라스의 얼굴에서 그 흔한 주름 하나 찾기도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자잘한 흉터 때문에 쉽게 눈치채기는 힘들지만, 살라스를 자주 보는 이들 중에는 이것을 눈치채고 수군대는 이들이 있었다. 그 이유를 잃었다가 새로운 팔에서 찾는 이들도 있었고,

"내가 정말 젊음을 되찾은 것인지, 인간을 벗어난 것인지는 알지 못하네. 반쯤은 그렇다고 느끼고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한 가지, 내 생각을 말해주지."

살라스가 벗어둔 장갑을 다시 착용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오랫동안 장군을 섬겼네. 그렇기 때문인지, 그분이 세월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셨음을 느낄 수 있어. 그런데 답답한 것은, 자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는 거야. 아, 물론 자네들이 어리석다는 말은 아니네. 이성적이기 때문이겠지. 고정관념 때문이기도 할 테고, 하지만 생각해보게."

토어릭은 혼란스러있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야기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몇 번쯤, 이 주제에 대해 가벼운 의구심을 갖기도 했었다. 나이를 먹고도 여전한, 아니 이전보다 더한 괴력을 뽐내는 상관을 보며 언제나 감탄만 할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기에.

하지만 언젠가부터 토어릭은 그런 의구심을 마음 저편에 묻어두었다. 그는 그저 그가 섬기는 주인을 특출난 사람으로 정의했다. 그는 술사도, 관련 지식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었으니, 심각하게 궁리해봐야 어차피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머리가 덜 아플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그분께서 저 군주들과 다르지 않은 건 아닐까 생각한다네. 인간을 초월한, 말 그대로 초인이신 건 아닐까……하고."

"공자를 부정할 생각은 없네. 그래서도 안 되고, 하지만 그뿐이야. 나는 장군을 따른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이해했습니다."

잘못 짚었다.

살라스의 충성은 단호하다. 세속적인 이해관계 따위는 그에게 전혀 중요치 않다. 애초에 대화 상대를 잘못 고른 셈.

'하지만, 지금 들은 이야기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토어릭은 보리스가 크렘보르를 이어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제법 먼 미래가 되리라 생각했다. 군터 크렘보르가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이 좀처럼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라스는 그보다 더 나아갔다. 터무니없게 들리지만, 그의 이야기가 마냥 얼토당토않다고 일축할 수는 없다.

'군주와 같은 초인이라. 그렇다면 황자가 장군을 총애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일개 망명 무장을 향한 황자의 총애를 의아하게 여기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군터에게 우호적인 이들은 능력 있는 자에게 적합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망명 초기에 제레이스의 후광을 뒤에 업었던 것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장군께서는 보리스 공자가 원한다면 언제든 자리를 내주겠다 하셨지.'

권력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게 현명하겠지만, 토어릭은 군터가 그런 식으로 수하의 충성을 시험하는 자가 아님을 잘 알았다.

'욕심 없는 주인 덕분에 아랫것들만 머리가 아프군.'

보리스 공자에게 줄을 서는 자들이라고 불충한 신하라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은 그저, 미래에 투자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어쩌면 나도, 그들과 별다르지 않을지도.'

이제껏 보리스 공자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현시점에서 그의 대두가 이제 막 자리잡힌 솔롬의 질서를 어지럽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보리스라는 젊은이에게 정말 장차 크렘보르를 이끌 자격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나 그렇게 고상한 척했지만, 결국은 미래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후계자의 눈에 들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 나는 살라스님이나… 할렌처럼은 될 수 없다."

알량한 자존심이었을까, 같아질 수 없는 다름을 인정하고 나니 전에는 무시하고 넘겼던 것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말씀하신 바가 있으니, 이 가식적인 놈이 이제야 욕심을 좀 부려도 불충아니라 여기겠습니다.'

***

퀼릭 해들리르는 크렘보르의, 정확히는 보리스 크렘보르가 보낸 사자를 빠르고 은밀하게 위아래로 훑었다.

말솜씨를 내세울 줄 아는 호리호리한 사자를 상상했는데, 눈앞의 사자는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딱딱하게 느껴지는 분위기, 전체적으로 강직한 인상이다.

"보리스 크렘보르 공자께서는 해들리르 공께서 요청하신다면 언제든 병력을 보내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안다. 서신에도 적혀 있었으니까.

기병 오백에 보병 이천.

한 가문의 다툼에 쓰이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수다. 하물며 벌써 판니른 제일의 정예라고 명성이 자자한 솔롬의 군대가 아닌가. 이 정도면 싸움은 해보나 마나다. 다만 문제는.

'무슨 명분으로?'

씹어먹어도 시원잖을 가문의 역도들이지만, 그들을 치려고 한다면 명분이 필요하다. 외부 병력을 불러오려면 더더욱 그렇고, 그런데 솔롬의 병력을 끌어들인다? 어떻게?

'그래. 그건 이쪽에서 고민하라는 말이군.'

얄밉지만 어쩔 수 없다. 가문의 일에 남의 손을 빌리는 것도 마땅찮은 판에, 그들에게 판까지 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좋소. 보리스 공자에게 조만간 연통하겠다고 전해주시오."

"예."

그라모트는 돌아서기 전, 생각이 많아 보이는 퀼릭 해들리르를 힐끗 보았다.

지금 저자의 머리는 어떻게 하면 동생을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겠지.

'이해가 안 되는군.'

테리브란에서 머무는 동안 이런저런 지저분한 일들을 많이 봤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치달은 경우는 처음 보았다.

그래서일까? 명문 귀족 가문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내의 모습이 작고, 초라하고, 우습게만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