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2화
해들리르 가문이 유례없는 풍파에 시달리고 있음은 판니른 내에 귀가 있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으나, 막상 해들리르의 저택은 고요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밖에서 본다면 저 저택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설픈 암살시도도 없었고, 대놓고 벌이는 칼부림도 당연히 없었다. 퀄릭 해들리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동생과의 정전협정을 주도했다. 적어도 우리 가문이 망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원하는 대로 놀아주지는 말자는 의도에서.
물론 그 말을 전해야 하는 대상이 바로 그 외적의 꼭두각시 같은 놈이라는 것은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으나, 어찌 됐든 그 꼭두각시 놈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이지만 머리가 빈 것은 아니라서, 녀석도 이대로 가면 공멸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피를 보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해서, 피를 볼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동생 놈의 목을 쳐버리고 싶었다. 왜 아니겠는가.
"빌어먹을!"
퀄릭 해들리르는 답답한 가슴을 독한 술로 달랬다. 후끈한 열기가 목구멍부터 가슴을 타고 내려가니, 기분뿐일지라도 속이 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저히 식힐 수 없는 심화 (心火)는 다시금 타올라 그의 속에 묵직한 쇳덩이를 달아놓았다.
'내가 후계자다. 내가 해들리르의 주인이야!'
내가 정당한 후계자인 것을 세상이 다 아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퀄릭 해들리르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동생 놈도, 그런 놈을 따르는 가신들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을 부정하는 가문의 역도 놈들이 말이다.
"…몰던."
안다. 그 역도 놈들을 뒤에서 부추기고, 지원하는 몰던의 존재를. 그렇기에 퀄릭 해들리르는 어떻게든 자신이 가주가 된다면 몰던 놈들에게 마땅한 심판의 철퇴를 휘두르리라 맹세했다.
물론, 현재로서는 요원한 일이었다. 몰던은커녕, 그 하수인 놈들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판 아닌가.
하루하루 속을 끓이며 원한만 깊어가던 차. 솔롬에서 온 밀서 한 장이 그를 번쩍 정신 차리게 했다.
"솔롬에서 왔다고?"
"그렇습니다."
"크렘보르 장군께서 보내셨는가?"
한 자루 잘 벼린 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귀족을 앞에 두고 입을 다문다는 것은 무례로 볼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퀄릭 해들리르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히려 저런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
밀사는 밀사인 이유가 있는 법 아니겠나. 답이 없어도, 그는 이 사내가 군터 크렘보르가보낸 밀사이리라 확신했다.
"음."
그러나 봉인을 뜯고 서신을 읽어내려갔을 때, 퀄릭 해들리르는 자신의 예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크렘보르가 보낸 서신은 맞았으나, 그 크렘보르가 군터 크렘보르는 아니었던 것이다.
"보리스 크렘보르?"
"……"
"크렘보르의 후계자께서 우리 가문의 일에 관심이 있으셨는지는 내 미처 몰랐군."
"제 역할은 그 서신을 공께 전하는 것뿐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이만 물러가고자 합니다만."
"그러게."
심부름꾼을 붙잡고 이것저것 묻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에, 퀄릭 해들리르는 밀사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러고 난 후, 그는 한참 동안 서신을 읽고 또 읽었다.
'보리스 크렘보르?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러고 보니 크렘보르의 후계자가 꽤 열정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문의 대소사에 얼굴을 들이밀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이런저런 일들을 벌이기도 한다고.
'하지만…우리 가문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그런 사소한 열정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터인데.'
이리저리 비틀고 꼬기는 했지만, 서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해들리르 가문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알고 있고, 원한다면 이쪽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였다.
보리스 크렘보르라는 젊은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서신을 멋대로 보낼 수는 없다. 크렘보르 가문 정도면 해들리르의 문제에 몰던이 엮여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해들리르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몰던과 어떤 식으로든 부딪쳐야 한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을 테니까.
'즉, 보리스 크렘보르의 이름을 내세우기는 했으나…결국 이건 군터 크렘보르의 뜻이라는 거지.'
본인이 아니라 후계자의 이름을 앞세운 이유는 명백하다. 혹시라도 잘못됐을 때의 위험을 줄이고 싶다는 거다.
용맹하다고 이름난 자치고 몸을 사린다고 볼 수도 있지만, 퀄릭 해들리르는 오히려 이 부분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명목상으로나마 거래 상대가 보리스 크렘보르라면, 이쪽도 부담을 덜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일단, 확인부터 해봐야겠지.'
크렘보르와 손을 잡는다면 단숨에 이 답답한 상황을 뒤엎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이게 함정이 아니라는 것부터 확인해야 한다.
"여봐라."
의심 반, 기대 반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희망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퀄릭 해들리르는 오랜만에 입가에 웃음기를 찾을 수 있었다.
***
"호버 철광, 그리고 치레톤 평야의 곡물 생산량 4할을 넘겨달라고 할 생각이오."
"저쪽에서는 조금 과하다고 여길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저들도 자신들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테니까."
"우리가 자신들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고려하여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하겠군요. 분하겠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고 말입니다."
상대의 상황과 심리를 이용하는 방식. 협상의 기본이지만, 그 기본만 지켜도 충분히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리스의 말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적어도 토어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좋습니다. 거래 조건은 넘어가고, 다음 문제를 이야기해보지요. 퀄릭 해들리르는 우리가 자신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주기를 바랄 겁니다. 자신의 정통성에 손을 들어주기를 바랄 테고, 세력으로 동생을 찍어누르기를 원할 테지요. 하지만 공자도 아시다시피, 그래서는 곤란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곤란하단 말이오?"
"지금도 장군을 경계하고 있는 테리브란의 조정 대신들이 눈에 불을 켤 테니까요."
설마 몰라서 묻는 것인가? 토어릭은 실망감 반, 의아함 반의 심정으로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보리스는 토어릭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아차렸을 것인데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자들이 눈에 불을 켠 것이 어제 오늘의일은 아니지. 그대도 말했다시피, 아버지가 솔롬으로 돌아오신 것도 그자들의 농간 때문이 아니었나."
"그러니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는 겁니까?"
"주의하되, 과하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네. 상대의 존중을 사려면, 먼저 경계를 사야 하는 법이라더군. 지금까지 저들이 크렘보르에게 막연한 경계심을 품었다면, 이제부터는 그 이유를 만들어주자는 거네."
"똑같은 두려움이라도, 미지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이 더 낫다는 겁니까? 그럴듯하군요."
조정의 경계심을 사면서, 동시에 그들의 경계심을 낮춘다.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꽤 그럴듯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간 조정이 군터 크렘보르라는 인물을 다소 과할 정도로 경계한 이유는, 그가 황자의 총애를 받는 능력 있는 무장이자 귀족이면서도 속에 품은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당연히 있어야만 하는 야심 말이다.
여느 힘 있는 귀족들처럼, 다시 말해 자신들처럼 욕심을 드러내지 않는 군터를 보며 그들은 의아해하면서도 동시에 경계했을 것이다. 인간은 본래 보이지 않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을 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귀족이라고 해도, 권력자라고 해도 결국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들도 그러한 본능의 예외일 수는 없다.
"장군께 허락은 구하셨습니까?"
"당연히."
보리스는 토어릭의 기색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꽤 흡족해하시는 것 같았네."
"그렇습니까?"
"자네도 알겠지만, 그분은 테리브란에 있는 엉덩이 무거운 자들을 대단치 않게 여기시네. 정말로 그렇든, 그렇게 보이는 것이든 상관없이…그런 같잖은 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그분이 바라시는 바가 아니야."
"제 생각도 같습니다."
보리스와 토어릭은 그 후로도 적당히 의견을 교환했고, 서로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어 자리를 파했다.
"그럼, 부탁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아무래도 군소리 정도는 나올 겁니다."
"어쩔 수 없지. 아직 철없이 나대는 애송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을 테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공자가 능력과 실력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믿음이 부족한 것뿐이지요."
"이것도 다, 바로 그 믿음을 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부족한 몸이지만 힘껏 공자를 돕는 것입니다."
웃으면서 끝난 자리.
다 식은 잔을 매만지고 있는 보리스에게, 어느새 나타난 그라모트가 말을 붙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참 복잡하고, 번거롭다는 생각."
"필요한 일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필요한 일이지."
남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당연히 힘든 일이다. 그 상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피로가 더 커지는 것도, 역시 당연한 일이다.
선대의 가신들은, 후대를 이어갈 후계자에게는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후계자는 필연적으로 선대 가신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며, 때때로 그들에게 휘둘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나는 일도 비일비재하며, 간혹 그 충돌이 파국을 낳을 정도로 크게 번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토어릭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능력은 있으나 욕심이 크지 않으며(적어도 지금까지 보기에는), 충성심 또한 훌륭하다. 문제는 그 충성심의 대상이 부친이라는 것인데…….
"토어릭 공을 얻으실 수 있다면, 다른 중신들 역시 공자님을 지지할 겁니다."
"그래.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울 것 같지 않구나."
토어릭이 본인의 입으로 최선을 다해 협력하겠다고 했지만, 그 말이 충성의 표현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일단 어디 한 번 지켜보겠다는,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말하자면 시험이랄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토어릭의 협력을 확인받음으로써 처음 세웠던 목적은 달성했다. 토어릭이 나선 이상, 자잘한 군소리는 나오더라도 큰 반대는 나오지 않을 테니.
"네 역할이 크다."
"맡겨주십시오."
보리스가 믿는다는 듯, 그라모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