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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91화 (791/1,064)

791화

"어땠느냐?"

로우렌이 자리에 앉자마자 보리스가 물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로우렌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몰던에서 온 사자는 제법 말이 통하는 자였다. 첨예한 눈치 싸움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속으로 복잡하게 계산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모두 말을 전하고 듣는 입과 귀일 뿐인데 말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 시원한 한 마디로 물포를 튼 그들은 서로 허심탄회하게 바라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 과정에 지저분한 꼼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몰던은 우리가 해들리르의 일에 개입하기를 원한다면 받아주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 전에 선을 분명히 긋기를 원하더군요."

"그렇겠지. 뒤늦게 발을 들인 우리에게 정도 이상으로 양보할 생각은 없을 테니."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우리 쪽에서 요구사항을 분명히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몰던은 정확히 이쪽에서 바라던 그대로 양보해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

"이제 장군의 허락만 남았습니다."

"내가 곧 찾아뵙도록 하지."

보리스는 요즈음 군터에게 용무를 가지고 찾아가는 것에 대한 부담을 밀고 있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의 부친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꽤 전향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느슨하게 먹지는 않았다. 로우렌의 말처럼, 항상 조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보리스는 부진이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일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추측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살얼음판이 조금 더 단단해졌을 뿐이다. 그것에 안심하고 발을 헛디딘다면, 언제든 찬물에빠져버릴 수 있는 것이다.

"언제쯤 고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일단 오늘은 아니다."

"예?"

"가족 식사다. 오랜만의 자리인 만큼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아."

가족 식사라고 해도 고작 네 명이 모일 뿐이지만, 이런 자리마저 근래에는 잘 없었다. 주도적으로 자리를 만들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이번 자리 역시 보다 못한 라일라가 노력한 덕분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집사람에게 미안할 일은 한 번으로 족해. 앞으로는 내가 신경을 써야겠지.'

가족끼리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건 부친에 대한 어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이전에 동생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비록 실비아 본인은 알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동생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아직도 보리스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

네 명이 자리한 식사는 조용히 이루어졌다. 상석에 앉은 군더는 말없이 차례대로 나오는 음식을 비웠고, 한쪽에 앉은 보리스 내외와 그 반대쪽에 앉은 실비아만이 간간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정확히는 라일라와 실비아가 주로 이야기를 나누고, 보리스가 간혹 한두 마디씩 끼어드는 정도였지만.

"토어릭 공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여인의 대화가 잠시 줄어든 틈에, 보리스가 군터에게 넌지시 말을 붙였다. 육즙이 흥건한 고기를 입에 가져가던 군터가 그 말을 듣고 고기를 다시 접시에 내려놓았다.

"소문이 참 빠르군."

"듣자 하니 악사들을 불러모은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맞다."

"악사들은 어인 일로……?"

"너도 알다시피, 이 솔롬은 젊은이들에게 만족스러운 곳은 아니니까. 여인들에게는 특히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실비아에게도, 네 처에게도 즐길 거리가 필요하겠다 싶었다."

침묵이 흘렀다.

보리스는 물론이고, 실비아와 라일라도 순간 멍하니 군터를 바라보았다. 실비아야 그렇다 쳐도, 평소 군터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조차 삼가는 라일라조차도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놀란 것이다.

방금 그 말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쇠를 인간으로 빚으면 저럴까 싶은 사내의 입에서 나왔단 말인가?

"아, 아버지."

"별로 같으냐?"

당황한 보리스가 말을 더듬자, 군터가 다시 고기를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아닙니다. 조금 놀랐을 뿐. 아무튼,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아비가 자식들을 살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보리스는 자연스럽게 올라오려던 말을 삼켰다. 아비가 자식을 살피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제껏 그런 일이 드물었던 부친이 갑작스럽게 이런 일을 한다는 게 좀처럼 자연스레 와 닿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보리스만이 아니었다. 라일라는 물론, 실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속마음이 그렇다고 해서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실비아는 표정이 오묘해졌지만, 라일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힘껏 꼬집어야 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보리스가 실비아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실비아는 작게 한숨 쉬며 답했다.

"나쁘지 않네요. 악사들의 노래는 즐겁거든요. 그들의 목소리나 악기 연주도 그렇지만, 그들의 노랫말이 상상력을 자극해요."

"상상력?"

"그들의 노래 속에는 듣도 보도 못한 세상과 이야기들이 가득하니까요.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노랫말 속의 세상에 빠져들곤 하죠. 그러니까… 나쁘지 않아요."

"좋다고는 말하지 않는구나."

"간접 체험은 간접 체험일 뿐이니까요.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는 못하죠."

"실비."

보리스가 끼어들었다. 표정은 그렇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살짝 굳어 있었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답지만은 않다. 악사들의 노랫말 속 세상과는 달라. 그들의 노래에는 세상의 아름다움만 존재할 뿐, 그 이면의 가혹함은 존재하지 않지. 이제 너도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않니?"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적어도 너보다는 많이 알지. 알다시피 전쟁이 한창이다. 비단 양주만의 문제가 아니야. 제국 전역에 전란의 여파가 미치고 있다. 도적들이 들끓고, 피란민들이 넘쳐나지. 넌 스스로를 새장 속에 갇힌 새라고 여길지 몰라도, 그건 세상 사람 대다수가 누리지 못하는 축복이다.

"세상만이 아니구나. 나까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오라버니가 언제 그렇게 똑똑해졌는지 모르겠네."

"당신. 그만 하세요. 아가씨도요. 이이가 아가씨를 걱정하는 마음에 다소 강하게 말한 거랍니다."

가벼운 이야기가 언쟁으로 뻗어 나갈 것 같으니, 라일라가 재빨리 둘을 말렸다. 그러면서도 시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군터는 자식들의 뜨거운 토론에는 관심 없다는 듯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가 입을 연 것은 두 자식이 적당히 머리를 식힌 뒤였다.

"보리스."

"예. 아버지."

"동생을 억압하지 마라. 네게 그럴 권리는 없다.

"…예."

보리스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고개 숙였다.

"실비아."

"네."

"네 오라비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다. 세상은 네가 머릿속에 그리는 것만큼 아름답지만은 않아. 적어도 내가 본 세상은 그랬지."

"……."

"꿈은 꿈으로 남았을 때만 아름답지. 너도 이제 그 정도는 알 만한 나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라비에 이어 부친에게까지 쓴소리를 들은 실비아의 표정이 안 좋게 변했다. 군터는 그런 딸을 지그시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굳이 현실에 부딪혀보겠다면, 그것도 좋다. 말리지는 않으마. 하지만, 그 정도로 굳게 마음을 먹었느냐?"

기분 탓일까. 실비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친의 눈이 거울처럼 투명하다고 생각했다.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는 듯했다. 부친의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표정으로 말하는 자신을.

평생 떠받들어지며 살아온 네가 비명과 고통, 죽음이난무하는 세상에 나갈 수 있겠느냐? 아무 말도 없었지만, 부친은 분명 그리 묻고 있었다.

그리고 실비아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럴 수 없다.

가문에 고용된 요리사, 하인들이 없으면 식사조차 혼자 하지 못하는 주제에 홀로 세상에 나간다?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았다.

그래. 알고 있었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마음은 삭풍을 맞으며 세상의 온갖 곳을 여행하는 모험가였으나, 몸은 받들어지는 안락함에 익숙한 귀족 여인의 몸이다.

태어날 때부터 숨 쉬듯 익숙해진 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욱하는 마음에서 조금만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간단히 답이 나온다.

실비아는 부친이 자신의 철없음을 나무라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사실 군터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 그는 단지 실비아가 허튼 마음을 품고 엄한 일을 벌이지 않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보리스가 자신의 품을 떠났다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었다. 보리스가 벌이는 일도 결국 모두 크렘보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보리스가 무슨 일을 벌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여차하면 언제든 자신이 손을 댈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다르다. 그녀가 바라는 세상을 돌아보고 싶다는 것인데, 이 바람은 막연하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자식들을 자신의 시선과 손이 닿는 곳에 두고 지켜보고자 하는 군터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고.

군터는 지금의 짧은 대화로 실비아의 마음이 꺾였으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분명 계속 미련을 가질 테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모든 아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법이니까.

***

"거기! 밀지 말라고!"

"어이! 형씨!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번잡스러웠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짜증이 났지만, 동시에 기쁘기도 했다. 달갑지 않은 소음 속에서 활기가 느껴졌다. 이제껏 봐온, 폭력과 무질서가 넘쳐나던 곳들과는 달랐다.

'들은 대로군.'

사내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어딜 둘러봐도 사람이 보였지만, 제법 널찍하게 난 길은 비교적 인파가 적었다. 잘 무장한 병사들이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덕이었다.

사내는 작은 충돌이 이는 곳마다 움직이며 소란을 잠재우는 병사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잘 훈련받은, 정예병의 모습이었다. 주방위 군단장의 성이라더니, 그래서 그런 것일까?

'결국, 질서는 힘으로밖에 유지할 수 없는 것인가.'

사내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끝에는, 활짝 열려 있는 성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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