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0화
보리스는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났다. 녀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녀석이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자식은 보리스 하나만이 아니었다.
"실비아는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다만?"
니클라스가 잠시 말을 골랐다.
"이곳 생활을 다소 무료하다고 느끼시는 듯합니다."
군터가 니클라스에게 맡긴 임무 중에는 가족들의 보호와 관찰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리스는 그가 보호하고 관찰할 필요가 반쯤 사라진 상황이니, 실질적인 보호관찰 대상은 실비아 하나뿐이라고 봐야 했다.
"무료함이라."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도시라도 테리브란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텐데, 하물며 솔롬은 아직 도시라고 하기에도 뭐한 일개 성이 아닌가. 한창때의 여인이 이런 곳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테리브란 같은 도시에서 몇 년간 살아본 경험이 있다면 더더욱.
"어찌한다."
독백처럼 들리지만 그게 답을 찾는 물음이라는 것을 모를 니클라스가 아니었다. 니클라스는 다시 한번 할 말을 골라야 했다.
"일전에 테리 브란에 있을 당시에, 아가씨께서 악사들의 공연을 자주 즐기셨다고 하더군요."
"악사들의 공연?"
"예. 여인들이 미술과 음악 같은 고상한 분야에 관심 가지는 것은 흔한 일이지 않습니까."
실비아가 여느 여아들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군터였기에 처음에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니클라스가 그리 말하니 그런가 싶기도 했다.
"좋아, 그래서?"
"솜씨 좋은 악사들을 불러 모으시지요. 아가씨께서 즐길만한 유희 거리를 만들어주시는 겁니다."
괜찮은 생각 같았기에, 군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꽤 비용이 들어갈 거라는 마지막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번에 조정에서 보내온 포상금이 휘하의 장졸들에게 두둑이 나눠주고도 아직 한참 남았다. 군터는 비록 축재에는 흥미도 재주도 없었으나 사치에도 관심이 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크렘보르 가문의 재산은 나날이 불어나고 있었다.
그러니 악사들을 물러모으는 것쯤은 사치라고 할 것도, 신경을 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군터는 이 일을 지시하기 위해 모페이브를 불렸다. 나짐과 교대로 지하에서 할렌의 상태를 살피는 일을 하고 있던 모페이브는 이전보다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악사… 말씀입니까."
"니클라스는 그리 말하더군."
"아가씨가 테리브란에 계실 때, 거리의 악사나 음유시인들에게 관심을 두시긴 했지요."
"괜찮을 것 같은가?"
"예.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조금 심심하지요."
비단 젊은 사람뿐일까. 한 번이라도 도시의 삶을 맛본 이들은 삭막한 군사 요새에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할 터였다. 물론 솔롬은 지금도 계속 발전하는 중이었지만, 한껏 눈이 높아진 젊은이에게는 한참 부족하리라. 그나마 실비아가 여느 귀족 여인들과달리 고상한, 달리 말해 돈 많이 드는 취미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냐가 가장 좋아하는 승마나 사냥 등은 이곳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할렌은 어떤가."
"변함없습니다. 조금씩 기억을 찾고 있는 듯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할 듯싶습니다."
인내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조금씩이나마 성과가 보인다는 점이 위안이었다. 할렌은 이따금 할렌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을 툭툭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모페이브와 나짐은 그 찢어지는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영혼이 점점 육신에 깃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육신이 생기가 사라진 육신이라는 점입니다만……."
숨이 끊어지자마자 영혼을 불어넣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한 번 죽은 육신이다. 신제가 기능을 멈춘 상태에서 억지로 소생시켰으나, 적어도 현재까지 보기에 그 소생은 반쪽짜리였다.
"차이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장군의 경우와는 명백히 다릅니다."
모페이브는 군터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할렌의 소생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할렌은 군터와 달랐다.
"육신이 다른 이의 것이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본래 하나였던 것이 잠시 멀어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것은 자연스럽지요."
그 외에도 이런저런 추측이 가능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다. 그래도 할렌이 조금씩이나마 기억을 되찾고 있는 듯 보이니,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봐야 하리라.
"그래서 말입니다만……."
"기억의 회복을 앞당기기 위해, 자극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있었습니다."
"나짐인가?"
모페이브는 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이 곧 답이었다. 군터가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일리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단초가 주어진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방안은?"
"아무래도 가족이겠지요. 가능하다면, 그들과 접촉을……."
"어렵지 않겠느냐."
어지간한 것이면 다 허락했을 테지만, 이것만은 군터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할렌을 되살린 것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할렌의 가족들과 조금도 소통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아직까지 사령술에 부정적인 인식이 지워지지 않고 있는데, 할렌의 영혼을 거둬 그를 차가운 육신에 되살렸다고 한다면 그들이 어찌 반응할지 알 수 없다.
사실 그런 반응 자체가 두렵지는 않다. 다만 아끼는 부하의 가족에게 가혹해지고 싶지 않을 뿐.
"할렌님에 관한 일은 계속 숨기실 생각입니까?"
모페이브는 군터가 난색을 표하는 이유를 잘 알았다. 군터가 생각하는 것은 그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할렌에 관한 일을 알게 된다면 할렌의 가족들이, 나아가 다른 이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모르긴 몰라도, 좋은 쪽으로는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언제까지고 숨길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반응을 우려했다면 애초에 할렌을 되살릴 생각 자체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피하실 수는 없습니다."
"피하지 않는다. 조금 미뤄둘 뿐."
"언제까지입니까?"
"할렌이 자신을 자각할 때까지. 결정은 내가 아니라 녀석이 한다."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렌의 일은 할렌이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그를 진정 할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페이브는 할렌을 오랫동안 봐 왔다. 지내온 시간에 비하면 그리 가깝다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익숙함을 느낄 정도는 됐다.
그렇기에, 모페이브는 지금 지하에 있는 자를 진정 할렌이라고 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할렌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사내. 물론 그 안에 깃든 영혼은 할렌의 것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모페이브는 그 사내에게서 낯선 느낌을 받고 있었다. 입으로는 그를 '할렌' 이라고 부르면서도 말이다.
"허면…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정도는 괜찮을지요."
"그 정도는 괜찮겠지."
절반의 허락을 얻은 모페이브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물러갔다. 곧장 지하로 내려간 그는 나짐과 교대하여 할렌을 살폈다.
"할렌. 그대의 두 아들을 기억하시오?"
"……."
"그라모트와 로우렌, 그 둘은 당신이 죽은 뒤 많이 힘들어했소. 하지만 곧 이겨냈지. 지금은 보리스 공자를 따르며 공자의 일을 돕고 있소."
"……."
"그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안 좋은 말도 하는 모양이오. 공자에게 아첨하면서 쓸데없이 야심을 부추긴다고 말이지. 뭐,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이해는 가오. 하지만 그런 건 제쳐두고, 대단하지 않소? 부자가 대를 이어, 대를 잇는 충성을 하는 모습이, 어떤 이들은 그들을 그렘보르 가문의 가신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더군."
할렌은 답이 없었다. 그러나 모페이브는 그라모트와 로우렌을 언급할 때, 종종 할렌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반응이 있군.'
기대 대로다. 역시 핏줄의 힘인 것일까. 비록 지금 저 몸에 흐르는 피는 그의 두 아들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지만…….
"모페이브."
"음?"
낯선 목소리. 낯선 말투. 그 어디에서도 할렌이라는 느낌은 받을 수 없다.
"나를 되살린 것이…장군이라고 했었지."
"그렇소."
"어째서요?"
감정이 묻어있지 않은 물음. 모페이브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가 원했으니까."
"내가?"
"그렇소. 나는 그렇게 들었소."
후회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 당시의 상황을 모르오. 그곳에 있지 않았고, 전해 들은 것이 전부지. 하지만 나는 그리 들었소. 그대가 원했다고."
"……."
"혼란스러울 거요. 필시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 더 혼란스럽겠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만, 지금은 단편적인 기억들이 돌아오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할렌. 흔들리지 마시오. 부분적인 기억과 감정만으로 판단하려고 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오. 그러니 고민, 의문 같은 것들은 나중으로 미루시오. 그런 것들은 나중에, 온전히 사고할 수 있을 때 해결해도 늦지 않소."
"조언 고맙소."
더 말하기 싫다는 듯 눈을 감는 할렌을 보며, 모페이브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야 시간이 지나면 돌아온다고 쳐도, 저 목소리는 어떨까. 까칠한 돌에 성대가 반쯤 갈려 나가면 저런 소리가 나올까 싶은, 듣는 것 자체가 고역인 목소리. 저 목소리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까?
그러길 바라지만,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반갑게 맞아주시니 노고가 싹 가시는 느낌입니다."
로우렌은 여유로워 보이는 상대를 보며 마찬가지로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 공자님을 뵙고 싶으시다고?"
"예. 하잘에서의 연이 있지 않습니까. 비오르 공께서 그때 대접받으신 데 대한 감사의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하하. 그렇소? 으음. 그런데 안타깝지만, 바로는 힘들겠소. 아시는지 모르겠소만, 공자님이 요즘 조금 바쁘시다오. 어찌나 시달리시는지, 관정에서 밤을 지새우시는 날도 있을 정도요."
"저런. 하긴, 후계자시니……."
이해한다는 듯 말끝을 흐리지만, 그냥 하는 말임을 알고 있다. 사실 관심도 없을 것이다. 시간을 끌면서 애간장을 태우겠다는 이쪽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보리스가 관청에서 밤을 지새우기는커녕, 관정에 들르는 일도 드물다는 것을 굳이 알아내려 하지도 않겠지.
"하하. 그렇소?"
"그럼요. 정말입니다."
의미 없는, 말장난 같은 이야기가 쉬지 않고 오갔다. 지루하기 그지없었지만, 로우렌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이런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들어서 아는 것은 있었다.
상대에게 원하는 것을 받아내고자 할 때, 절대로 원하는 바를 먼저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로우렌은 그 한 가지만을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며,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상대의 입에서 기어코 본론이 튀어나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