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9화
보리스는 자신만의 사람들을 모으고자 했다. 그렇기에 바오룸이 그를 찾아와 따르겠다고 말했을 때 크게 기뻐했다.
"고맙소, 든든하군."
바오룸의 이름값이 그리 대단치 못하다는 것은 보리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오룸이자신을 따르겠다고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기렸다.
'내게 충성하는 자들이라.'
부친에게 거역할 마음은 전혀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의 그늘에서만 머물 마음은 더더욱 없다. 단지 크렘보르의 후계자가 아니라 보리스 크렘보르로 거듭나기로 한 이상, 제대로 할 작정이었다.
"예전에 저를 따르던 부족원들이 있습니다."
기쁘게 맞아주자, 바오룸은 그가 준비해온 선물을 풀어놓았다. 그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은 보리스를 더욱 기쁘게 했다.
"한때 제 동생이 부리던 자들이지요. 그들은 장군을 위해, 그리고 저희 형제를 위해 각지를 떠돌며 이런저런 일들을 해주었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이라고 뭉뚱그려서 표현하기는 했지만, 보리스가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들어보니 그들이 하는 주된 일은 정보수집이었다. 주로 부친에게 보고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자잘한 정보들을 캐오는 자들이었는데, 그 솜씨가 니클라스의 수인병들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꽤 괜찮은 듯했다.
"좋군. 좋아. 공이 나를 위해 이런 선물을 준비했으니, 나도 마땅히 그대에게 답례하고 싶은데……."
"아닙니다. 저도 지금 제 처지가 어떤지 알고, 있습니다. 저 같은 자를 위해 공자님이 마음을 써주신다는 사실이 퍼지면 좋을 것이 없습니다."
"어째서?"
"저 같은 자를 후대하신다면, 사람들은 분명 그 이유를 궁금해할 테니까요. 만에 하나라도 제가 공자님께 드린 선물이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드러나서 좋을 게 없는 이들이니까요."
"…그렇군. 이해했소."
보리스는 바오룸을 다시 보았다. 그저 동생의 덕을 보며 호의호식하는 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자가 아닌가. 또한, 그 이상으로 인상 깊은 것은 그가 자신의 욕심을 통제할 줄 아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막상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면에서, 적어도 이 통통한 사내는 그들보다는 나았다.
"저 스스로, 공자님께 후대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겠습니다."
"실로 믿음직스럽군. 기다리고 있겠소."
보리스는 바오룸이 넘겨준 그의 옛 부족원들을 로우렌의 밑에 편성했다. 그 스스로도 그런 일에는 로우렌이 적격이라 생각했고, 로우렌 본인이 바란 일이기도 했다.
"연회를 열고, 사람을 많이 만나십시오. 그들에게 공자님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사는 겁니다."
그러면서 로우렌은 절대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당장 그들을 공자님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들어서는 안 됩니다. 거부감을 느끼는 자들이 생길 수도 있고,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 알고 있다."
안의 일은 최대한 신중하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한다.
하지만 밖의 일은 다르다.
"비오르 몰던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흥미는 있나 보군."
"실리를 따질 줄 아는 자니까요."
로우렌이 씩 웃었다.
"세인들은 그가 자존심도 없는 겁쟁이라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만약 그가 겁쟁이였다면 지금까지 그 자리에서 버티지 못했을 터. 그는 겁쟁이가 아니라 냉철하고 독한 사내입니다."
비오르 몰던은 형의 잔혹한 숙청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여 후계자의 자격을 포기했다.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형의 비정한 칼날 앞에서 살아남았고, 능력을 보임으로써 신뢰를 얻어 몰던 가문의 중역이 되었다. 로우렌은 그것이, 일개 겁쟁이는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물론이지."
로우렌만큼은 아니지만, 보리스도 비오르 몰던에 대해 흥미가 있었다. 물론 그 뒤의, 몰던 가문에대한 흥미는 더욱 컸고, 그러니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라고 해도, 만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
동생으로부터 하잘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받은 물리츠 몰던이 잠시 침묵했다.
"크렘보르의 아들이 접촉해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크렘보르의 아들이 여느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정말 아비와는 다르군."
"파악한 대로가 아닙니까."
이제껏 크렘보르의 아들, 보리스 크렘보르는 테리브란에서만 머물렀다. 하지만 몰던 가문은 일찍부터 그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해왔고, 보리스 크렘보르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나름의 파악을 끝낸 뒤였다.
그렇기에 군터 크렘보르의 독자가 여느 젊은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멀리서 전해 듣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다르지. 정보는 정보일 뿐이다."
정보는 정보일 뿐이라. 비오르 몰던은 형의 그말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했다.
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 같은 해석을 하고도 판단은 또 다르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정보는 그저 정보일 뿐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정보가 가치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네 생각은 어떠냐. 녀석이 혼자 움직이는 것이라 보느냐?"
"제 생각에는, 예. 그렇습니다."
"어째서?"
"군터 크렘보르는 저희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그 말은 조금 거슬리는군."
"제 생각을 물으셨기에, 제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좋아. 이유는?"
"이제까지 그가 보여준 행적이 그를 증명합니다."
군터 크렘보르는 독특한 사내였다. 그 어떤 귀족도 그와 같지 않으며, 그 어떤 군인도 그와 같지 않았다. 그는 이제껏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여왔다. 총독과 손을 잡고 세를 키우는 데 집중하는 듯하지만, 또 막상 그 일에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욕심을 부리지도 않고, 그렇게 쌓은 힘을 드러내는 일도 드물었다. 황자의 총애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황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거나 그 대가를 받는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지, 뮬리츠 몰던은 좀처럼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건 사람과 세상 돌아가는 일을 통찰하는 데 자신이 있는 그에게는 다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물리츠 몰던은 억지로 자존심을 내세우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이해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군터 크렘보르는 그의 이해영역 밖에 있는 자였다. 그렇기에 그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이되, 필요 이상으로 그와 엮이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보아하니 그의 하나뿐인 아들은 그와 조금 다른 듯했다.
"그 어린 녀석이 무엇을 원한다고 보느냐?"
"자신의 이름을 높일 만한 업적이겠지요."
"근거는?"
여느 젊은이들이 다 그러니까, 같은 단순한 답은 원하지 않았다. 비오르 몰던도 그런 형의 속을 잘 알기에, 조금 더 그럴듯한 답을 내놓았다.
"그 역시 행적이 증명합니다. 듣자 하니 보리스 크렘보르가 서부 전선에서 그럴싸한 전공을 세웠다더군요. 그중 포트락의 아들과 일전을 벌인 이야기는 벌써부터 꽤 퍼지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입에서 떠도는 말들이 다 그렇듯, 어느 정도 과장되거나 비틀린 부분은 있겠습니다만…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는 않았겠지요."
"공명심에 불타는 젊은이인가."
"어느 정도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들리르 건이겠군."
"한발만 담가도 꽤 득을 볼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애송이 녀석이 욕심을 부리는군."
뮬리츠 몰던이 혀를 차는 동시에 빙그레 미소지었다.
해들리르를 무너뜨리기 위한 작업은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꽤 전부터,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그 얼간이들의 집안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다만 최대한 피해를 줄이고, 이후에 겪게 될 난항을 줄이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그런데 이미 다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에 한발을 걸치려고 한다? 공을 들인 입장에서는 괘씸하다고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물론처음 해들리르에 손을 댈 당시에 크렘보르와 반쯤 손을 잡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묵인이었다. 그러니 묵인에 대한 대가 정도만 내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직접 발을 담그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그 녀석의 속을 떠보려고 하느냐?"
"예. 만약 제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쪽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 겁니다. 뜸을 들인다고 해도 오래가지는 않겠지요."
"좋아. 네 뜻대로 해보아라."
"예."
***
군터는 토어릭의 보고를 들었다. 보리스의 동향에 대한 것이었다.
"보리스 공자는 자신의 사람을 모으고 있습니다. 대놓고 그런 낌새를 보이지는 않고 있습니다만, 그 저의는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군터는 한마디도 없이 토어릭의 보고를 듣다가, 그의 말이 끝난 듯하자 둑 물었다.
"걱정되느냐?"
"예?"
"내 아들이 내게 도전하고, 내가 내 아들과 다툴까 걱정이 되느냐는 말이다."
너무 직접적인 물음이었을까. 토어릭은 그답지 않게 즉답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그러나 그는 곧 당황을 가라앉힌 뒤,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지요. 물론 저는 보리스 공자를 믿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나약하고 간사한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고, 눈이 멀 정도로 보았으며, 직접 겪기도 했습니다. 권력이라는 놈이 얼마나 음험한지 역시도……."
"그래서, 내가 보리스를 단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어느 정도는, 예. 그렇습니다."
군터는 수하의 충심과 걱정으로 가득한 눈을 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듣고 싶지 않은 보고였고, 관심 없는 주제였다. 솔직히, 이런 상황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충성하는 수하를 굳이 실망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말로 충성스러운 수하를 기만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생각은 없다."
"……."
"녀석이 내 자리를 원한다면, 줄 것이다."
"예?"
"녀석이 내 자리를 원한다면 그냥 내줄 것이라고 했다."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토어릭에게 군터는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주었다.
"자, 장군."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묻고 싶구나. 네 눈에는 내가 이 자리에 연연하는 것처럼 보였느냐?"
"장군. 그것이 아니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토어릭은 이번에야말로 말문이 턱 막혔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성주의 자리에도, 장군의 지위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다."
"…어째서입니까?"
"그것들이 나를 장식할지언정, 난 그것들을그리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이들이 바라는 지위고 명예일지라도, 군터는 그것들이 그리 가치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그것들은 그에게 있어 몸에 걸친 옷가지 같은 것이었다. 입고 있지만,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지면 언제든 벗어던질 수 있는.
그런 것을 자식이 원한다? 그렇다면 벗어주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고작 그런 것을 위해 자식과다룰 마음은 없었다.
제대로 이해했을까? 군터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토어릭을 보며 다른 소리를 써야 하나 잠시 고민했으나, 곧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해했습니다."
잠시 후, 토어릭이 어렵게 입을 뗐다.
"그럼, 앞으로는 공자님에 대한 보고를……."
"보고는 계속해도 좋다. 녀석이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 게 좋겠지."
흥미보다는 의무감에 가까웠다. 보리스는 그가 인간을 고집하는 두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알겠습니다."
토어릭이 진이 빠진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 나갔다. 군터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