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8화
로우렌은 접객실에 들어서기 전,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마음에 둔 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트집 잡힐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지금 만날 상대가 한물간 인사라고 해도 말이다.
'뭐, 한물갔다고 해도 그 후광은 아직 어느 정도 남아있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를 청한 것이다. 면식을 트고 관계를 맺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우렌은 문을 열고 들어가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있던, 통통한 사내가 웃으며 답했다.
"무슨 말인가. 감사라면 오히려 내가 더 감사해야지. 바쁜 젊은이가 나 같은 사람을 굳이 찾아주었는데 말이야."
"그런 말씀 마십시오. 바오룸님은 일찍부터 크렘보르 장군을 따르신 중진이지 않습니까."
통통한 사내, 바오룸이 껄껄 웃었다. 로우렌의 말이 마음에 든 듯했다. 그게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임을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한때 한 부족을 이끄는 부족장이었으며, 부족 전체와 함께 귀부한 만큼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던 그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됐던 것은 한때 한 부족을 이끌던 부족장이라는 지위가 아니라, 야스메티의 형이라는 단출한 소개 하나였다.
부족에 있을 당시에는 추레한 외모와 약한 몸 때문에 부족원들의 존중을 받지 못했던 야스메티는 군터의 휘하에 들자마자 특유의 총기를 발휘하여 단숨에 군터의 측근이 되었다. 야스메티가 군터의 총애를 받으면 받을수록, 높은 지위에서 많은 사람을 부리면 부릴수록 그의 형인 바오룸도 그에 비례하는 존중을 받았다.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그는 더 이상 부족장도, 초원의 전사도 아니게 되었으나 그런 것이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그만큼 데리브란에서의 생활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처음에는 동생에게 밀리지 않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수행하며,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바오룸은 곧 잔인한 현실의 벽에 가로막혔다. 그는 오래지 않아, 자신이 그리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의 특별함은 부족장이라는 신분 하나뿐이었다. 한때 그의 자부심이었던 용맹조차도, 군터의 휘하들 사이에서는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지독한 상실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동생이 빛나면 빛날수록, 그 빛을 받아 자신도 덩달아 빛날수록 자조만 늘어갔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복잡한 생각 없이, 존중받으며 즐기기만 하면 되는 삶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낯설었으나 그는 금방 그 즐거움에 중독됐다. 그가 놓아버린 것에는 상실감과 열등감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의 삶에 드리운 그늘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근육으로 가득했던 몸에 말랑한 살이 들어서고, 때때로 보이지 않는 비웃음이 들려왔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쨌거나 면전에서는 그 어떤 보기 싫은 광경도, 듣기 싫은 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버팀목이자 그늘이었던 동생이 죽은 후, 모든 것이 급변했다.
언제까지나 그의 그늘이 되어줄 것만 같았던 동생이 죽었다. 이제는 좋으나 싫으나 홀로 서야 하는것이 당연하지만, 바오름은 그 당연한 것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안락함에만 취해있던 그는, 너무도 급격한 변화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지 않는 곳에서만 향하던 조소가 이제는 드러난 곳에서도 날아들었다. 별다른 하는 일도 없이, 동생 덕만 보는 얼간이라는 말들.
당연히 불쾌했고, 화가 났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다 놔버리고 동생의 그늘에서 놀고먹기만 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변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몸에 들러붙은 군살 이상으로 그의 마음도 한껏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테리브란에서 솔롬으로 온 뒤로는 더했다. 바오름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조언을 해주던 동생은 이제 없고, 예전에 연을 쌓았던 이들도 이제는 데면데면했다.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 낮을 두껍게 하고 그들을 찾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던 찰나, 할렌의 둘째 아들이 자신을 청한 것이다.
"그래. 무슨 일인가?"
"뭐 대단하게 일이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아시다시피, 이번에 저희 형제가 아버님을 떠나보냈기에……."
"아. 그 소식은 들었네. 안타까운 일이야. 죽음이야 모든 전사가 언제 맞이해도 이상하지 않은 숙명이지만, 할렌이 그렇게 갈 줄은 몰랐어."
"예.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분다운 최후였습니다."
"…그래."
바오룸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그도 할렌의 소식은 들었다. 그가 최후까지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는지도.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바오룸은 할렌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전사의 최후가 아닌가. 모두가 그의 이름을 말하며 경의를 표했다. 한때, 바오룸 자신도 언젠가 자신이 죽게 된다면 그런 최후를 맞이하기를 바랐었다. 한때는 말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저희 형제는 막막하게 되었습니다."
"막막할 것까지야."
바오름도 눈과 귀가 있었다. 할렌의 두 아들이 보리스 공자의 측근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진즉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뜬금없는 초청에 흔쾌히 응한 것이고,
"바오룸님께서는 일찍이 저희만 한 나이였을 때부터 한 부족을 이끈 분이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부족을 통째로 이끌고 귀부한다는, 일생일대의 결단까지 내리셨었지요. 저희 형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뿐이네. 나는 그저 상황에 맞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압니다. 제가 바오룸님을 청한 것은, 저희 형제를 위한 조언을 구하고자 함입니다."
"내게 조언을? 하하. 그러지 말게나."
웃기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바오룸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로우렌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는 진지하게 바오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강렬한 시선에, 바오름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기는 빠르게 사라졌다.
"나도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알고 있네. 달콤한 말을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부탁이니 날 속이려고는 하지 말게나."
"속인 적 없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바오룸님의 도움을 바랍니다."
"그 도움이라는 것이 조언은 아닐 테고, 그렇지?"
내색하지 않았으나, 로우렌은 조금 놀랐다. 사실 그는 이 둔해 보이는 사내를 조금 깔보고 있었다. 동생 하나 잘 둬서 인생을 편하게 살다가, 동생을 잃고 난 후 추락해버린 무능한 자 정도로 여겼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바오룸은 그리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말을 가려들을 줄 알고, 자신을 객관화할 줄도 아는 자였다.
'동생이 너무 뛰어났기에 묻혀버린 건가.'
제법 흔한 경우다. 그럭저럭 능력이 있는 자가, 비할 수 없이 거대한 재능 앞에 좌절하고 꺾여버리는.
"무엇을 바라나?"
진실을 바라는 눈빛 앞에서. 로우렌은 가면을 집어 던졌다.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물어오는 상대에게는 솔직하게 대응해주는 편이 좋다. 괜히 기만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가는 여러모로 피곤해지는 수가 있으니,
"말씀드렸듯, 바오룸님의 도움을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야스메티님이 부리던 이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수인병 말인가? 그들은 니클라스의……."
"그들 외에. 그러니까, 사적으로 부리시던 자들 말입니다. 추측하기로는 바오룸님이 거느리셨던 옛 부족원들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
바오룸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조금 더 굳은 얼굴로 로우렌을 응시했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묻지 않겠네. 그들에 대한 것은 왜 묻지?"
"능력 있는 이들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의 그 능력을 공자를 위해 쓰고자 합니다."
"내 도움을 바란다는 것이, 자네 형제가 아니라 보리스 공자를 위해서였나?"
"저희 형제는 공자님에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공자를 위한 것이 곧 저희를 위한 것이지요."
"보리스 공자가 원한다면, 그 부름을 거절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나. 적어도 이 솔롬에는 없을 텐데, 왜 굳이 내게 부탁을 하지?"
"자발적이고, 진실한 충성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보리스 공자의 명령인가?"
"그랬다면 공자께서 직접 바오룸님을 찾으셨겠지요."
바오룸이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약간 여유가 생긴 듯했다.
"그래. 그렇겠지. 그렇다면 이건 자네의 자발적이고, 진실한 충성의 발로인가?"
로우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오룸이 그랬던 것처럼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허나 저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바오룸님도 이제 자리를 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인가?"
"이래저래 편치 않은 처지이신 걸로 압니다. 바오룸님이 공자님의 휘하에 든다면 상황이 변하겠지요. 그리고 그럴 경우…바오룸님이 자발적으로, 먼저 움직이시는 편이 더 그림이 좋지 않겠습니까? 근사한 선물도 함께라면 더욱 좋겠지요."
"……."
"생각하실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잠깐, 잠깐이면 되네."
바오름은 이 순간, 자신이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할 기로에 섰음을 확신했다.
'보리스 공자라.'
사실 보리스 공자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수하들을 모을 이유는 없다. 어차피 이미 크렘보르의 후계자 아닌가. 심지어 후계 다툼을 할 다른 형제도 없는…….
'아니. 누이가 하나 있기는 하군.'
하지만 사내도 아닌 계집이 후계 다툼의 경쟁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그의 자리는 확고하다 봐도 무방하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크렘보르의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가 될 텐데, 굳이 먼저 나서서 일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가만히 앉아서 물려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러고 보니 보리스 공자가 이번에 꽤 전공을 세웠다고 했다. 젊은 군관들의 지지도 받고 있는 듯했고,
'자신만의 욕심이 있는 건가? 그래서 사람이 필요한 것이고?'
그런 이유라면 납득간다. 그런 이유라면.
"장군께서는 알고 계신가?""
"이 솔롬의 어디든, 장군의 눈과 귀가 없는 곳이 있겠습니까? 무엇 하나 그분의 뜻밖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로우렌의 답은 바오룸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일말의 불안감을 날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