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7화
기억나는 것은 의식이 희미해지고, 멀어지는 아득한 감각이었다.
아득한 다음에는 안락함. 딱 좋게 느껴지는 따뜻한 물에 온몸을 담근 것 같은.
딱 좋다고 생각했던 물이 사실은 불보다 더 뜨거운 용암과 같으며,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자신을 녹여 없앴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도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괴롭게 하던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고,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평온이 그를 달래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할 나위 없는 평안함 속에서 그는 빠르게 자기 자신을 잊어갔다. 형언할 수없이 난폭한 무언가가 그를 움켜잡기 전까지는.
***
"시신의 뱃가루, 망자를 부르기 가장 좋은 매개지요."
나짐이 작은 주머니를 받아들며 말했다. 할렌을 화장했을 때, 군터가 직접 담아 온 것이었다. 비록 육신은 불길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 일부는 이렇게나마 남았다.
"충분한가?"
"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양이 많아 나쁠 것은 없지만, 매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요."
사령술사로서의 힘은 군터가 훨씬 우위였으나, 솜씨는 나짐에 미치지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솜씨는 지식과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령술을 사용할 줄 알지만 별다른 연구 없이 되는대로 사용해왔던 군터와는 달리, 나짐은 사령술이라는 학문을 심도 있게 파고든 전문가였다. 군터는 나짐이 조심스럽게 의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군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나짐은 몸을 숙인 채 제단을 쌓으며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강령술은 사령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지요."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기도 하지."
군터 역시 겉핥기식이나마 사령술을 배웠기에 강령술이 사령술에서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령술은 영생을 추구하는 구도자들의 의지, 혹은 집요함이 낳은 산물이다. 영원한 삶을 꿈꾸는 것은 짧은 삶을 사는 인간 대부분의 본능.
그러나 정해진 운명을 극복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이루기 힘든 일이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힘 있는 이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머리를 맞대도 그들의 목표는 지난하기만 했다.
그러나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답을 찾지 못했지만, 몇 가지 실마리 정도는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육신에 주목했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전에, 그들은 박동하는 심장과 피가 흐르는 육신이야말로 인간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가 영혼의 존재를 밝혀냈고, 미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구도자들은 세월이 흐르며 쇠해가는 육신보다는 그 안에 깃든 영혼에 집중했다. 성급한 자들은 육신은 껍데기일뿐이며, 육신이 담고 있는 영혼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성급한 자의 주장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육신의 불멸보다는 영혼의 불멸에 조금 더 가능성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 가능성에 주목한 구도자들은 영혼을 다루는 갖가지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의 영구적인 보존이었으나, 실제로 그것을 이룬 이는 나오지 않았다. 최초의 위대한 발견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매개가 있다고는 하지만, 영혼 감옥 안에 잠들어있는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니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군터는 자신 없는 듯 들리는 말투가 거슬렸지만 참고 넘겼다.
"네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다. 의식에만 집중하도록."
신경 쓰이는 부분이기는 했다. 할렌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영혼을 수습했지만, 영혼 감옥 안에 둔 시간이 짧지 않았기에 그동안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 일단 느껴지기로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혹시 또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설령 이상이 있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음에도 일이 틀어진다면, 뭘 더 어찌하겠는가.
푸욱!
나짐이 제단 중앙에 쓰러져 있던 사내의 목을 단도로 찔렀다. 의식을 위해 준비한 제물로, 솔롬의 지하 감옥에 갇힌 죄수 중 가장 몸이 건강한 자였다. 강력한 수면제를 먹여둔 덕에 그는 칼날이 목을 파고들고 피가 철철 흘러나올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생기가 빠져나오고 사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하면, 그때가 적기입니다."
군터는 천천히 죽어가는 죄수를 힐끗 보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준비가 끝났습니다."
나짐이 하나하나 쌓아 올린 제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술식이었다. 네 개의 은그릇에 가득 담긴, 지금 막 재취한 피가 서서히 끓어올랐다. 그냥 피가 아니었다. 국외에서 들여온 진귀한 마수의 피였다. 강령술에서 최고의 재료로 취급받는 이것을 구하기 위해 적잖은 금액을 들여야 했다. 마수 자체도 희귀할뿐더러, 국외에서 들여오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작됐습니다. 준비해주십시오."
마수의 피는 비싼 돈을 들인 값을 했다. 의식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글부글 끓던 피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군터는 나짐의 신호에 맞춰 영혼 감옥 안에서 할렌의 영혼을 깨웠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풀어내어 붉은 연기 쪽으로 인도했다.
다행히 영혼은 별다른 저항 없이 붉은 연기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연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한 차례 꿈틀거렸다.
군터는 자신이 붉은 연기를 통제할 수 있음을, 정확히는 거기에 스며든 할렌의 영혼을 통제할 수 있음을 느꼈다.
'움직여라.'
혈무(I)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이동했다. 목적지는 제단의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시신이었다.
***
자욱한 안개 속에서, 그는 답답함을 느꼈다. 언젠가부터 그를 가둔 이 안개는 절대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그가 어디로 가든, 안개는 항상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더 앞으로 걸어도 되는지, 이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함과 두려움. 그는 이제 평온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그는 더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이 안개가 걷히기만을 바라면서,
'뭐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기다림에 지친 후였다. 착각이었을까? 그는 지긋지긋한 안개가 출렁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어나라.]
나직하고 무심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세상이 뒤집했다.
군터는 천천히 일어나는 시신, 아니 이제는 시신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몸뚱이를 보았다.
성공한 것일까? 몇 발자국 물러난 나짐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던 모페이브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간 들인 모든 노력의 결실이 이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열매가 맺힐 것인가, 아니면 끝내 시들어버리고 말 것인가.
반쯤 몸을 일으킨 몸뚱이가 눈을 떴다. 어딘가 팅 비어 보이는 공허한 눈이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할렌."
군터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할렌이라 불린 몸뚱이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 반쯤 일어난 상태로 멍하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들리지 않는 걸까. 군터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목으로 소리를내지 않았다.
[할렌.]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던 몸뚱이가 움찔거렸다. 그것은 당황한 듯 머리를 휘휘 젓다가, 곧 누가 이 소리를 냈는지 알아차리곤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다 찢어진 목으로 억지로 짜내는 듯한, 듣기 거북한 목소리. 나짐과 모페이브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인상을 찡그렸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
여전히 멍청한 모습을 보이는 몸뚱이를 보며, 군터는 의식이 기대했던 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름."
몸뚱이는 고개를 숙인 채 몇 번이고 '이름'을 되뇌었다. 군터는 실망한 와중에도 일말의 기대를 놓지 않고 기다렸다.
[네가 누군지 떠올려라.]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 몸뚱이가 덜덜 떨었다. 그 모습이 마치 천둥소리에 움츠리는 아이 같았다.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기억을 회복하는 것은 육신을 움직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니까요."
나짐이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그러나 군터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지금 나짐이 하는 말은 그에게 변명처럼 들렸다.
기억을 회복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시간이 필요해?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은, 그거야말로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닌가.
[넌 누구지? 떠올려라.]
강한 의지가 다시 한번 몸뚱이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고통스러운 듯 몸을 움츠린 몸뚱이가 덜덜 떨었다.
[할렌.]
그러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떨림이 멈췄다. 볼품없이 움츠렸던 몸이 펴지고, 숙였던 고개가 들렸다.
"난…할…렌."
흐릿하던 눈에 빛이 돌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거북했으나, 더는 힘없이 늘어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확실히 힘이 실렸다.
"넌 할렌이냐?"
군터가 육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똑바로 선 몸뚱이가 다시 한번 군터를 보았다.
"예."
***
"머…리가……."
몸뚱이, 할렌은 자신을 자각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곧 두통을 호소했는데, 나짐은 그것이 육신에 영혼이 자리 잡는 과정일 거라고 얘기했다.
"추측일 뿐입니다. 저도 부활 의식은 처음인지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건가."
"예. 지금으로서는."
할렌은 일단 계속 지하에 두기로 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할렌을 무턱대고 밖으로 데려갔다가는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지금의 할렌에게는 조용한 곳이 필요할 듯했기 때문이다.
"저희가 주의 깊게 살피겠습니다."
군터는 할렌의 일을 모페이브와 나짐에게 맡겼다. 지금 솔롬은 한창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성주인 그가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그를 곁에서 따르는 수하들은 모두 그의 심복들이었으나, 할렌에 관한 일은 그들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의 일을 알고 있는 이는 극소수였다.
"어떻게 됐습니까?"
살라스는 그 극소수 중 하나였다. 의식에 필요한 재료를 조달해오는 일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졌다.
"성공했다. 반쯤은."
성공했다는 말에 반색하던 살라스가 뒤에 붙은 반쯤은 이라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군터가 더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고 느끼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