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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86화 (786/1,064)

786화

보리스는 솔롬이, 아니 판니른 자체가 낯설었다. 생전 처음 온 곳이니 당연했다. 데리브란에서 지내던 그에게 있어 하잘은 여러모로 부족한 도시였다. 나름 한 주의 주도라고는 하지만, 역시 테리브란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 규모든, 번화함이든.

그러나 그런 하잘보다도 더욱 부족한,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볼품없는 솔름을 처음 보았을 때, 보리스는 조금의 부족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에전 아내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곳이 솔롬.'

도시보다는 성에 가깝다. 계속 확장을 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예전의 모습을 다 벗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우리의 집.'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크렘보르 가문의 땅이다. 저곳에서 크렘보르는 왕이나 다름없다. 비유하자면 베이고르에 있었던 시절, 영주들의 영지와 같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부인하지 않으마."

실실거리는 로우렌에게 짤막하게 대꾸한 보리스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솔롬의 성벽을 눈에 담았다.

***

"여보."

"그간 잘 지냈소?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니 더 기쁘군."

솔롬에 도착하자마자 할 일에 대해 일찍부터 생각해놓았던 보리스였지만, 그렇게 세워놓은 계획들이 지금은 뒷전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본 아내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보통 귀족들은 그들의 거추장스러운 격식을 집안에서도 꽤 엄격히 지키곤 했지만, 보리스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는 애정표현에 적극적이었다. 다른 귀족들이 본다면 귀족으로서의 자각이 없다고 혀를 찰 만큼, 그런 보리스의 모습에 라일라도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적응했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을 꺼리는 아내는 드물고, 라일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냈소? 당신의 눈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곳이겠지만……."

"부족한 게 있다면 허영과 사치뿐이겠죠. 제 눈에 이곳은 충분히 좋아 보여요."

진심이든, 아니면 자신을 위한 말이든, 아내의 그런 말은 보리스를 기쁘게 해주었다. 보리스는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함께 정원을 걸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부부는 그간 밀렸던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보리스가 말하고, 라일라가 추임새를 넣는 식이었다. 보통 귀족 여인이라면 달갑지 않겠지만, 무가의 여식인 라일라는 전쟁 이야기에 별 거부감이 없었다.

"어려운 승리였소. 쥬드 포트락의 아들답더군. 단순히 아버지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자는 아니었던 거지."

"……위험했군요."

"음?"

아내의 앞에서 신나게 무용담을 늘어놓던 보리스는 어느새 굳어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아차 싶었다. 적당히 하고 넘겼어야 했는데, 너무 구체적으로 늘어놓고 말았다.

"놀러 간 건 아니었으니까."

"당신은 크렘보르의 후계자예요. 전공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본인의 위치를 좀 더 떠올려야 하지 않겠어요?"

"물려받은 이름에는 가치가 없소. 난 나를 증명해야 했고, 그렇게 했을 뿐이오."

보리스가 잔소리를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라일라는 작게 한숨을 쉬고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눈치가 빨랐고, 현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똑똑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인은 사내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가씨의 일은 잘 처리됐어요."

"아까 보니 얼굴에 그늘은 없더군. 잘 받아들이던가?"

"뜨내기 음유시인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거야 흔한 일이죠. 며칠 정도는 상심하신 것 같았지만, 그 이후엔 금방 털어버리고 괜찮아지셨어요."

"다행이군."

보리스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가문을 위해서라지만, 동생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것도 동생이 모르게 몰래 벌인 일이었으니 마음이 더 불편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리스는 그렇게 자위하며 시선을 돌렸다.

라일라가 가꿨다는 정원은 테리브란의 저택에 있던 정원과 흡사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취향을 잔뜩 반영한 모양이었다.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많이 무료할 거요.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은 곳이니까."

말을 하다 새삼 든 미안함에, 보리스는 말끝을 흐렸다.

"당신은 데리브란에 남는 게 좋았을 수도……."

"그런 말씀 마세요. 가족은 내팽개치고 무도회장이나 기웃거리라는 말인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그런 말씀은 마세요."

"알겠소."

현명할 뿐만 아니라 강단도 있는 아내가 더 사랑스러워 보여, 보리스는 그녀를 꼭 안았다. 뒤따르는 시종들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

솔롬의 분위기는 좋았다. 잔뜩 수가 줄어 돌아온 병사들 때문에 잠깐 우중충한 분위기가 돌기도 했으나, 군터가 포상금을 풀면서 그런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늘 그랬듯, 군터는 베푸는 데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조정으로부터 받은 보화의 상당수를 수하들과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멀쩡히 전장에서 버티고 있는 그를 억지로 끌어낸 만큼, 조정은 그에게 섭섭지 않을 만큼 크게 보상해주었다. 이 말인즉, 솔롬의 장졸들이 받은 포상도 전에 없이 컸다는 뜻이다.

눈앞에 놓인 금이 지나간 슬픔을 덮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솔롬에 적잖이 돈이 풀렸다는 소식을 들은 대상들이 온갖 물건을 가지고 솔롬을 찾았고, 덕분에 축제 아닌 축제가 열렸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겠구만.'

로우렌은 성문 밖까지 이어진 장사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단순히 머릿수 때문이 아니라, 밀집도에 놀란 것이었다.

'확장을 거듭하는 이유가 있었군.'

판니른의 치안이 바로잡히기 전의 혼란스러웠던 시기, 그리고 일전에 아바시스의 병력이 북상했을 당시의 난리로 인해 솔롬으로 난민들이 몰려들었다고 하더니, 확실히 솔롬의 인구는 과잉상태인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 확장하고 있는 성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쁘지 않지.'

인구는 곧 힘이다. 구분은 없다. 나라든, 도시든, 마을이든 마찬가지다. 물론 일없이 빈둥대는 머릿수는 골칫거리지만, 솔롬은 그런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인근에 비어있는 땅도 적지 않았고, 여차하면 이전의 길(?)을 이어받아 군사도시로 거듭나도 된다. 성주부터가 성주 겸 주 방위 군단장 아니던가. 게다가 총독과도 사이가 돈독하니, 마음만 먹는다면 주 예산을 따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여기 있었느냐."

로우렌은 등 뒤에서 들리는 형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음?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이겠느냐. 공자가 찾으신다."

"흐음. 무슨 일인지 들으셨소?"

"글쎄, 연회에 관련한 일이겠지."

"하긴."

보리스는 젊은 관리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기로 했다. 그동안 성주의 아들로서 그의 이름만 들어보았을 이들에게 직접 얼굴도 비추고, 쓸만한 이들과 교분을 쌓기 위함이었다. 이는 로우렌이 권한 일이 아니었다. 보리스 본인이 구상하고 추진하는 일이었다.

"우리 공자께서는 참 바쁘시단 말이지. 이전에는 그리 느릿하시더니, 한번 마음을 먹고 나니 이쪽에서 따라가기가 버거울 지경이야. 그렇지 않소?"

"신중하면서 동시에 결단력을 갖추신 게지. 사람을 이끄는 데 있어 이상적인 덕목이 아니냐."

"그렇다고 쳐도, 근래에 보여주시는 모습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오. 뭐, 윗사람이 부지런하면 우리 같은 아랫것들은 다소 괴로울지라도…어쨌거나 좋은 일이지."

형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던 로우렌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곳의 가장 높으신 분께서는 어째 살아 계시다는 이야기 외에는 들리는 게 없는지 모르겠소."

***

솔롬을 찾은 대상들로 인해 성 전체가 떠들썩한 그때, 군터는 음습하고 적막한 지하실에서 두 술사와 함께하고 있었다.

군터는 나짐. 그리고 모페이브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나짐이바라던 실마리와 함께 헤이모라에서 바로 엊그제 돌아왔다. 하루 동안 여독을 푼 그는 아직 디 풀리지 않은 피로를 눈 밑에 드러내고 있었다.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이것이 찾고 있던 답까지 인도해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모페이브는 헤이모라의 지하 미궁에 숨어있던, 혹은 갇혀 있던 고대인들이 영혼을 다루는 데 능숙했던 것을 떠올렸다. 비록 불완전했다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오랜 세월을 넘어 현시대까지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영혼 상태로 말이다.

"봉인의 힘도 작용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사실 봉인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지요. 그들의 영혼이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영혼이 버팀목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영혼 감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나짐의 물음에 모페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군터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에게 영혼 감옥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집이며 보루였지요."

"지금 내가 사용하는 방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모페이브는 비유하자면, 지금 군터가 영혼 감옥을 사용하는 방식은 작은 창고와 비슷하다고 했다. 안에 무언가를 담고, 필요할 때 꺼내어 쓰는.

그러나 고대인들은 영혼 감옥을 그보다 조금 더 유용하게 사용했다. 비유하자면 작은 성 정도일까? 비바람을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지키는 수단.

"이미 죽어 영혼만 남은 존재를 완전한 별개의 개체로 부활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 대신, 영혼 감옥을 지지대로 삼아 이미 쓰러진 영혼을 일으켜 세울 수는 있을 것입니다."

군터는 완전한 부활과, 모페이브가 말하는 '불완전한 부활'이 어떻게 다른지 물었다.

"영혼 감옥에 의존한 부활입니다. 영혼 감옥에 깃든 영혼이 어떤 식으로든 충격을 받게 되면, 육신에 깃들어있는 영혼도 충격을 받습니다. 또한, 육신에 깃든 영혼은 영혼 감옥으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질 수 없을 겁니다."

더 있다는 듯 계속 말을 이으려는 모페이브를 군터가 제지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했다. 모페이브가 말하는 것은 그의 말처럼, 불완전한 부활이었다. 군터가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실망스러웠지만, 이마저도 두 술사가 최선을 다한 결과임을 알았다. 여기서 시간과 노력을 더 붓는다고 해도 더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거라는 것도.

그러므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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