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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85화 (785/1,064)

785화

"장군, 보리스 공자가 몰던과 접촉한 것 같습니다."

군터가 좀 더 말해보라는 듯 눈길을 주자, 토어릭이 조금 더 뚜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할렌의 아들 로우렌이 비오르 몰던과 만났습니다. 그 녀석이 혼자 움직였을 리 없으니, 보리스 공자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

"어찌할까요?"

"벌해야 한다고 보느냐?"

"장군께 아무런 말도 없이 움직였으니, 이전처럼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하다."

"예?"

"연기는 집어치워라. 처벌하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토어릭의 굳은 얼굴이 풀어지고, 멋찍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군터가 혹 노할까 싶어, 본인이 먼저 처벌을 주장한 것이었다. 혹 보리스에게 향할지도 모르는 분노를 최대한 누그러뜨려 놓기 위해서.

"허튼짓만 하지 않는다면, 녀석이 누구를 만나는 상관없다."

보리스가 어딜 가는지, 누굴 만나는지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녀석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녀석이 왜 몰던과 접촉했다고 보지?"

"보리스 공자는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고 싶어합니다. 그 일환이었겠지요."

"더 자세히."

"몰던은 판나른의 손꼽히는 가문 중 하나입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판니른 전제에 미친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크지요. 지금 하잘에는 몰던 가주의 동생이 와 있지 않습니까? 신분만으로 보자면, 총독이 자리를 비운 지금 하잘에서 제일 고귀하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만 봐도, 보리스 공자가 그에게 접촉한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토어릭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듣자 하니, 해들리르의 후계 다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들리르의 후계 다툼은 군터가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솔롬을 떠나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니. 참 지독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몰던이 참 지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들리르의 분란은 몰던이 조장한 것. 그리고 그 분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그 또한 십중팔구 몰던의 뜻에 의한 것일 터. 그들은 해들리르를 최대한 망가뜨리기로, 아니 아예 없애버리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들 가문 간에 오래된 원한이 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이 정도로 독하게 나가는 것을 보니 참 지독하다 싶었다. 물론 오직 원한 때문에 저리 독하게 구는 것은 아닐 테지만…….

"해들리르의 분란에 개입하려는 것이 아닐지요."

"다 끝난 싸움 아니던가?"

해들리르의 후계 다툼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그 말을 방금 들었으니, 다 끝난 싸움이라는 말은 해들리르의 두 얼간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 터. 토어릭은 군터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물론 다 끝난 싸움입니다. 몰던이 마음만 먹는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해들리르를 무너뜨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뒷감당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해들리르가 비록 현재에 이르러 세가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그들 역시 판니른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명문 가문입니다. 그들의 저력은 몰던으로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지요."

그것이 몰던이 시간을 충분히 들여가며 해들리르를 무너뜨리고 있는 이유다. 해치우는 것은 손쉬워도, 그 후가 문제인 것이다.

"뒷감당은 나눌 사람이 많을수록 편해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몰던이 동맹을 모으고 있는 게 하루 이들이 아니랍니다."

"녀석이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군."

"예. 조만간 공자가 장군을 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못마땅했다. 토어릭의 예상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아들 녀석이 성가신 일을 벌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장군, 소관이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뭐냐."

"그,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보리스 공자가 일을 벌이는 데 사심이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그 기저에는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고 싶다는 열망이 있을 겁니다."

"…유념하도록 하지."

***

군터는 보리스가 곧 자신을 찾아오리라 예상했지만, 하잘을 떠나 솔롬에 당도할 때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토어릭으로부터의 신경 쓰이는 보고도 없었다. 군터는 보리스가 신중하게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런 인상은 그의 못마땅함을 상당 부분 누그러뜨렸다.

"장군."

솔롬의 성벽이 보일 즈음, 살라스가 병사들과 함께 마중을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그였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충직한 태도나, 외관이나.

"정말 그대로십니다. 저희는 이렇게 폭삭 늙어버렸는데 말입니다."

토어릭이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토어릭이나 아드리안 등 이번에 군터와 함께 전장에 다녀온 이들은 세월을 두세 배로 맞은 것처럼 얼굴에 주름이 져 있었다. 그런데 살라스는 아무리 솔롬에서 편안히 시간을 보냈다 해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과장 좀 보태서 말하자면, 그는 아직도 20대 젊은이처럼 보였다. 얼굴에 흉터는 있을지언정 주름도 없었으니, 진중하게 가라앉은 눈과 분위기만 아니었다면 20대라고 해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고생 많았다."

"장군이나, 장군을 모신 이들에 비하면 고생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홀로 편안히 잠자리에 들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알고 있겠지만, 내 빈 자리를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었다."

살라스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신뢰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때문에 홀로 몸이 녹슬어간다는 것은 그와 같은 무관에게는 씁쓸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라스는 그간 솔롬과 인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했다. 비교적 굵직한 사안들은 군터가 전장에 나가있는 동안에도 서신을 통해 다달이 보고했었지만, 그래도 직접 보고하는 것은 또 달랐다. 그리고 그중에는, 다른 이들이 들어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도 몇 있었다.

"명하신 대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들인 공에 비해 충분한 성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연회장에서 한바탕 회포를 푼 뒤, 군터는 집무실에서 살라스에게 보고를 받았다. 나짐에 관한 건이었다.

군터는 일찍이 살라스에게 나짐이 필요로 하는 것은 뭐든 지원해주라고 명령을 내렸었고, 살라스는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거기에 산양 일흔 다섯 마리, 죄수 서른 일곱이 들어갔습니다. 뒤처리는 깔끔하게 했지만, 이대로라면 이런저런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힘들 겁니다."

짐승이야 그렇다 쳐도 죄수가 문제였다. 아무리 죽을 날만 기다리는 죄수라고 해도, 따져나가는 수가 계속 늘면 의심하는 자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살라스는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 나짐이라는 자. 처음에는 자신만만해 보였습니다만, 갈수록 말이 줄어들더군요. 술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소관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맞나 싶습니다만, 솔직히 그자가 제 몫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나짐을 불러라."

"예."

잠시 후, 군터는 나짐과 독대했다.

"장군. 송구합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장군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나짐은 군터를 보자마자 대뜸 넙죽 엎드리며 죄를 칭했다. 군터는 그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에 땅에 닿은 그의 머리, 정확히는 정수리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뭐가 문제지? 이전에 받았던 보고에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지요. 그랬습니다. 그때는 저도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었습니다. 설마 마지막 한 단계에서 이렇게 발목을 잡힐 줄은 저도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마지막 한 단계?"

"예. 그것이…"

나짐은 계속 머리를 바닥에 박은 채로 구구절절하게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혼을 담는 그릇은 진즉 완성한 상태였다. 다만 문제는 영속성이었다.

"되살리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되살린 혼이 다시 한 번 죽음을 맞을 경우, 그 대안이 없습니다. 인간이 본래 타고나는 육신과 달리, 새로 만든 그릇은 영혼과의 연결고리가 옅습니다. 다시 한 번 죽음을 맞이하거나, 기능을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 그 안에 깃든 영혼은 순식간에 흩어져버리고 말 겁니다. 그것은 장군께서 바라신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살라스의 생각과는 달랐다. 나짐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능했다. 그는 군터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제일 간단한 것은 망가지지 않는 그릇을 마련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망가지지 않는 게 있던가? 단단한 쇠나 돌덩이도 언젠가, 어떻게든 본래의 형태를 잃고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나짐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저 멀리로 치워버렸다.

"완전무결한 그릇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영혼을 보존하는 쪽으로 생각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이미 한 번 육신을 잃고 끈이 끊어진 영혼이기에, 또 한 번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영혼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장군께서 인위적으로 영혼을 묶어두신다고 해도 말이지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래서 생각하고 있는 방도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얼마 전에 헤이모라에 계시는 모페이브님으로부터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로부터 아주 작은 희망을 발견했지요."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나짐 본인부터 자신이 없어보였다. 본인의 입으로 아주 작은 희망이라고 하지 않는가.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좋다. 제물이 얼마가 더 들어가도 좋고. 그러니 너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네 할 일을 해라."

"장군의 너그러움에 감사할 뿐입니다."

술사가 무조건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연구에 매진하기는 쉽지 않다.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술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령술사인 나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반드시, 반드시 방도를 찾겠습니다."

부담을 덜은 나짐은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절대 이 자비로운 고용주를 실망시키지 않겠노라고, 그건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지원해주는 고용주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고, 끝내 그를 실망시켰을 때 돌아올 진노를 피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지금은 이렇게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나짐은 군터 크렘보르라는 자가 결코 자비롭기만 한 호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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