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784화 (784/1,064)

784화

"장군. 어찌 생각하십니까?"

"음?"

"황자의 군대 말입니다. 일단 그림을 괜찮게 만들어졌다지만, 눈에 보이는 실적은 없잖습니까. 뭐라도 하려 할 텐데, 괜찮을까요?""

아드리안만이 아니라, 다른 수하들 역시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떠나는 마당에 그게 왜 궁금할까 싶었지만, 그래도 답은 해줄까 싶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괜찮을 거다."

키파를 떠나기 전, 황자의 밀사가 그를 찾아왔다. 밀사라 하면 드러나서는 안 되는 말을 은밀히 전달하는, 껄끄러운 존재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군터는 가면을 쓴 밀사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황자의 전언을 전하기에는 누구보다 적합한 인물이었다.

"카자쿠."

황자의 호위, 언제나 황자의 곁을 지키던 검은 피부의 무관.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심지어 그 얼굴마저 가면에 가려 있었지만, 군터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전과 달라졌음도 단번에 알아보았다.

"변했군."

"단번에 알아보는군."

카자쿠가 가면을 벗었다.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으나, 그가 놀란다는 것이 군더는 더 놀라웠다. 설마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한 걸까? 얼굴 가죽만 가렸다고 해서?

"변했다는 건 알겠지만…뭐지?"

"전하께서 군주 줄카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래."

"용아에 대해 알고 있나?"

"……."

거기까지 들었을 때, 군터는 카자쿠에게서 낯섦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검은 피부의 호위 무관은, 얼마 전 헤이모라에서 마주하고 겨뤘던 카니악이라는 자와 비슷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아는 모양이군."

"직접 본 적도 있지."

"자네가 헤이모라에서 줄카와 접촉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어쨌든, 그렇다면 이야기하기가 쉽겠군."

카자쿠는 이어지는 말로, 군터의 추측이 맞았노라고 인정했다.

"용의 피를 마셨네. 용아와 비슷해졌지. 같은 게 아니라 비슷해졌다고 한 것은, 우리는 줄카와 계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야."

"계약? 그보다 우리라고?"

"그래. 나 혼자만이 아니네.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자들이 나와 같은 힘을 얻었지."

군터는 카자쿠의 붉은 기가 감도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카자쿠의 모습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젊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황자도 믿는 구석이 있었군."

"전하에 대한 충성심이 크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 적어도 내 앞에서는."

황자에 대한 굳건한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군터는 그 도전적인 말을 그냥 듣고 넘길 수가 없었다. 순간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그는 평소 습관처럼 억누르고 있던 기세를 풀어놓았다. 동시에 무심하게 가라앉아있던 눈에 노기가 차올랐다.

"너야말로 조심해라. 난 네가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따위에는 관심 없다. 난 황자에게 충성하지 않아. 그와 협력하지만,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러니 네 고집을 내게 강요하려 들지 마라. 새로 얻은 두 눈을 뽑히고 싶지 않다면."

카자쿠의 붉은 눈에도 분노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살짝 움찔했을 뿐, 더 나서지는 못했다. 황자에게 받은 명령도 명령이었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디뎠다가는 목이 무사치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이 변했군."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괴물.

카자쿠는 자신의 주인이 이따금 군터 크렘보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늘 그가 또 다른 괴물이 되어버릴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던 것을 떠올렸다. 말이 가능성이지, 돌이켜보면 황자는 늘 확신하고 있었다. 군터 크렘보르는 언젠가 괴물이 된다. 문제는 그게 언제나는 것일 뿐.

'전하. 이 자는…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군인으로서, 무인으로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을 느꼈던 사내는 이제 없다. 남은 것은 사람의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는, 눈을 마주하기만 해도 위축되는 괴물뿐.

'하지만…이제는 나도 마찬가지지.'

황자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선택권을 주었으며, 받아들인 것은 카자쿠 본인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시들어가던 몸이 다시 활력을 찾았고, 이전보다 더 강한 힘을 얻었다. 언제든 전장의 한복판으로 말을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언젠가부터 마음을 좀먹던 상실감은 씻은 듯 사라졌다.

'언젠가,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그가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 황자가 내뱉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언젠가. 그래.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당분간 전쟁은 소강상태에 돌입하게 될 거다. 하지만 당분간일 뿐이야. 네 휴식은 그리 길지 않을 거다."

"지금까지 황자를 위해 싸웠다.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 훌륭했지."

"그걸로는 부족한가?"

"아니. 충분하다. 내 생각이 아니라, 전하께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준비하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다."

"준비?"

"그래. 전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

"……."

카자쿠는 말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쯤은 그에게도 쉬운 일이었다.

"말했듯, 소강상태는 오래 가지 않을 거다. 그리고 잠깐의 고요함이 지나면, 그때부터는 이전보다 더크게 소란이 일 거고. 그때의 소란은 지금처럼 양주로 국한되지 않는다."

"다른 쪽에서 치고 들어올 수 있다. 이건가?"

"이미 한 번 그런 적이 있지 않나."

아바시스를 말함인가. 군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인들이 잊고 있는 듯하지만, 이 전쟁은 전하와 바라눔의 2파전이 아니다. 저 아래에 있는 변절자도 그렇고, 아직 몸을 숨기고 있는 비열한 자들도 있지."

"성가신 이야기군."

"조언을 전하기 위해서 온 거다. 준비해라. 전하가 아니라, 너 자신과 네 가문을 위해서."

***

카자쿠는 당분간이라고 했지만, 말이 당분간이지 그게 얼마나 될지 어찌 안단 말인가.

하지만 경고 겸 조언을 듣고서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솔롬으로 돌아가면 일단 할 수 있는 준비는 할 생각이었다.

우습지 않은가. 조정의 욕심 큰 귀족들이 핑곗거리로 써먹은 주제가 현실로 이루어지다니.

"장군. 곧 있으면 하잘에 당도합니다."

아드리안의 우렁찬 목소리가 군터의 상념을 깼다. 군터는 굳이 하잘을 거쳐 가는 이유를 떠올렸다.

"하잘의 시민들도 장군의 활약상을 전해 들었습니다. 시장이 눈치가 빠르다면, 화려한 개선식을 준비했을지도 모르지요."

일종의 선전이었다. 굳이 그런 것이 필요한가 싶었으나, 토어릭은 이것이 단순한 영향력 행사가 아니라 그들이 승전군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만약 그러지 않을 경우, 괜한 소문이 퍼질 수도 있을 거라면서.

토어릭의 그런 주장은 힘을 얻었다. 누구라도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는 무대를 꺼리지는 않는 법이다. 하물며 그러지 않으면 괜한 소문이 퍼질 거라는데, 왜 마다하겠는가.

"현재 하잘의 시장을 맡고 있는 자는 운바소르 아실이라고 합니다. 장군께서도 아시겠지만, 그자는 총독의 심복으로 유명하지요."

토어릭은 혹 군터가 기억하지 못할까 싶어 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총독이 자신의 대리를 맡길 정도이니, 그런 자가 어리석게 굴지는 않을 거라고도 했다.

와아아!!

토어릭의 말대로였다.

하잘의 시장, 운바로스 아실은 성문 앞까지 나와 군터를 맞이했다. 활짝 열린 성문 너머, 대로의 양옆으로 빼곡하게 선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군터와 그의 병사들을 향해 목청껏 환호했다.

"장군께서 전장에서 쌓으신 명성이 이 판니른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거창한 환영 인사로군."

"제국의 적들과 피땀흘려 싸운 장병들을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환영입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타박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이런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군터는 이런 것이 병사들에게 이래저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운바소르 아실의 입발린 말에도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

"근사하군."

"근사하지요. 저 중에는 분명 공자의 명성을 들은 자들도 있을 겁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이름은 '군터 크렘보르'뿐이었지만, 로우렌은 사근거리는 투로 보리스에게 아첨했다. 보리스는 그것이 아첨임을 알았지만, 듣기에 썩 나쁘지 않아 그저 엽게 웃기만 했다.

"현재 하잘에 몰던 가의 주요 인사가 와 있다고 합니다."

로우렌이 작게 속삭였다. 동시에 보리스의 입가에 걸려 있던 옅은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그게 누구지?"

"비오르 몰던입니다. 현 가주인 뮬리츠 몰던의 동생이지요."

"몰던의 현 가주는 제 형제들을 모두 죽여 없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요. 그런데 비오르 몰던은 예외입니다. 유일한 예외지요. 그는 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거세했습니다. 후사를 남길 수 없으니 가주가 될 수도 없지요. 그는 물건을 잃었지만, 비정한 형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자가 지금 하잘에 와 있다고?"

"하잘은 판니른의 중심 아닙니까. 몰던 외에도 여러 가문의 주요 인사들이 이 도시에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래서? 그와 접촉하자는 건가?"

"허락하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비오르 몰던에 대해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로우렌의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그가 만만찮은 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자에게 접촉한다는 것은 보리스에게도 상당히 긴장되는 일이었다. 전장이라면 목을 베면 그만이지만, 그게 아니잖은가. 정치적인 싸움은 보리스에게 상당히 낯설고, 두려운 것이었다.

"그리 해라."

"예. 그럼 곧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보리스의 허락에 로우렌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하잘에 머무는 것은 사흘, 그는 그 사흘 안에 일을 마칠 작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