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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83화 (783/1,064)

783화

군터는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그의 휘하 병력과 함께 솔롬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말하는 휘하 병력이란 그가 솔롬에서부터 이끌고 온 병사들을 의미했다. 판니른의 병력은 철군이 허락되지 않았다. 군터가 판니른의 주 방위군단장이기는 하지만 이런 전시에 주의 방위 병력을 사병 부리듯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거느리고 돌아갈 수 있게 허락된 것은 그가 솔롬의 성주로서 거느린 솔롬의 병력뿐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그의 수하 몇몇은 불만스러워했지만, 군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판니른 총독이 비록 조금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전선에 머물고 있는데, 판니른의 병력이 뭉텅이로 돌아간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조정에서 손을 쓴 쓴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 정도라면 그럭저럭 받아 넘길만했다.

"돌아간다."

철군 준비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났다.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은 환호를 지르며 키파의 성문을 나섰다. 비록 끝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으나, 그들은 승전군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깃발과, 자신들이 이룩한 승리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사지 멀쩡하게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적어도 병사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승리였다.

"떠들썩하군요."

로우렌이 혀를 차자, 바로 앞에서 말을 몰던 보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어찌 안 그러겠느냐? 이들에게 황좌니 뭐니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멀쩡하게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들에게는 황좌보다 더 값진 전리품일 거다."

"하하. 어찌 그리 병사들의 마음을 잘 아십니까?"

"어렸을 적, 내가 말단 장교로 병사들과 부대꼈던 것을 모르느냐?"

"저도 같은 경험을 했었습니다만."

"그때 너는 철이 없었지. 어떻게 하면 더 편하게 농땡이를 부릴 수 있을까만 궁리하지 않았더냐."

"…뭐, 부인할 수 없군요."

"이제 와 하는 말이다만, 그때는 너도 그렇고 그라모트도 그렇고,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지금은 이렇게 너희에게 큰 도움을 받고 있으니, 사람의 앞일은 모르는 거다 싶구나."

"비단 사람뿐이겠습니까. 앞일을 아는 자는 없습니다. 어렴풋이 짐작이나 하는 자들은 있을지 몰라도."

잠시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보던 로우렌이 다시 입을 뗐다.

"솔롬으로 돌아가시게 되면, 그때부터는 정말 쉴 틈이 없으실 겁니다."

"그래."

테리브란에서 볼모(자극적인 표현이지만 로우렌은 이 표현을 고수했고, 보리스도 부정하지 않았다)로 지내던 시절은 끝났다. 크렘보르 가문은 솔롬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고, 황자도 크렘보르의 혈육들이 테리브란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솔롬은 크렘보르 가문의 기반입니다. 공자님은 그곳에서도 키파에서 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활약하셔야 합니다."

"비단 내 이름값을 올리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군터의 입에서 철군하고자 한다는 말이 흘러나온 순간, 그러니까 사실상 철군이 결정된 그 순간부터 보리스는 솔름으로 돌아간 이후를 생각했다. 로우렌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보리스는 자신이 크렘보르의 후계자로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로우렌은 그런 보리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적절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중에는 자잘한 것도 있었고, 중대한 것도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해들리르의 가내 암투는 이미 막장으로 치달은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외적의 존재 때문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외적이란 몰던 가문이었다. 보리스는 이미 해들리르의 후계 다툼에 몰던이 깊숙이 관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습군."

몰던 때문에 막장으로 치달았지만, 거꾸로 몰던 때문에 아직도 마지막 한 발자국까지 내딛지는 않은 재 버티고 있다.

"당장 급해서 손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저들이라고 다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몰딘이 자신들을 이용해 해들리르를 망칠 의도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겠지요."

"그럼에도 거절할 수 없었다는 건가."

"내가 있고 가문이 있는 것이지, 가문이 있고 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겠지요.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있는 일 아닙니까."

대부분의 귀족은 가문에 목숨처럼 여기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과 가문이 나란히 저울에 오른다면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운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해들리르의 머저리들이 공자님의 기회가 될 겁니다."

지금이야 가문의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는 판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해들리르라는 이름값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대로 판니른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명문 귀족 가문이었으니까. 아무리 상처투성이가 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저력이 있다. 다만 지금은 머리가 두 개가 되어버려 상처투성이가 된 몸뚱이가 어찌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뿐.

"급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다. 이번 일은 성과는 좋았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어."

"현명하십니다."

이번에 거짓(혹은 과장된) 소문을 퍼뜨린 일로, 보리스는 젊은 군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반면 경력이 오래된 무장들이나 상급 장교들은감히 '장군'의 권위에 대든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가 '장군' 의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이니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리스는 그들의 오해를 사고픈 마음은 없었다. 한번 날뛰었으니, 당분간은 자중하면서 그들의 신뢰를 회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리 길게 잡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장군의 권위에 반하는 일도 아니고, 오히려 크렘보르의 이름을 드높일 기회가 될 테니까요.."

"두고 보도록 하지.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 게 사람 아니더냐. 솔롬에 당도할 때까지 아직 시간이많이 남았고, 당도한 후에 다시 움직일 때까지 시간은 더 많이 남았으니, 그때까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냐."

"옳은 말씀입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의견에 제동이 걸린 것인데도, 로우렌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많이 진중해지셨군.'

진언하는 대로 다 따라주는 상관은 좋긴 하지만 재미가 없다. 그게 얼마든지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꼭두각시와 다를 게 무엇인가.

'궁리하고 궁리하십시오. 그래봐야 답은 매한가지겠지만.'

신중하게 움직이겠다고 하지만, 로우렌은 보리스가 결국 해들리르를 이용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는 해들리르의 머저리들이 아니라,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진정한 적수를 떠올렸다.

'몰던이라.'

해들리르의 머저리들이야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이용하기 딱 좋은 말에 불과하지만 몰던은 다르다. 그들에게는 오랜 시간을 들여 정적을 도모할 정도의 머리와 독심이 있다. 절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물론, 꼭 그들을 적대할 필요는 없다.

'되도록 피를 보지 않고 좋게 가는 것이 최선이기는 하지.'

아마 이쪽이 과하게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몰던에서도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왜냐하면, 로우렌은 해들리르를 흔든 것이 몰던의 단독 소행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독은 무조건 관여, 내지는 방관했다. 크렘보르 장군 역시 비슷하겠지.'

직접 정계에 얼굴을 보이고 다니지는 않지만,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을 얕잡아보는 이는 하나도 없다. 적어도 판니른에는 전무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가 솔롬에 부임하고 대대적으로 사열식을 진행했을 때부터, 판니른의 실력자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물리츠 몰던은 냉혹하고, 무엇보다 철두철미한 자다. 해들리르는 손을 댈 필요와 기회가 겹쳤기에 도모했을 테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적을 만드는 자가 아니야. 움직여야 한다면 최대한 신중하게, 최대한 유리하게 상황을 만든 후에 움직일 자란 말이지. 그런 자가 해들리르를 도모하기 전에 최대한 손을 뻗었을 가능성은 충분해.'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해 불과하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이렇게 머리 아프게 추측에 매달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

'방법이없나? 공자에게 부탁해서…아니야.토어릭은 공사의 구분이 분명한 자다. 안 그래도 나를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은데, 여기서 더 나냈다가는 정말 찍힐지도 모르지. 그런 고달픈 상황은 피해야 해.'

할렌의 아들이라는 점,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보리스와 어울려 온 사이라는 점 때문에 지금까지 아무런 일 없이 있을 수 있었던 거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 어두운 밤에 수인병들의 손에 붙들려 어디론가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로우렌은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했다. 그는 지금으로서는 보리스 크렘보르의 뒤에서 후광을 누리고 있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하다못해 그의 형처럼 그럴듯한 전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그저 보리스의 옆에서 꾀주머니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공자만이 아니야. 솔롬에 당도한 후에는 나도 움직여야 한다.'

보리스 크렘보르의 심복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공식적인, 구체적으로는 누가 봐도 그럴듯한 직함이 필요하다. 남들이 뒤에서 수군대지 않을 정도의.

이런저런 생각과 계획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로우렌은 하늘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들을 눈에 담았다.

***

"허억…허억……."

사내는 달리고 걷기를 반복했다. 벌써 사흘째 사람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등 뒤에 따라붙는 시선을 느꼈다. 그것이 정말 시선인지, 아니면 단순한 착각인지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불안했고, 두려웠다. 그것이 그가 입에서 단내를 풍기면서도 계속해서 발을 움직이는 이유였다.

그는 계속 이동했다. 처음에 그는 황도에서 멀어질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다고 생각했지만, 중간중간 들른 마을과 도시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방향을 정했다.

'북쪽.'

자콥과 바라눔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했다. 그 대전쟁의 승자가 황좌의 주인이 될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습기 짝이 없으며, 화가 나기도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벌이고 있는 발칙한 전쟁이 사내의 희망이었다. 전쟁중인 둘의 영역 내로 들어간다면 추적자들도 더는 함부로 쫓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으으."

무거운 다리를 계속해서 움직였다. 사내는 그렇게 계속 북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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