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2화
군터는 죄를 청하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보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다. 아주 어렸을 적, 벨리사가 감싸주지 못할 정도로 심한 사고를 친 후에 얼굴이 붉어져서 용서를 빌던 때 이후로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오늘은 아버님께 어려운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말해라."
***
무겁다.
말하라는 한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어깨에 묵직한 쇳덩이가 올라온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조용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를 벗어나고픈 마음이 불쑥 들었다.
'무리도 아니지.'
갑작스레 겁쟁이가 되었는가? 만약 지금 그의 심정을 다른 이들이 엿볼 수 있다면 분명 비웃을 테지만, 보리스는 그런 비웃음에 오히려 거꾸로 비웃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른다. 아니, 세상 사람 모두가 모른다. 군터 크렘보르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그의 모습을 보며 살아온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자신을 낳아준 아비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 앞에 서면 위축된다. 오히려 핏줄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감에 더욱 주눅 들게 된다. 특별히 엄한 아버지는 아니었으나, 저 가라앉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할 말을 삼키게 된다.
"이번 철군 건으로 불만을 품은 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저는, 그들을 품어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리 해라."
"…예?"
허락을 구하러 왔으니 기뻐하면 그만일 텐데, 생각보다 너무도 쉽게 '그리 해라'라는 말이 나오자 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부친은 여전히, 표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하라고 했다."
"보여주기라고 해도, 제가 아버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꼴이 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말대로 보여주기에 불과하지 않으냐."
"그렇지만……."
"네가 부탁했고, 나는 그것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것이 불만족스러우냐?"
"아, 아닙니다. 저는 단지."
"그럼 됐다. 할 말은 그게 전부냐?"
보리스는 얼떨떨한 기분을 표정에 드러낸 재 집무실을 나섰다. 방문을 닫고 한참 동안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그는 후련한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해냈다.
'그래. 해냈다.'
이야기를 나눈 것은 잠깐이었지만, 보리스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무언가를 이뤄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약간의 가능성, 그리고 가슴을 가득 채운 야심을 앞세워 실행하기는 했으나 사실 이번 일은 그에게 있어 큰 도전이었다.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지만, 아직도 실감이 되지 않지만, 어쨌든 해냈다.
보리스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수하들에게 허락을 구했음을 알렸다. 모두가 덩달아 기뻐하는 가운데, 로우렌만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도 곧 앞으로의 일을 열정적으로 논하기 시작했다.
***
아무렇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자신을 이용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군터는 즉시 불쾌함을 느꼈다. 만약 그 말을 한 것이 보리스가 아닌 다른 자였다면 즉시 손을 썼으리라. 만약 면식도 없는 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어쩌면 바로 목을 비틀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흔쾌히 허락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보리스에게 그리 하라고 답을 해주기 전에 군터는 속으로 적잖이 고민했다.
애초에 키파에서 물러나기로 한 이유가 무엇인가. 할렌에 대한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전쟁이 황도에 웅크리고 있는 노괴물의 손바닥 위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남의 손에 놀아나기 싫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위로 보지 않고, 얕잡아 보이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은 피를 이은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허락을 구하는 아들에게 단호히 말할 생각이었다. 허튼 짓거리는 집어치우고 철군 준비나 제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 생각을 입밖에 내기 전에, 고개 숙인 아들의 얼굴에서 또 다른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벨리사'
이제는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았지만, 이따금 되살아나곤 한다. 수북이 쌓인 먼지가 바람에 날려, 먼지 아래 숨어있던 것이 드러나듯이.
아마도 우연이었을 것이다. 매일 보는 아들에게서 매일 사별한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우연이 보리스에게는 행운이었다.
'자식이라.'
문득 떠올렸다. 자신이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변명하자면 아마도 아주 잠깐,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녀석들이 아닌가.'
세상에 단 둘뿐인 이유다. 그런데 녀석을 앞에 두고 자존심을 세우려 들다니.
속이 울렁거렸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군터는 그 기분이 썩 반가웠다. 이런 흔들림이, 불쾌함이 그가 아직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나를 이용하겠다고.'
이용뿐이랴, 살점을 뜯어가도 좋다. 그것이 부모 아니겠는가. 부모라면 응당 그러지 않겠는가.
가슴은 답하지 않았지만, 머리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군터의 허락을 구한 보리스는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한 일은 소문을 내는 것이었다.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게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할 일이었다. 거짓, 혹은 과장이 알려지게 된다면 인망 대신 비웃음을 사버릴 테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로우렌은 이런 일의 적임자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너무 느리지 않게 알음알음 소문을 퍼뜨렸다. 그 결과. 보리스가 군터의 집무실을 찾아가고 사흘이 지났을 때, 어지간한 자들은 모두 보리스 크렘보르가 부친의 철군 명령에 대놓고 거부감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그게 사실인가?"
"늘 장군께 고분고분했던 공자지만, 이번만큼은 납득이 되지 않았나 보군."
"그렇다고는 해도, 어찌 장군의 앞에서 감히……."
거창하게 항명한 것도 아니고, 그저 거부감을 드러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보리스의 이름은 여러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바삐 오갔다.
"재미있군."
과장 좀 보태서 도시 전체가 시끌벅적한 만큼, 당연히 프란시스 티브리악도 그 소식을 접했다.
"뜻밖이기는 합니다만, 이렇게까지 시끄러울 일인가 싶기는 합니다."
"크렘보르 장군의 이름값 때문이지."
혀를 차는 수하를 보며,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열게 웃었다.
보리스 크렘보르가 그의 무서운 부친에게 대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야심이 크구만 그래.'
보리스 크렘보르라는 사내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요즈음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꽤 놀라웠다.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것인지, 아니면 주변의 누군가가 부추긴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본인이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움직였을 리 없지.'
뭐든 똑같다. 충실한 군인 같았던 보리스 크렘보르가 본격적으로 귀족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나저나…이 정도면 발칙하다 여겨도 무방할 정도인데, 이걸 그냥 넘긴단 말인가?'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매번 만날 때마다 석상처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군터 크렘보르를 떠올렸다. 인간적인 면모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던 그에게도 부모의 마음은 있었던 것일까.
"그건 그렇고 장군, 슬슬 장군께서도 방향을 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야지."
군터 크렘보르는 좋은 그늘이었다.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도 않고, 무엇보다 군인으로서 능력이 출중했다.
그를 따르면서 거둔 승리와 전공이 적지 않으니, 지금까지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그 그늘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쪽도 슬슬 결정해야 한다.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일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만족하고 물러날 것인지.
"흐음."
문제를 눈앞까지 끌고 와서 처리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늘 미리 계산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만큼 고민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쪽이라도 좋다. 전공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쌓았고, 이 정도만 해도 후계자의 자리를 공고히 만들기에는 충분하니까. 다만,
'아쉽단 말이지.'
여기서부터는 욕심이다. 여기서 그가 바크렌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감히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그의 욕심 많은 형제들은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할 테고, 가문의 원로들 역시 그가 티브리악의 주인 자리를 이어받을 재목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티브리악의 주인.'
지금까지 하루도 잊은 적 없는 목표다. 바크렌을 떠나온 이후, 종종 가주의 자리에 오른 자신의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걸로 만족하나?'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자문했다.
그의 마음속 세상 전부였던 티브리악의 가주 자리가, 언젠가부터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티브리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록의 가주가 전쟁통에 목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였을까? 어쩌면 그 이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더 큰 것을 쥘 수도 있다.'
가문의 후계자씩이나 되면서 전장에 나올 결심을 했던 것은, 흔들리는 후계자 자리에 불안했던 것 때문도 있지만 자신이 전장에서 활약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감은 착각이 아니었고, 오만도 아니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수차례의 전투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재능은, 그 위에 쌓인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그래. 난 할 수 있다.'
얼음처럼 냉철한 자의 피도 불길처럼 붉고 뜨거운 법인가. 안개 속을 헤매던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눈이 빛을 찾았다.
"돌아가지 않는다."
"옛."
기다리던 대답이었는지, 돌아오는 목소리에도 열기가 감돌았다.
***
장군의 아들이 불만을 표했다고 해서 이미 내려온 명령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철군 준비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파의 시민들도 그들의 도시에 머물던 용맹한 장군이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두려워했고,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련하시오?"
토어릭이 비후스 자번을 보며 물었다.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가 이렇게 따로 얼굴을 보는 것도 마지막일 텐데, 조금 더 솔직해지는 건 어떻소?"
"…솔직히, 조금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불안하기도 하군요."
"어째서?"
"모르는 자들은 이제 키파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게 아님을 아니까요."
"호오."
"잠시 미뤄진 것뿐 아니겠습니까."
토어릭은 대답 없이 싱긋 웃었다.
"그동안 시장의 노고가 컸소. 언제고 따로 대접이라도 해드려야 했는데, 영 기회가나지 않았구려."
"어인 말씀을."
"그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조언 하나 해드려도 되겠소?"
"어떤 조언인지요?"
"금방 잠시 미뤄진 것뿐이라 했지요?"
"아닐지도 모르오."
"예?"
"위협이라는 게 꼭 밖에만 있는 게 아니잖소. 호랑이나 늑대 같은 맹수는 아닐지 몰라도, 승냥이나 들개 정도는……."
비후스 자번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키파는 부유한 도시가 아니오? 전투까지 여러 번 일어나고, 그 세가 예전보다 조금 꺾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빛나는 보석이지. 시장은 현명한 사람이니,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셨으리라 믿소. 그리고……."
계속 말하려던 토어릭은 뒷말을 삼켰다. 비후스 자번의 표정과 눈빛을 봄과 동시였다.
"뭐, 이쯤 합시다. 괜한 걱정이었을지도 모르겠소. 어떤 자가 오든, 우리 장군보다는 더 편한 상대일 테니까. 하하."
"아닙니다. 고마운 조언이었습니다. 새겨듣겠습니다."
비후스 자번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 토어릭이라는 사내를 상대하면서 처음으로 보인 그의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