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화
며칠 동안 고민하던 토어릭은 한 가지 꾀를 냈다.
"장군께서 직접 움직이시면 조정에 있는 이들이 장군의 저의를 의심하겠지요. 그러니 다른 이의 손을 빌려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이냐."
"비후스자번을 이용하시지요."
"이용?"
"비후스 자번에게 장군을 참소케 하는 겁니다. 음… 예를 들면, 장군께서 군대를 거느리고 도시에 머물면서 학정을 펼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군터는 토어릭의 말이 썩 그럴듯하게 들렸다. 토어릭이 '학정' 운운하면서 슬쩍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괜찮겠군."
군터는 곧바로 비후스 자번을 불렀다. 계획을 위해서는 그의 협조가 필수였다.
설명을 들은 비후스 자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제가 어찌 감히……."
그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고개 숙이는 모습에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그동안 그간 섭섭하게 대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닌가?"
"맞습니다. 장군께서는 제게 섭섭하게 대한 적이 없지요."
"그렇다면 내가 자네에게 작은 부탁 하나 정도는해도 되겠나?"
"무, 물론입니다. 허나……."
토어릭이 비후스 자변의 말을 끊었다.
"솔직하게 말하겠소. 장군께서는 이 전쟁에 흥미가 떨어지셨소이다."
"그래서 솔롬으로 돌아가고자 하시는데, 장군께서 직접 그런 말씀을 하시면 오해하는 자들이 여럿 생길 거란 말이오. 장군께서 시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바로 그 플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오. 시장은 어리석은 분이 아니니 여기까지만 말해도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들으셨을 거요."
비후스 자번은 다시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방금처럼 기겁하지는 않았다. 토어릭의 말처럼, 대강 돌아가는 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실일까?'
전쟁에 흥미가 떨어져? 군인이 전공을 쌓을 기회를 앞에 두고 그럴 수 있냐 없냐는 둘째치고, 고작 그런 이유로 돌아가겠다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비후스 자번은 그간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내가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별종이라는 말조차도 그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정말 특이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저더러 크렘보르 장군을 참소하라는 말입니까? 거짓으로 빌미를 주어, 조정에서 장군을 소환하게끔 하라는 말이지요?"
"바로 그렇소. 시장쯤 되면 조정에도 연출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으음, 연줄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는 창구가 있기는 합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토어릭이 씩 웃었다.
"좋군, 아주 좋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되겠군."
"예?"
"솔직해집시다. 시장도 우리 장군의 밑에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 아니오. 매일대일,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었겠지."
"아니, 그 정도는……."
"이번에 그대가 장군을참소하고, 우리 장군의 자리를 대신할 자가 새롭게 부임한다면 시장의 마음도 한결 편해지지 않겠소?"
"……."
"좋게 생각하시오.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오?"
토어릭은 두 팔을 벌리며 웃고 있었지만, 비후스 자번은 자마 마주 웃을 수 없었다.
***
"사나운 병사들이 하루가 멀다고 거리에서 행패를 부린다. 사령관은 그를 바로잡을 의지가 없으며, 그 수하들 역시 사납기 그지없어 도시의 신민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키파의 시장, 비후스 자번이 썼다는 상소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흔한 일이지 않소? 군인으로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관리로서는 부족하다는 게지."
"수하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군인이 뛰어나다고?"
"전장에 나가본 적이 없어 모르시나 보오? 실전을 여럿겪은 용맹한 병사들은 여간 다루기 까다로운 것이 아니오. 한껏 사나워진 그들을 옥죄기만 했다가는 큰일을 지르기 십상이지."
"명령과 규율에 복종하는 것이 병사요. 그러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미리로 아는 것과 실제는 다르단 말이오. 이래서 책상물림들은……."
"뭐요?!"
쾅!
다이 시리 제레이스가 팔걸이를 내리쳤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이제 막 커지기 시작한 목소리들을 잠재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만들 하시오. 공사다망한 분들이 이러자고 모인 게 아니잖소"
"커흠."
"쯧."
달아오를 뻔한 분위기를 가라앉힌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키파 시장의 상소를 내려놓고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래. 어쩌면 좋겠소? 일단, 공식적인 절차를 밟은 것은 아니기는 하오만……."
지금은 전시다.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주둔지는 군사령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며, 시장이라고 해도 사령관의 명령에 복종하며 군대를 위해 협조해야 한다.
이런저런 애로사항이 있다고 해도, 시장이 사령관을 제치고 상소를 보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본래대로라면, 아무리 도시의 상황이 안 좋다고 해도 시장의 상소만으로 사령관을 어찌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기 마련.
다이시리 세레이스는 이 상소를 자신에게 건넨 컬몬 가의 가주, 하누바 컬몬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키파는 요충지요. 적들도 그것을 알기에 대군을 보내 공략하려고 했었지. 물론 크렘보르 장군이 용맹하게싸워 적을 격퇴하고 도시를 사수했으나, 그 중요성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소. 지금은 물러났다지만, 적은 언제고 돌아올 테고… 그때 다시 한번 키파를 노릴지 모르는 일 아니겠소?"
잠시 주변을 돌아보며 분위기를 살핀 하누바 걸본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그 중요성이 줄어들지 않을 요충지요. 도시의 민심을 살피지 않을 수 없소."
"하지만…공이 말했다시피 크렘보르 장군이 피로 지켜낸 도시오. 이까짓 사소한 이유로 그를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아니오?"
"물론 그렇소. 그를 벌하자는 이야기가 아니오. 절대 그럴 수는 없지. 명분도 없거니와, 그는 전하께서 아끼는 신하가 아니오? 전하께서 안 계신 지금, 우리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
"그렇다면?"
"키파 공방전은 수만의 대군이 부딪친 치열한 전투였소. 승리했지만, 크렘보르 장군의 군대도 많이 상했지. 실제로 그가 여러 번 지원 빙력을 요청하지 않았소?"
"그랬었지."
하지만 지원 병력을 보내고 싶어도 그럴 병력이 없었다.
징집병으로 머릿수만 채워서 보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은 조정에서도 알고 있었고,
"숨을 돌리게 해주자는 거요. 마침 적절한 핑곗거리도 있지 않소?"
"음? 핑곗거리라니? 무슨 소리요?"
및및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몇몇은 짐작 가는 게 있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왜, 아바시스 놈들이 동남쪽 국경에서 모습을 보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셨소?"
"처음 듣는 이야기군,"
"나는 들어본 적 있소.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소?"
정말 아바시스가 움직였다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그것을 모를 없다. 그러니 그 소식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고,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소한 규모라고 보는 편이 좋으리라.
그런데 그걸 모르지 않을 하누바 컬몬이 이렇게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은, 그 구실을 써먹고 싶다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봐도 좋으리라.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정치적 경험과 감각이 보통 이상이었고, 당연히 하누바 컬몬의 노골적인 의도를 단박에 눈치했다.
몇몇은 눈살을 찌푸렸고,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자에 해당하는 자들도, 하누바 컬몬의 수작이 저열하다고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암묵적으로 그의 뜻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일전에 아바시스의 병력이 출몰하고, 아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었소. 적이 크렘보르 장군이 다스리는 솔롬성까지 쳐들어 왔었지. 또 한 번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않겠소?"
"그렇다면 당연히 대비해야 할 테고?"
"물론이오."
딴은 그럴싸하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자가 본다면 이 얕은 수작에 깔린 저의를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찌 생각하시는가?"
키파의 시장이 보낸 상소도 그렇고, 하누바 컬몬이 꺼낸 아바시스 관련 이야기도 그렇고,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정말 보잘것없는 명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보잘것없는 명분들을 한데 묶는다면, 꽤 그럴듯하게 꾸며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렇다고 해도 크렘보르 장군이 순순히 남득하지는 않을 것 같소만?"
"당연히 그를 위무해야겠지요. 전공에 대한 포상은 전하께서 직접 행하시겠지만, 약식으로나마 조정에서 나름대로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오."
오가는 이야기들을 묵묵히 듣고 있던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원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비교적 젊은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멕시스 공은 어찌 생각하시는가?"
그의 부름에 메시스 공이라 불린 젊은 사내가 입을 일었다.
"가문 덕에 과분한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 해도 부담스럽습니다. 저 같은 자가 무슨 의견을 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 고명하신 조정 대신들께서 하시는 말씀을 경청할 뿐입니다."
"아니지. 그대의 부진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그대는 그의 대리인 것이오. 마땅히 의견을 낼 자격과 의무가 있지."
"그러시다면……."
사내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일었다.
"타당하신 의견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걱정스럽군요. 필요한 일이라지만, 크렘보 장군이 납득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렇겠지, 그럼 어찌해야겠소?"
"컬몬 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조정에서 크렘보르 장군을 납득시킬 정도의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을지요?"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빙긋 미소지었다.
조건이 달리기는 했지만, 멕시스가 이 억지스러운 논의에 답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