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화
"군대는?"
시온 포트락은 깨어나자마자 군대의 상황을 물었다. 그를 살피고 있던 의사가 당황하자 그 옆에서 초조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던 부관이 대신 답했다.
"장군, 몸은 어떠십니까?"
"군대는?"
"…무사히 퇴각했습니다."
시온 포트락은 그제야 몸에 힘을 풀었다. 힘을 잔뜩 줘도 상체만 살짝 꿈틀거리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그마저도 그에겐 힘겨웠다.
무사히 퇴각했다고? 그나마 다행일까. 아직도 걱정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는 수하에게 차마 화를 내기는 힘들었다.
'그래, 잘못이 있다면 내게 있겠지.'
조금 더 몸을 아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신중하기라도 해야 했다. '말로스의 그림자'는 강력하고 안정적인 각인이지만, 무적의 힘은 아니다. 게다가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않나. 너무 흥분한 나머지 부친의 가르침을 잠시 망각했던 걸까.
"적이 우리를 추격하지 않았나?"
"예. 다행히도 추격은 없었습니다."
다행? 시온 포트락은 피식 웃다가 흉통 때문에 인상을 찡그렸다.
"다행히도, 가 아니야. 놈들은 추격할 여력이 없었던 거다."
바꿔 말하면 추격할 여력도 없던 놈들에게 지레 겁을 먹고 퇴각을 한 이쪽이 어리석었다는 뜻이고, 하지만 그 원인 제공자가 자신이니, 시온 포트락은 수하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페란자 장군은?"
"지금쯤 장군의 부상 소식을 들으셨을 겁니다."
"하하. 아직 아버님께 소식이 들어가지 않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바로 전령을 보내라. 난 멀쩡하니, 아버님께 괜한 걱정 끼치드릴 필요 없다고."
가뜩이나 몸도 편잖은 부친에게 걱정거리를 던져주기는 싫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부관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
보리스는 여전히 몸에 기운이 없었다. 적장을 물리치고, 적이 퇴각하는 그 순간까지 병사들을 지휘하느라 한순간도 쉬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모든 일을 마치고 나자 억눌렸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해서, 일단 급한 불은 껐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퇴각한 것은 적이지만, 피해만 놓고 보면 이쪽이 패배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담담한 목소리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하는 로우렌을 보며, 보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에 로우렌이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한숨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네 공이 크다."
말의 꼬리에 긴 풀 다발을 묶고 이리저리 달리게 하여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멀리서 보면 대군이 접근하고 있다고 착각하기에 딱 좋은 광경이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알아차린 로우렌이 다급한 와중에 짜낸 얕은 꾀였다.
"우연이었습니다. 제 꾀가 동했던 것은 적장의 몸 상태가 위중했던 탓입니다. 장군께서 만드신 우연이지요."
"웬일이냐. 너답지 않게 겸손하군."
"어쭙잖게 제 자랑을 늘어놔도 될 상황이 아니니까요. 설마하니 어린 포트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제 실책입니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적이 순순히 물러나기만 할 줄 알았다. 설마 이렇게 따끔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군요. 선봉에 장군이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장군께서 해를 입는다면 군터 장군께서 가만히 계실 리 없고, 그렇게 되면 그들도……."
"뭐, 우리가 선을 넘은 것일지도 모르지. 저들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않겠나."
"……."
"세상이 한 사람의 계산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거겠지, 자책은 그쯤 해두고, 전령은 보냈나?"
"예. 내일쯤이면 본대에 닿을 겁니다."
"그래, 미안하지만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 말이지. 조금 쉬어야겠다."
"그러십시오. 보고해야 할 일이 생기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로우렌이 물러가고, 홀로 남은 보리스는 모피를 덧댄 침상위에 누운 채 생각에 잠졌다.
'위험했지.'
여러모로 위험천만한 전투였다. 아주 오랜만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을 통해 배운 것도 있었다.
'지휘관이 앞장서는 것은 위험부담이 커."
이제껏 보리스는 늘 선봉에 섰었다. 부대장으로서 부대의사기를 올리는 데 그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보고 배운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도부친의 수하들도 모두 병사들을 이끌 때는 가장 앞에서 이끌었다.
그들은 용맹으로써 전장을 헤쳐나갔고, 보리스는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투는 그런 그의 생각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그놈이 위중하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크게 패했겠지. 바꿔말하면, 놈이 쓰러졌기 때문에 전두의 결과가 뒤바뀐 거다.'
적장, 시온 포트락은 자신과 동류였다. 지휘관이면서도 선두에서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이제까지는 그런 방식으로 재미를 봐왔을 거다. 하지만 결국 어찌 되었나? 그 익숙한 만용 때문에 어이없는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나?
'나라고 그런 일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없지.'
보리스는 스스로 실력에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지는 않았다. 막말로 전장에서 부친이나, 혹은 살라스 같은 상대를 적으로 만난다면?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다. 재수 없게 눈먼 화살에 맞기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이번 같은 일이 반대로 일어나지 않겠나?
'겁쟁이처럼 뒤에만 박혀있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조금은 신중해져야 할 필요도 있어.'
부진과 같이 백 명의 적 사이에 떨어져도 손쉽게 헤지고 나올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나서야 할 때와 자중해야 할 때를 분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내 한 목숨이 아니니까.'
로우렌도 그렇고, 그를 따르는 수하들이 언젠가부터 하기 시작한 말이다. '공자님께서는 홑몸이 아니십니다'라는.
처음에는 웃어넘겼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말의 의미를, 무게감을 안다. 사람을 이끄는 자에게는 그에 맞는 책임감이 따르는 법,
'당신이 가르쳐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아버지.'
괜한 생각을 해보며, 보리스는 눈을 감았다.
억지로 뜨고 있던 눈인 만큼, 감자마자 그의 숨소리는 고르게 변했다. 이따금 뒤척일 때마다 상지가 눌려 얼굴이 일그러졌다.
***
"무사한가?"
"여. 의사의 소견으로는 큰 문제는 없다고……."
"알겠다. 물러가 쉬어라."
전령을 내보내고, 군터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번에는 공자가 한번 크게 물렸군요."
"방심한 대가지."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보리스는 운이 좋았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이런 경험을 하고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것도. 전장에서 두 번 이상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이는 그리 흔하지 않다.
"공자를 문책할 생각이십니까?"
"네 생각은 어떠냐."
토이릭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피해는 짓겠지만, 어쨌거나 겉으로는 승리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공자의 제민을 세워주시기로 한 이상, 조금 더 밀어주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내 자식을 네가 더 아끼는구나."
"제가 어찌 감히."
군터는 고개 숙이는 토어릭에게서 시선을 뗐다.
"쥬드 포트락의 아들이 중상을 입고 퇴각했다."
"그렇다 한들, 별다른 움직임은 없을 겁니다. 대전략은 이미 세워졌으니, 쥬드 포트락이 얼간이가 아닌 이상 함부로 움직일 리 없지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 정도면 보여주기는 충분하지 않냐는 거다."
"회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끝장을 볼 게 아닌 이상, 이 이상 추격한들 의미가 없다.
이전까지의 시시한 전투가 아닌, 제대로 된 전두도 치른 이상 더더욱, 시온 포트락이라는 이름은 별 영양가가 없지만, 쥬드 포트락의 아들이라는 상징성은 작지 않다. 충분히 의미 있는 승리(비록 겉보기에만 그럴듯한 것일지라도)가 아닌가.
"조정에서 어떻게 나올 것 같은가?"
"으음. 글쎄요.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전의 전선을 되찾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공을 세우지 못해 안달이 난자들이 적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내 차례까지 오리라 보느냐?"
"……힘들지 싶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토어릭이 말끝을 흐리자 군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 자콥 트라소프는 자신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권력자들은 생각이 다를 테지.
그들은 전공이라는 한정된 보물을 남과 나누려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미 그 보물을 적잖이 가진 자신과는 더더욱.
권력에 흥미가 있는 이라면, 다시 말해 보통의 귀족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든 공을 더 세우기 위해, 혹은 공을 세울 기회를 얻기 위해 아등바등하겠지만…….
"한발 뒤로 물러날 생각이시군요."
"내 마음이 보이느냐?"
"아니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다만 추측할 뿐이지요. 장군을 한두 해 모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지만, 토어릭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정녕 욕심이 없으신 건가.'
적은 물러가고 있으니, 남은 것은 빈 땅에 깃발을 꽂는 것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으미, 그렇기에 누구라도 담할 기회다. 그런데 이런 기회를 오히려 마다하는가? 왜?
'머리로 장군을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돼, 토어릭아. 아직도 그것을 모르느냐.'
체념해야 하는데, 그게 좀처럼 쉽지 않다. 그 역시 인간이며, 인간다운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출세욕과는 달랐다. 약간의 향상심, 혹은 손해를 입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이랄까.
어떻게 하면 이득을 볼 수 있을지,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있을지 뻔히 보이는데 그것을 외면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수행이 깊어, 세속적인 욕망을 거세하다시피 한 수도자가 아닌 이상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장군께서는 가만히 계실 생각입니까?"
"가능하다면 솔롬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토어릭이 눈을 큼지막하게 됐다.
하지만, 군터의 솔직한 속내있다. 남의 손아귀에서 굴러가는 전쟁에는 흥미가 떨어졌다. 무의미하게 이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느니, 솔롬으로 돌아가 할렌을 되찾을 방도나 모색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으음."
"네 말대로, 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난 자들은 차고 넘치지 않겠느냐."
"설마 직접 상신하실 요량은 아니지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으음. 공을 세울 수 있는 자리에서 굳이 물러나려는 모습이,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장군께서 직접 솔롬으로 돌아가겠다 주정을 올린다면, 장군의 의도를 의심하는 자들이 적잖이 생길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찌해야겠느냐."
군터의 물음에, 토어릭이 고심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