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8화
시온 포트락은 이미 보리스 크렘보르가 거느린 군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를 토대로 유추한 내용이 사실입을 조금 전 직접 눈으로 보고 알아차렸다.
'오합지졸이다.'
겉은 그럴싸하지만, 대열이나 복색의 통일성을 보면 그 내실을 짐작할 수 있다. 징집병이나 용병이 상당수 포함된 병력이 분명하다.
그것을 안 순간, 시온 포트락은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항상 신중해야 한다는 부친의 가르침을 따라 승산이 있다. 정도로 표현한 것뿐이다. 과감하게 표현한다면, 그는 승산정도가 아니라 승리 자체를 확신했다.
'아들에게 전공을 쌓게 해주고 싶었던 건가? 그랬다면, 밑에 놈들도 정예를 붙여줬어야지. 너의 그 안일함이 화를 부를 것이다.'
시온 포트락은 얼굴도 본 적 없는 적장, 군터 크렘보르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는 선봉에서 말을 달렸다. 적장, 군터 크렘보르의 아들도 마주 달려왔다. 그 와중에 목청껏 소리치기도 했다. 병사들의 혼란을 잠재우려는 의도가 훤히 엿보였다.
'괜찮군.'
병사들이 흔들릴 때, 지휘관의 고함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거기에 몸소 앞장서기까지 한다면 말로만 공격하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낫고,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꽤 괜찮다는 것도 알고 있다. 몇 번의 가벼운 승리를 거두면서도 계속 신중하게 움직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느 평범한 지휘관이었다면 그 변변찮은 몇 번의 승리에 도취 되어 조금 더 과감해지기 마련인데, 제 크렘보르의 독자는 그런 것도 없었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달리는 말 위에서 참을 고쳐 잡았다. 가라앉아 있는 상대의 눈이 보였다. 훌륭하다. 격돌 직전까지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시온 포트라의 가면에 가린 입매가 더 크게 비들렸다.
장과 창이 부딪쳤다. 상체가 뒤로 크게 젖히졌다. 상당한 충격. 그는 떨리는 창을 꽉 쥐며 방금의 충돌로 어느 쪽도 이득을 보지 못했음을 알았다.
시온 포트락은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그랬듯, 상대 역시 뒤따르는 병사들과 상당히 거리를 벌린 채 앞으로 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히히힝!
과격한 방향 전환에 전마가 거칠게 울어댔다. 평소였다면 가볍게 달래주기라도 하련만, 지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한 번, 잘해야 두 번 정도, 그 안에 끝을 보지 못한다면 난전에 휩쓸릴 터. 시온 포트락은 마치 거울처럼, 그와 똑같이 방향을 튼 상대를 보미 다시 창을 겨눴다.
***
푸르스름한 불길.
푸른 불이라는 것도 좀처럼 보기 힘들지만, 그게 사람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더 보기 힘들다.
평범한 불이 아니다. 직접 무구와 살을 태우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저 불을 피우고 있는 적장부터 무사하지 못했을 터.
저 불은 기력을 태운다.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리스는 그렇게 느꼈다. 저 불에 가까이 다가가면 뭐랄까.
몸속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저절로 몸에서 기운이 빠진다. 탈진이라도 한 것처럼.
저것이 적장, 시온 포트라의 각인일 것이다. 제국에서 손꼽는 명장의 아들답게 기이하면서도 위력적인 각인이다.
"왜 그러나! 응!!"
처음부터 저 푸른 불을 꺼낸 것은 아니다. 2합을 겨누고 병사들이 부딪쳐 난전이 벌어진 후로도 몇 번을 더 충돌했다.
거기서 보리스는 우위를 점했다. 각인 받은 힘 같은 것은 없어도, 그의 타고난 용력은 상대보다 우위에 있었다.
보리스는 그것을 알자마자 힘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수십 합을 겨눈 끝에 상대의 가면에 실금을 냈다.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가면을 통째로 베지는 못했더라도 머리에 적잖은 충격을 줄 수 있었을 터.
그에 상대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그때부터 저 푸른 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상체를 중심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마치 후광과도 같았다.
병사들은 그의 주변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운 나쁘게 그에게 가까이 붙은 빙사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창날에 팔과 목이 찔리고 베여나갔다.
보리스는 그와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너무 오래 겨루면 탈력감이 심해졌기에,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다가 거리를 두면서 기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 과정에서 적잖은 병사들이 죽어 나갔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언제까지 저 불꽃을 유지할 수는 없을 거다.'
각인의 힘이라고 무한정 유지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물론 쥬드 포트락의 아들인 만큼 비범한 힘을 각인 받았겠지만, 각인의 힘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각인 받은 자에게 기반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더 태울 장작이 없다면 불꽃도 결국은 시드는 법, 보리스는 상대를 주시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채앵!
상념이 너무 길었던 걸까. 보리스는 바로 옆에서 들린 쇳소리에 뒤늦게 반응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화살을 쳐낸 그라모트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다급한 와중이라 호칭을 잘못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걱정스럽게 그의 기색을 살폈다.
"괜찮다."
"이만 물러나시지요. 아군이 계속 밀리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보리스는 그제야 전황을 살폈다. 적장에게 너무 주의를 끌린 나머지 전투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펴보려고 해도 전황이 어떤지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주변에 아군 병사보다 적 병사가 더 많아 보이기는 했다.
"안 돼."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하오나……."
"퇴각한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 퇴각한다면 적은 바로 추격할 테고, 피해가 클 거야. 지금은 아니야.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말입니까?"
"로우렌은?"
"보이지 않습니다. 전투 중에 휩쓸린 걸까요?"
"글쎄, 눈치 따른 녀석이니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다."
로우렌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수는 비슷하지만…병력의 질이 달라."
충돌하고서야 알았다. 하지만 미리 알아차렸다고 해서 뭐가 달랐을까? 보리스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뒤늦은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방법뿐이다.'
보리스는 숨을 골랐다. 피 칠갑을 한 몸은 쇳덩이를 여러 개 달아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그런 몸을 이끌고, 그는 여전히 푸른 불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적장에게 다가갔다. 막 창을 든 병사의 목을 친 그는 보리스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몸을 폈다.
"이번에야말로 도망친 줄 알았는데."
"잠깐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지."
"하하! 그래? 그럼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급한 일이 생기겠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비웃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 창을 들었다.
"아마 아닐 거야."
보리스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군문에 들었을 때, 바크렌에서 맞닥뜨렸던 괴물.
인간이 아닌, 말 그대로 괴물을 상대로 싸우며 한계라는 것을 제대로 경험했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피로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도 해냈었는데 지금이라고 못할 게 무엇인가?
챙!
창과 창이 부딪쳤다. 손아귀가 저릿했다. 보리스는 창날을 비스듬하게 틀면서 장대를 긁으며 상대에게 바짝 붙었다.
푸른 불이 몸에 닿았다. 전혀 뜨겁지 않았지만, 예의 그 쪼그라드는 느낌이 한층 더 강해졌다.
거리가 좁혀지고, 어깨와 어깨가 부딪쳤다. 충돌하는 순간에는 보리스가 우위를 점했으나, 보리스는 이 우위가 금세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몸을 부딪쳤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스윽!
창을 든 건 한 손, 나머지 한 손에는 충돌 직후 허리춤에서 빼든 단검이 쥐여 있었다. 보리스는 그것을 상대의 옆구리를 향해 찔렀다.
그러나 상대, 시온 포트락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몸을 틀며 한쪽 팔로 보리스의 팔을 쳐냈다. 그 충격에 보리스는 순간 단검을 놓칠 뻔했으나, 이를 악물고 들이지는 단검을 붙들었다.
푹!
덕분에 목표로 한 옆구리는 아니지만, 그 아래 허벅지를 얕게나마 찌를 수 있었다.
"어림없는 수작을!"
시온 포트락이 크게 노하여 창을 휘둘렀다. 창날이 닿을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단단한 나무로 만든 창대는 그 자체로 흉기. 보리스는 창대에 어깨를 허용하고 말았다.
빠악!
둔탁한 소리. 그 이상의 충격, 보리스는 소리 없이 고통을 삼키며 창을 고쳐 쥐었다. 팔에서 힘이 빠져 금방이라도 창을 놓칠 것만 같았다.
"이따위 작은 칼로 나를 어떻게 해볼 수 있을 줄 알았나?"
시온 포트락이 허벅지를 파고든 단검을 뽑아 들며, 빈정거렸다. 어지간히도 얕게 박힌 것인지, 단검을
몸았음에도 피가 거의 흘러나오지 않았다.
"딱하기 그지없군. 비장의 한 수였던 것 같은데, 너무 조잡하지 않은가?"
보리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얼굴을 유지한 채, 가면의 눈구멍 사이로 보이는 시온 포트락의 두 눈을 응시했다.
"조잡한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두고 보면 안다고? 뭘 기다리고 있나?"
"그 역시, 두고 보면 알게 될 거다."
"독이라도 발라뒀나?"
정확하다. 보리스의 단검에는 독이 발려 있었다.
긍지 높은 무인이라면 이런 수단을 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겠지만, 보리스는 자신을 군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군인은,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동원 가능한 모든 수를 써야 했다. 독도 마찬가지.
"시시하군."
말로는 시시하다고 하지만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비싼 독이 제값을 하는 걸까. 쥬드 포트락의 아들, 비싼 몸인 만큼 호신을 위한 온갖 수단을 지니고 있겠지만, 단검에 묻어있던 독은 극독이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다.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을 터.
"그거면 충분하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활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의 기세도 조금 전보다 약해진 것 같았다.
그거면 충분하다. 저 거슬리는 불꽃이 조금만 잠잠해진다면,
채앵!
보리스는 최대한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온 포트락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거칠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사나운 기세가 보리스에게는 다급함으로 보였다.
"여유를 잃었군, 창이 거칠어."
"흥!"
그들은 순식간에 수심 합을 겨뤘다. 이전과 달리, 시온 포트락이 몰아치고 보리스가 그것을 받아내는 식이었다.
자잘한 상처가 십여 개 정도 생겼으나 충분히 버틸만했다.
몸은 점점 무거워졌지만, 그의 몸이 저지는 것 이상으로, 상대의 공세가 무더졌다. 거칠기만 할뿐, 날카로움이 없었다.
넘실거리던 불꽃도 이제는 눈에 띄게 옆어졌다.
"흡!"
찔러오는 창을 옆으로 흘렸다. 상대의 무너진 균형을 이용해 창대로 밀쳐냈다. 잘 훈련받은 말은 주인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훌쩍 물러났다.
"하아… 하아…."
맥을 못 추는 건 시온 포트락만이 아니었다. 애써 버티고는 있지만, 보리스 역시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였다.
싸우기는커녕, 말 위에서 버티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한다.
그건 비단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재 숨을 헐떡이고 있는 시온 포트락도 여전히 형형한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제 곧이다.
이 초라해진 싸움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그들 모두 직감하고 있었다. 한 번, 내지는 두 번, 그 안에 승부가 갈리리라.
와아아아-!
하지만 그들의 승부는,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무슨 일이냐!"
"장군! 적입니다!"
갈라진 목소리로 외친 시온 포트락에게, 저 멀리 그의 수하장교가 다급한 목소리로 답했다.
적이라는 말에 시온 포트락이 함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심상치 않은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적이라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이전에 보냈던 정찰병들이 죄다 눈이 멀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온 포트락은 '혹시'하는 마음에 휘둘렸다.
가문의 후계자이자 독자가 아닌가. 대범한 척 선봉으로 세웠더라도, 뒤로 은밀히 호위 병력을 붙였을 수도 있다.
아니, 그편이 더 그럴듯하지 않나? 하지만 아무리 은밀히 따라 붙였더라도, 정찰대의 눈을 감쪽같이 속였단 말인가?
"으……!"
머리가 복잡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순간, 이제껏 억누르고 있던 피로와 독기(氣)가 고개를 들었다.
"컥!"
피를 토한 그의 몸이 앞으로 크게 쏠렸다. 그에 대경한 장교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장군!"
"장군을 모셔라! 어서!"
시온 포트락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몰려드는 수하들을 보았다.
'안 돼,'
그는 외지고 싶었다.
"퇴각! 퇴각하라!"
다급히 소리치는 부관에게 말하고 싶었다.
'저건 허세다. 저급한 눈속임일 뿐이야.'
군터 크렘보르가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호위 병력을 붙였더라도, 정찰대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만약 피했다면 그 병력의 규모가 크지 않다는 뜻일 테고, 그렇다면 퇴각할 이유가 없다. 이대로 전투를 진행하면 아군은 승리할 것이다.
'되각하지 마라. 계속 싸워!'
입을 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흐릿한 시야는 점점 어둑하게 변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말의 뒷머리에 몸을 기대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