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화
"장군!"
보리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아직도 저 '장군'이라는 호칭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반쯤은 듣는 사람 기분이나 좋으라고 하는 소리지만, 완전히 들린 말은 또 아니다. 선봉장도 일단 장군은 장군이었으니까.
"무슨 일이냐."
"적이 요새를 따져나가고 있습니다. 한 번에 최소 4천정도, 확인된 것만 세 차례입니다. 퇴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뒷말은 사견이었으나 보리스는 문책하지 않고 넘겼다.
앞의 본론이 그의 주의를 끌었기 때문이다.
"적이 요새를 빠져나가고 있다?"
접근을 알아차리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이쪽이 눈과 귀가 있는 것처럼, 적들 역시 눈과 귀가 있을 테니까.
어쩌면 군대가 키파를 나서는 동시에 알아차렸을지도
"교전을 피하고 싶겠지요."
로우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보리스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내심 그의 말에 동조했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 처음부터 집작했다.
'싸울 생각이라면 굳이 요새에서 나올 이유가 없지.'
속단은 금물이나 정황상 달리 생각할 부분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보리스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정찰병의 수를 배로 늘렸다. 적의 자그마한 동향까지도 놓치지 말고 보고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장군은 부인하시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이미 훌륭한 장군이십니다."
"아첨은 그쯤해라."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로우렌과 달리, 그의 형인 그라모트는 진증했다. 모르는 이가 보면 긴장해서 굳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적의 함정, 그러니까 유인책일 수 있습니다."
보리스는 그라모트의 말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그마한 가능성일지라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자신 있게 선봉을 자처했지만, 보리스는 이 자리의 무게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허투루 일을 처리하다가 낭패를 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
보리스는 신중하게 군을 이끌었다. 정찰대가 돌아오기 전에는 절대 길을 재촉하지 않았고, 정찰도 여러 번에 걸쳐 철저하게 진행했다.
그런 그의 신중함을 두고 몇몇 이들은 이렇게까지 하냐며 혀를 찼지만,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라고는 못하지만, 대체로 신중함은 전장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어쩌면 용맹보다도 더.
게다가 그들은 보리스가 마냥 신중하기만 한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용맹과 대범함이 필요할 때, 보리스는 직접 창칼을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 수 있는 사내였다. 이미 여러 차례 증명하지 않았던가.
"역시 장군의 핏줄이군."
군터를 아는 이들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가 부족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은 조금씩, 보리스를 군터의 아들이 아닌 보리스 크렘보르 그 자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요새의 성벽에는 백기가 꽂혀 있고, 성문은 열렸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리스의 그런 신중함은 빛을 보지 못했다. 적군이 머물던 요새의 성문은 활짝 열렸고, 성벽과 첨답에는 항복을 뜻하는 백기가 걸렸다. 병력이 다 빠져나간 요새는 텅 빈 것이나 미친가지였고, 요새에 거주하면 얼마 안되는 백성들만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새로운 지배자의 자비를 구했다.
"일단은 가둬두시죠."
"그럴 필요까지 있겠느냐?"
"물론이지요. 저들 중에 첩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요새가 손에 들어왔음에도 로우렌은 마음을 놓지 않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직 요새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거나,
"거짓 퇴각이라고 생각하나?"
"그럴지도 모르지요. 아닐 수도 있고요. 확실하지 않으니,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 네 말이 옳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보리스는 곧 선선히 고개를 끄덕있다.
백기를 내결고, 성문을 연 백성들을 감금한다면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안 좋은 소리를 듣는 대신 안전해질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보리스는 곧장 적의 뒤를 쫓는 대신 요새에서 하루를 머물며 군을 정비했다. 적군의 규모가 큰 것이 이럴 때는 오히려 도움이 됐다. 인원이 많을수록 움직임은 굼퍼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루 정도 더 간다고 해도 얼마나 더 가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보리스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었다.
애초에 싸움이 없을 것을 예상하고 출진한 것 아닌가.
'욕심부릴 필요 없지.'
보리스에겐 경험 많은 스승이 많았다. 그는 젊었지만, 경험많은 스승들을 통해 배운 것이 있었다.
전장에서의 신중함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는 것, 언제나 '조금만 더'가 화를 부르는 법이라지만,
도박장만큼이나 그 격언이 가장 잘 통용되는 곳이 전장이라는 것.
"기왕에 하루를 머물게 됐으니, 초병을 제외하고 병사들을 푹 쉬게 해라."
그라모트에게 명령을 내리고, 보리스는 홀로 성벽을 올랐다. 처음으로 손에 넣은, 정확히 말하면 그의 이름으로 처음 점령한 점령지의 경치는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척이나 근사했다.
***
"이대로 보리스 공자에게 맡기실 생각입니까?"
시어문드의 물음에 군터는 물음으로 답했다.
"문제 있나?"
"아뇨. 문제라기 보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 지금도 녀석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 말대로다. 군터가 이끄는 본대는 보리스의 병력이 지나간 길을 착실하게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시어문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본대가 선발대와 조금 더 가까이 붙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만에 하나라도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말이다.
"녀석이 내가 돌봐야 할 애는 아니지 않나."
"……."
시어문드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어찌 저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피를 이은 자식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독자이자 가문의 후계자가 아닌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품에 넣고 다니나시피 에지중지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어찌 저렇게 관심 없다는 듯 무덤덤할까.
"그리고…똑똑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리석은 녀석은 아니다. 한 함정 따위에 당하지는 않겠지."
"알겠습니다. 장군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시어문드는 고개를 돌렸다. 닷새 동안 갇혀 있었던 요새의 백성들이 초췌한 몰골로 감옥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욕심이 많은 녀석이군."
롤터 요새를 점령한 적이 여전히 쫓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타고니어 페란차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리스 크렘보르라고 하더군요."
"군터 크렘보르의 후계자이며, 독자입니다."
"하하. 하나뿐인 아들을 전장에, 그것도 선봉으로 들이밀었다? 대단한 오만함이군."
그의 웃음소리가 이어질 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시온 포트락이 입을 열었다.
"자신감일지도 모르지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거슬리는군."
롤터 요새를 그냥 내어준 것만으로도 이미 한 번 양보를 한 셈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바짝 추격해오다니. 이렇게까지 나오면 순순히 물러나려고 했던 마음에도 변화가 생길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전력을 온존하고 물러나라는 지침 때문에 물러나는 것일 뿐이지, 일전을 용기가 없어서 등을 보이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붙으실 겁니까?"
"고민 중이네."
"만약 그러실 참이면, 선봉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얼마나 대단하길래 잔카라스 데반 장군이 고역을 치르셨는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잔가라스 데반은 부친과 인연이 있던 자. 그 덕분에 시온 포트락은 그리 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와 개인적인 교분이 있었다. 그의 인물 됨됨이와 능력에 대해서도 알았다. 그는 분명 황자의 총애를 받을 만한,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런 자를 패퇴시키고, 결국 실각하게 만든 적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쯤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 건방지게 따라붙고 있는 놈은 군터 크렘보르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어. 불가피한 경우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최대한 지침을 따라야지."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 타고니어 페란자는 여러모로 훌륭한 군인이다. 그는 절대 전장에서 자신의 욕심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그는 오직 명령에만 충실했다.
그가 재량을 발휘하는 경우는 오직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을 수행할 때뿐이었다.
"불가피한 경우라 하시면?"
"놈들이 계속 욕심을 부린다면…그때는 어쩔 수없이 떨쳐내야 하지 않겠나?"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네."
"세상사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드물지요. 특히 이런 곳에서는 말입니다."
시온 포트락의 웃음에, 타고니어 페란차도 웃음으로 답했다.
***
첫 교전은 롤터 요새를 나오고 사흘 후에 벌어졌다.
교전이라고는 하지만 전두가 시작되고 거의 동시에 적이 퇴각했으니 사실상 전투라고 하기도 뭐한, 가벼운 충돌수준이었다.
"너무 간단한데."
간단하다기보다는 허무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로우렌은 심드렁한 투로 답했다.
"예상하시지 않았습니까. 제대로 싸울 의사가 있었다면 진즉 맞붙었겠지요. 요새의 성벽을 방패 삼아서 말입니다.
어쨌든 경하드립니다. 이것도 어찌 됐든 승전이 아닙니까."
"농담은 그쯤 해둬라,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보리스는 일이 예상했던 대로 돌아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이후로 세번이나 더 반복되자, 그때부터는 바짝 당겼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였다.
다섯 번째로 맞닥뜨린 적이 이전에 보았던 적들과는 달리 곧장 퇴각하지 않고 격렬하게 맞부딪쳐왔을 때, 보리스는 당황하고 말았다.
"철부지 애송이 녀석이, 기어이 선을 넘는구나!"
적의 수는 대략 5천, 지휘관으로 보이는 적장은 선두에서 덤벼들었다. 보리스는 순간 당황했지만,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 겁을 상실했구나! 들어라! 놈들이 막다른 곳까지 몰려 발악을 하는구나! 드디어 쥐새끼의 꼬리를 잡았으니, 망설일 것 없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지금 맞닥뜨린 적이 이전과 다르다는 점은 누구보다도 보리스 본인이 더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적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크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뒷덜미를 강하게 긁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히려 들뜬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그런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해, 그의 빙사들은 이 순간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받아들였다.
와아아아-!
앞선 네 번의 싱거운 승리로 조금 느슨해져 있었지만, 기세만큼은 올라 있던 병력이다. 그들은 우렁찬 함성을 토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흥! 어리석은!"
전투에서 기세는 중요하다. 하지만 기세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 사실은 두 군세가 충돌한 그 순간, 곧바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