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화
바라눔 트라소프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전투에서 패배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군대를 뒤로 물렸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모습은 그가 그의 배다른 형제가 나서자 물러나는 것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크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테고, 아마도 군대를 뒤로 물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를 갈았을 것이다.
자콥 트라소프에게 있어서는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는 목표했던 것을 이미 다 이뤘다. 바라늄 트라소프를 물러나게 했으며, 자신의 위세를 드높있다. 시종일관 밀리기만 하느라 침체 되어 있던 군의 사기도 회복되었고,
"역시 당장 진군할 엄두까지는 내지 못하는군요."
"바라눔 트라소프가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리라 보나?"
"황자는 만족할지라도, 그 수하들이나 세인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특히, 전선이 되는 양(兩)주에서 말이지요."
그들도 시작되고 계속 밀리기만 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아록 같은 경우는 총독이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지 않았나. 그런 만큼 자콥 트라소프가 친정에 나섬으로써 그 두려운 바라눔 트라소프가 물러났다는 것에 그들은 안도할 것이다. 하지만 목에 닿아있던 칼날이 물러가고 당장은 안도할지라도, 그게 얼마나 가겠는가.
상황이 변했다고 느끼면, 그들은 곧 잃었던 것들과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앙갚음을 원하겠지. 그때가 되면, 그들은 마지 그것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인 것처럼 자콥 트라소프에게 요구할 것이다.
어쩌면 정당한 권리일지도 모른다. 충성의 맹세는 신하가 주인을 섬기는 대신, 주인이 신하를 살피주는 것이 기본으로 짤리는 것이니,
"그때가 전면전의 시작일 겁니다. 황자는 그 순간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테고요. 하지만 최대한 늦추려 하겠지요."
자콥 트라소프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전쟁을 길게 끌면 끌수록 유리하다는,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는 제쳐둬도 좋을 것이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그가 거느리고 있는 오합지졸이 제 몫을 할 수 있는, 그럴듯한 군대로 거듭나기 위한 시간이.
"어리석군."
군터가 중얼거렸다.
당연히 황자가 아니라, 그에게 복수를 요구할 양 주의 귀족들을 이름이다. 물론 그들 역시 반쯤 등 떠밀리는 처지기는 하겠다만, 그래도 어리석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쪽에서 먼저 밀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시간은 이쪽의 편이고, 그렇다면 굳이 모험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가만히만 있어도 점점 더 유리해질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생물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감성도 가지고 있다. 이성과 감성, 서로 반대편에 선 것 같은 둘의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련한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 군도 슬슬 결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어문드가 닥자 위의 지도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타고니어 폐란차는 그간 쥐죽은 듯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양주의 군대가 뒤로 따지는 상황에서 계속 버티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수도 없을 테고요."
그간 적적한 시간을 보냈던 것은 타고니어 페란자의 군대만이 아니다. 키파에 주둔 중인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비록 병력의 수는 저쪽이 훨씬 앞서지만, 호르트리 파오가 있었던 때는 달랐던가?
지금의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낫다. 즉, 물러가는 적을 추격해볼 수도 있다는 뜻.
"아쉽지 않습니까."
"공을 세울 기회를 놓지는 것이?"
"군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요. 장군은 흥미가 없으십니까?"
"글쎄."
반쯤은 긍정이었다. 시어문드는 알지 못하나, 군터는 이전쟁이 황도에서 암약하고 있는 늙은 괴물(줄가의 표현을 빌리자민)의 손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을 알았다.
누군가의 손안에서 놀아난다는 것은 누구라도 달갑지 않을 일이고, 군터도 그러했다. 그는 줄카에게서 군주 키리스트가 뒤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이 전쟁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뭐, 그전에도 딱히 열성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군터는 줄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시어문드는 물론, 토어릭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이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황도에서 키리스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든, 이 전쟁은 이미 한참 전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콥트라소프도, 바라능 트라소프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피를 나눈 형제의 목을 치고, 비어있는 황좌의 주인이되기 전까지는,
***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보리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몸이 닮았는지, 로우렌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양주의 적이 전선을 물릴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놈들이 어찌 혼자 남아 버티겠습니까? 당연히 물러가겠지요.."
"그래. 아마도 그렇겠지. 일리가 있는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놈들은 지금쯤 철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것입니다. 아직 명분이 자리 지키고 있을 뿐이겠지요."
"그 명분을 만들어주자, 이건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라모트가 동생을 보며 물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장군께서 모르실 리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 결 보면, 괜한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닐까?"
당연한 우려였다. 보리스가 처음으로 목소리를내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는 조용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것을 암묵적인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르다. 지금까지는 허용선 내였다면, 이것은 성질이 다른 문제였다. 군의 방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형님은 너무 걱정이 많으시오. 조금 더 대범해지는 것이 어떻소?"
"뭐?"
"나도 형님도, 그리고 공자님도, 엄밀히 따지면 장군의 수하요. 수하가 주인에게 이런저런 진언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란 말이지. 형님, 생각해봅시다. 장군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아니오? 그분이 언제 아랫사람들에게 특별히 엄하게 나오신 적이 있었느냔 말이지."
"그건……."
"잘 한번 생각해보시오. 모두가 장군을 어렵게 생각하고 있소.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오. 내 말은, 그분을 어렵게 생각하기에 그분께 말 한마디 올리는 것조차도 덩달아 어려워하고 있다는 거요. 바로 그게 잘못됐다는 말이지."
보리스는 로우렌의 다소 건들거리는 말투는 거슬렸지만, 내용 자체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부친은 특별히 수하들에게 엄하게 대한 적이 없지만, 모두가 그를 어렵게 여겼다. 과묵함 때문일까?
아니면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 때문일까. 그나마 그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몇몇은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말을 하는 편이지만, 그들이 무언가를 제안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오직 유일하게, 야스메티만이 이런저런 것들을 진언하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그의 자리를 대체할 자는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 내가 한번 말씀드려보겠다."
마음을 굳힌 보리스는 그대로 부진을 찾아갔다.
"군을 움직이자고?"
"예. 어차피 타고니어 페란차라는 자도 물러날 시기만을 재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움직인다민 그자는 물러날 겁니다.
우리는 피 흘리는 일 없이, 또 한 번 적을 물리치는 거지요."
"적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군터가 보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무심한 시선을, 보리스는 피하지 않았다.
"아군의 수는 적으나, 기세는 적을 압도합니다. 이미 한번이긴 상대이고, 다시 한번 싸운다 해도 결과가 다르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이 수천,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병사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이유냐?"
"싸우기 위해 나온 자들입니다."
"감당할 수 있느냐 묻는 것이다."
"허락하신다면, 선봉에 서겠습니다. 누구보다 앞에서 싸우고, 누구보다 늦게 물러나겠습니다."
군터는 잔잔하게 가라앉은 것 같은 눈에서 열기를 느꼈다.
젊은이의 치기? 공명심? 뭐가 됐든, 보리스는 본인도 모르는 본인의 열정에 한껏 취해 있었다.
만류해야 하는가? 혼을 내야 하는가? 군터는 자문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의 품에서 떠나간 자식이다. 도움을 바란다면 주겠으나, 먼저 나서서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군인으로서 전공을 탐하는 게 흠은 아니지 않은가? 전장에 나선 이상, 크고 작은 위험부담이야 모든 선택지에 공존하는 것이고,
"좋다."
생각을 마친 군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어있던 보리스의 얼굴이 풀리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
"뭐라?"
정찰병의 보고를 들은 타고니어 페란차는 인상을 찌푸렸다.
"최소 1만 이상의 대병력이 키파에서 출병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한나절 간격으로 연달아 들어오는 보고 역시 같은것을 이야기했다.
"적이 아군을 향해……."
"군터 크렘보르의 깃발이……."
적의 의도는 명확했다. 이쪽을 치려는 것이다.
소수가 다수를 공격한다. 절대 일반적인 일은 아니지만, 이미 잔카라스 데반과 흐르트리 파오를 연달아 물리친자가 아닌가, 자신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타고니어 페란자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왜 하필 지금이나는 것이다.
'설마 지원군이 온 건가?'
그럴 리 없다…고 단언하고 싶지만, 그는 전장에서 확신만큼 무서운 게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사방에 뿌려놓은 정찰병과 첩자들이 하루에도 서로 다른 수십 개의 소식을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이쪽을 향해 오는 또다른 적의 존재는 감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원군이 온 게 아니라면, 이제 와 이렇게 나을 이유가 있는가? 어차피 머지않아 철군해야 하는 적을 상대로?
'기만, 철군?'
점잖은 중년 무장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
보리스는 군의 선봉에 있었다. 그라모트와 로우렌이 그의 뒤를 양옆에서 따랐다.
"경하드립니다. 장군."
"장군은 무슨."
웃음기가 묻어나는 로우렌의 말에 보리스는 코웃음 쳤다.
"어찌 그러십니까. 자그마치 3천이나 되는 병사를 이끄는 장군께서"
"어중이떠중이 3천이지, 반 이상이 용병 아니더냐."
키파의 시장 비후스 자번의 활약 덕이다. 군터는 그에게 시민들을 모병하고, 용병들을 고용할 것을 명했는데 그는 받은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모병으로 모집한 빙력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특유의 수완을 발휘하여 용병들을 내거 고용하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다 잘 되기는 했지만, 용병들 때문에 크게 데일 뻔한 경험이 있는 무관 중 몇몇은 돈에 팔려 다니는 용병들을 믿을 수 있겠냐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어쨌든 덕분에 군대의 머릿수가 꽤나 늘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보리스의 휘하로 배속되었고,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전투가 벌어질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보리스가 피식 웃었다. 입가에 번진 웃음은 나타날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