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화
자콥 트라소프는 평야에 늘어선 군대를 보았다.
보병 1만 5천, 궁 5천에 기병 3천, 도합 2만 3천의 대병력,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대군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적이라도 무찌를 수 있을 것만 같고, 그 어떤 성벽이라도 넘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하지만 자콥 트라소프는 그 모든 벅찬 감정이 착각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대군이 보이는 질서정연함은 겉모습만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최소한 저들의 절반가량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앞뒤분간 못하고 날뛰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저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는 대군은, 사실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와아아아-!
성벽을 가득 채우다시피 한 테리브란의 시민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그들은 그동안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전쟁이 몇 달 안에 승리로 끝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잘 짜인 거짓에, 연극에 속아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잠잠하게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믿음과 기대가 턱도 없는 것임을 알게 될 테지만, 그래도 좋다. 그때가 되면 상황은 지금보다 한층 더 나아질 테니,
'쉽지 않군.'
바라눔 트라소프,
자콥 트라소프는 그의 용맹한, 배다른 형제를 떠올렸다.
황도에 있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범상치 않은 자임을 알아차렸다. 물론 그때는 지금과 같은 미래를 상상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전하"
"외숙.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조정의 일을 부탁하겠소."
"맡겨주십시오."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담담한 척하지만, 자콥 트라소프는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명분을 얻었으니 이리저리 설쳐댈 생각에 들떠있을지도 모른다.
자콥 트라소프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힘 있는 귀족은 보통 전쟁의 승패에 목숨을 위협받지 않으니까. 하지만 제레이스는 경우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외적이기에, 이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가문이 통째로 무니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지 않을 덴데도 눈앞의 권력다툼에 눈길을 돌리는가.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자콥 트라소프는 그런 표현보다는 인간적이다. 라고 해야 옳다고 여겼다. 노예, 빈민에서 귀족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라면 모두 똑같다. 그의 외숙이 지금 보이는 모습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는 모를 테지만, 본인의 귀족적인 면을 과시하는 것을 즐기는 모습조차 지극히 인간적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자콥 트라소프는 그의 외숙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신뢰했다. 적어도 그는 탐욕스러운 인간일지언정 괴물은 아니니까.
'하지만 외숙.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요.'
신하, 특히 외척 세력이 크는 것은 어느 권력자라도 경계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그도 왜 그래야 하는지 알았다.
"엘티그라. 네 외숙에게 조정의 일을 맡겼지만, 그렇다고 네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예, 아버지. 알고 있습니다."
엘티그라 트라소프, 그의 장남, 그의 후계자. 그의 모든 것.
"그 어느 때건, 절대 마음을 놓지 마라. 네 외숙은 너를 돕겠지만, 그건 너를 위해서가 아니다."
"저를 위하는 것이 외숙과 외가에 득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지금은 이득의 방향이 일치하나, 언제까지 그렇지는 않을 테고요."
정말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이해한 척만 하는 것일까.
전자이기를 바라지만, 후자라도 상관없다.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될 일이니,
"네 외숙을 지켜봐라. 걸국은 네가 부려야 할 사람이다."
엘티그라 트라소프가 웃었다.
"설마 그렇겠습니까. 아버지의 시대가 끝나려민 아직도 한참 남았습니다. 제 시대에 거느려야 할 사람은 외숙이 아닐 테지요."
"아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싸움이 끝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을 다 처리하고 나면 네 시간이 올테니."
엘티그라 트라소프는 침묵했다. 그는 부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후계자였으나, 그렇다고 마냥 기세등등하지는 않았다. 그는 현재 자신의 위치가 부친의 총애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았고, 혹시라도 그 총애가 사라진다면 그 순간 자신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만에 하나라도 부진의 심기를 기스를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지양해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네 시간이 오래지 않아 올 것이라는 부진의 말은 달콤하기 그지없었지만, 대놓고 거기에 동의하는 모양새를 보이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물론 부친의 말이 떠보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어쨌거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여기서는 그저 부친의 승리를 기원하는 아들의 모습이면 족하다. 진심이기도 했다. 어차피 이 전쟁에서 진다면 그 어떤 미래도 없을 테니까.
***
"보리스 크렘보르가 장군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를? 하하. 과한 생각이군."
"장군, 하지만."
"과한 생각이라고 했네, 혹 그런 생각을 밖에서 드러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게나."
"…알겠습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불만이 있어 보이는 수하를 슬쩍 곁눈질하고는 손을 내저었다. 깍듯이 군레를 취한 수하가 물러가고, 홀로 남은 그는 피식 웃었다.
'견제라니 너무 순진한 생각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군권이라는 것에, 나아가 권력이라는 것에 너무 목을 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권력이라는 것은 세상 그 어떤 보물과도 비할 수 없을 귀중한 것이지만, 이곳에서 권력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모두 군터 크렘보르 아래에서 벌이는 소꿉놀이일 뿐.'
보리스 그렘보르는 용맹하고 저돌적이지만, 어리석은 사내는 아니다. 그와 이곳저곳. 이런저런 일들을 함께하며 확실히 알았다. 그런 그가 이런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벌이는 까닭은, 이곳에서 권력에 다가가는 것이 자신에게는 의미가 없어도 그에게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외부인이지만, 보리스 크렘보르는 그렇지 않다. 군터 크렘보르의 독자이자 후계자가 아닌가?
'그나저나 상당히 노골적이군, 부진과의 관계가 원만한 모양이지?'
후계자가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지만, 대부분 그런 노력은 비극으로 끝나곤 한다. 현 주인이, 미래의 주인이 너무 일찍 치고 나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후계자에게 허락한 것은 미래지, 현재가 아니다. 이 사실을 모르거나, 미래와 현재를 헷갈린 무수한 후계자들이 자신들의 조급함 때문에 자리를 잃고 몰락했다. 그러나 보리스 크렘보르는 그런 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독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만큼 부친과의 사이가 끈끈한 것일까.
'아니, 그게 아닐 것이야.'
군터 크렘보르의 지위가 후계자가 아무리 치고 나온다고 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건하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이곳에서 절대적이다. 그 외의 표현은 쓸 수도, 떠올릴 수도 없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임시 사령관직을 맡았던 프란시스 티브리악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군대의 충성심은 확고하다. 그 충성심은 크렘보르가 아니라, 군터 크렘보르에 대한 충성이다. 가문이 아닌 개인에 충성한다는 것은 쉽게 보기 힘든 일이지만, 크렘보르라는 가문 자체가 역사가 깊지 않기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크렘보르라는 가문을 만든 것이 군터 크렘보르 본인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군대가 군터 크렘보르에게 바지는 흔들림 없는 충성심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전의 용사만이 가능한 일이지.'
군대에 돈을 아끼지 않는 귀족은 많다. 많이 베푸는 만큼 돌려받는 것도 많은 것이 이치이니, 그런 자들은 대개 군대의 충성을 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에도 한계는 있다. 돈으로 사는 중성이라는 것은, 그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으니까,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그들을 섭섭하지 않게 대우한 자들만이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진짜 충성심을 얻을 수 있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등을 돌리지 않고, 어떤 일이 닥쳐도 등을 돌리지 않는 절대적인 충성심.
그런 자들은 정말 흔치 않지만, 군터 크렘보르는 그정말 흔치 않은 자 중 하나였다. 적어도 솔롬에서 온 병사들만큼은 그의 사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나더라도, 크렘보르 가문은 비상할 것이다.'
이곳에 데려온 병사들이 전 병력은 아닐 터. 그것을 고려한다면 크렘보르 가문의 저력은 여느 역사 깊은 귀족가문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다. 어찌면 그 이상일수도 있고, 그런 가문은 설령 바라눔 트라소프가 승리하더라도 중히 쓰려고 할 터. 물론 자콥 트라소프가 승리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그에 반해……."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가에서 온 서신을 다시 한번 읽은 후였다.
전장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크렌도 전쟁의 영향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많이 안정됐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처음에 비해서 그런 것일 뿐. 아직도 바크렌에는 크고 작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까지 터지고, 전황마저 좋지 않으니 억눌러 놓았던 혼란이 독버섯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형국이었다.
부친과 가문의 인사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서신으로 접한 소식만으로도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기회고, 누군가에게는 재앙이란 말이지.'
전쟁을 반기며 환호하는 자들이 있다. 반면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자들도 있다. 전쟁에서 기회를 엿보는 자들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우려하는 자들, 티브리악 가문은 명백히 후자다. 그러니 가문의 후계자로서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프란시스 터브리악 개인은 이야기가 다르다.
'고생들 하시오.'
터브리악의 후계자가 아닌, 프란시스 티브리악 개인은 명백히 전자다. 그렇기에 그는 긴 한숨 뒤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