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4화
얼굴을 반쯤 가릴 정도로 로브를 깊게 눌러 쓴 사내가 성문을 지나 도시로 들어섰다. 얼굴도 보이지를 않으니 사실 그를 사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다만 작지 않은 제구로 어림짐작할 뿐.
"하루 묵을 만한 여관이 있느냐."
대로를 따라 걷던 그는 주변을 지나던 꾀죄죄한 소년 하나를 붙들고 물었다. 후드의 그늘에 가린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잔뜩 마르고, 때가 끼어있었다. 적지 않은 날들을 고생하미 보낸 사내의 목소리였다.
"아……."
대놓고 경계심을 드러내던 소년은 사내의 말을 듣고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경계심은 상당 부분 가셨지만, 바라는 것이 있는 눈초리였다.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동전 하나를 뒹졌다.
소년은 떨어지는 동전을 먹이를 낚아채는 맹금처럼 움켜잡았다.
"따라오세요."
이런 일이 꽤 익숙한 듯, 처음 본 사람을 이끄는 소년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처음 사내가 말을 걸었을 때 경계심을 내비쳤을까. 그건 아마도 습관, 혹은 학습된 방어기제였을 것이다.
어수선한 시대이지 않은가. 비어있는 황좌를 노리고 일어난 자들은 그들의 야망을 위해 무지막지한 피를 뿌렸다.
지금이야 남은 황위 도전자가 세 명뿐이지만, 그렇게 추려지기 전에는 제국 전역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매일 일어났었다. 심지어 황도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그 어떤 곳이라도 전화(火)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이 도시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지금은 제법 안정된 것 같지만, 돌아다니는 시민들의 표정에는 아직도 불안과 두려움이 엿보였다. 매일같이 날아드는 각지의 소식, 혹은 소문이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겠지.
'망할 녀석들'
사내는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하다가, 문득 울화가 치밀어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제국을 위해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놈들이 황좌의 주인이네 어찌네 하면서 설치고 있는 꼴이라니. 사내가 보기에는 그들 모두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자격 없는 자가 보물에 욕심을 내며,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 무수한 제국민의 목숨을 장난감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놈들이 죽어 마땅한 놈들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죽어 마땅하다 하겠는가.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졌던 것은 바로 나다.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자는 오직 나뿐이란 말이다!'
사내가 이를 부득 갈았다. 다행히 앞서가민 소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사내는 심호흡을 하며 노기를 가라앉혔다.
때때로 지금처럼 노기가 치밀곤 했으나, 그래도 그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직 그에게는 불안한 심신을 다스릴 이성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곳입니다. 괜찮은 곳이에요. 약간의 비용만 내면, 목욕물도 쓸 수 있고, 식사도 부드러운 빵으로 제공합니다.
무엇보다 방이 깔끔하죠. 빗물이 새지도 않아요."
동전값을 마친 소년이 홀가분한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사내는 무뚝뚝한 여관 주인에게 비용을 내고 오늘 하루 그의 것이 된 자그마한 방에 들어갔다.
"빌어먹을."
방이 깔끔하다고? 그런 말을 지껄인 소년의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시 했지만, 역시 소년이 생각하는 깔끔함은 그가 생각하는 깔끔함과 전혀 달랐다.
"후우."
또 한 번 화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이번엔 금방 가라앉았다. 기대하는 것보다 실망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였기에, 이런 사소한 부분에 크게 매달리지는 않았다.
예전의 그를 아는 자라면 필시 크게 놀랐을 것이다.
고귀하게 태어나, 고귀하게 살아온 그는 부족함도 모르지만 만족함도 모르던 사내였기에.
'대체 언제까지 이런 시궁창에서 발버둥 쳐야 하는가.'
알고 있다. 과거에 미련을 거두지 않는 한, 앞으로의 나날이 더욱 힘겨우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는 과거의자신을 잊지 않았다.
아니, 잊지 못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나, 지금도 눈을 감으면 황도의 대로가 펼쳐지고, 웅장한 황궁의 문이 열리는데 말이다.
'포기하지 않아. 내가 바로 제국의 구원자다. 내가 이 나라를 구해냈단 말이다!'
그날 밤. 그는 꿈속에서 추격자들과 맞닥뜨렸다. 그는 추격자들에게 사납게 일갈했지만, 추격자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휘둘렀다.
'으…으으!'
누렇게 색이 바랜 담요를 움켜쥔 채, 잔뜩 몸을 웅크린 사내가 덜덜 떨었다. 그 긴 떨림은 새벽빛이 밝아질 매까지 이어졌다.
***
자콥 트라소프의 진정이 코앞까지 다가오면서 전선의 분위기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군터는 한가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키파의 시장관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시의 내정은 그의 소관이 아니었고, 군무는 그의 수하들이 그를 대신해서 보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수하들이 올리는 보고를 듣고, 드물게 그의 결재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 결재해주는 것뿐이었다.
"……."
오늘도 군터는 사색에 잠겨있었다. 정확히는 사색이라기보다는 내면의 관조에 가까웠다.
눈을 감기만 했을 뿐인데 영혼 감옥에 갇힌 영혼들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군터는 자기 자신의 영혼마저 감지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이전까지 그가 하지 못했던 일이다.
군터는 자신의 감각이 이렇게 발전한 것이 일전에 헤이모라에서의 경험 덕분임을 알았다.
헤이 모라에서 그는 줄카와 겨루었었다. 전력을 다해서 부딪친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그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서로의 무공을 겨룬다기보다는, 뭐랄까…서로의 존재를 비교해보는 것에 가까운 느낌? 이조차도 정확한 표현같지는 않지만, 이 정도가 군터가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아무튼, 헤이모라에서의 경험 덕에 군터는 영혼을 감지하는 능력이 크게 늘었음을 제감했다. 비단 감지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영혼 감옥의 영혼들을 부릴 수 있음을 확신했다. 이전에도 영혼을 부리는 것에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준비시간은 필요했다. 길지는 않으나 과정이 필요했다고 할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과정도 없이 언제든 뜻대로 영혼을 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군터는 영혼 감옥 깊숙이 잠든 할렌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영혼은 이제 간혈적으로 꿈들거리고 있었다. 역시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군터는 그것이 잠꼬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머지않았군."
이전까지는 막연한 기대였다면 이제는 거의 확신이었다.
영혼에 대한 감지 능력이 늘어난 만큼, 군터는 할렌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도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할렌의 영혼이 아니라 지금쯤 연구에 매진하고 있을 모페이브와 나짐을 뜻함이었다. 할렌의 영혼이 깨어나는 것은 기다려왔던 일이지만, 그 시기가 너무 이르면 마냥 좋다고 하기에는 힘들다. 감옥에 갇혀 있는 영혼들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감옥에 갇힌 영혼은 어떤 식으로든 변한다. 그 변화가 크는 작든, 감옥이나 아니면 같이 갇혀 있는 다른 영혼들에 영향을 받는다. 어쩌면 그것은 변화라기보다는 적응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육신을 지닌 생명이 아닌, 알맹이만 남은 영혼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군터도 단정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할렌이 변치 않기를 바랐다. 자신이 알던, 기억하던 할렌으로서 다시 그의 앞에 서기를 원했다. 그러니 깨어난 할렌이 영혼 감옥에서 길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썩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모페이브와 나짐은 나름의 성과를 내고 있었다. 매일 도착하는 두 장의 서신이 그를 증명했다.
모페이브는 헤이모라에서, 나짐은 솔롬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비록 당장 크게 눈에 띄는 결과물은 없었지만, 꾸준하게 성과가 나오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특히 나짐결과를 내놓는 데 그리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직접 서신으로 말을 전하기도 했다.
군터는 나짐의 그 자신감이 젊은 술사의 지기가 아니기를 바랐다.
"보리스 공자의 행보가 아주 노골적입니다."
군터가 사색(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보이는)에 잠겨있는 동안, 밖에서는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났다. 그중 하나는 보리스에 관한 일이었다. 토어릭은 보리스의 일을 군터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거의 하루건너 하루골로 그를 찾아와 보고했다.
"제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보리스 공자는 대범하게 나서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선은 분명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근래에 보리스는 군부의 인사들과 두루두루 연을 쌓고 있었다. 그전에는 안면은 있어도 친분은 없었다면, 이제는 그 이상으로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할까. 당연히, 그것이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라는 것은 제삼자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보리스 공자가 그렇게 대놓고 나서는 것이 장군의 허락을 얻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들린 생각은 아니지."
허락은 하지 않았다. 에초에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하지만 보리스의 행동을 군터가 제지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암묵적인 허락이라고 봐도 좋았다.
"보리스 공자는 본인의 이름을 알리고자 합니다. 크렘보르의 후계자라는 이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일일이 일러바치는 것치고는, 너 역시 기껍게 여기는 듯하구나."
"하하.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실이다.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토어릭은 보리스가
전민에 나서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보리스 공자가 선을 넘을 리 없지.'
보리스는 부친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군터 크렘보르는 맨손으로 일어나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사내다. 그를 향한 군부의 지지는 굳건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다. 그 굳건한 지지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절대로 말이다.
보리스가 각고의 노력으로 자신만의 성을 쌓는다고 한들, 그것은 부친인 군터의 앞에서는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든지 손만 대면 허무하게 무너져버릴,
물론 이는 괜한 가정에 불과하다. 보리스는 선을 분명히 알고 있고, 야망과 망상을 헷갈릴 만큼 어리석지 않으니.
'여느 귀족가의 후대들보다는 훨씬 건설적이지 않은가.'
타고난 축복을 자신의 능력인 양 착각하고, 밥만 축내며 사고만 치는 머저리들에 비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