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3화
바라눔 트라소프는 친정에 나섰는데, 어째서 자콥 트라소프는 테리브란의 왕궁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는가.
감히 황자의 앞에서나 드러난 자리에서 대놓고 입을 놀리지 못했을 뿐, 이는 사실 전쟁이 발발했을 때부터 꾸준하게 나온 이야기였다. 그들이 전설적인 정복 군주인 황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이런 이야기를 더 부추겼다.
카라누르의 위대한 전쟁 당시, 황제는 항상 전장에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항상 사기가 높았으며, 그의 이름은 제국의 적들에게 있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자콥 트라소프도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황제의 아들에게 기대하는 바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라눔 트라소프와의 싸움에서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기회라고 보는 걸까요."
엉덩이가 무겁던 자가 갑작스레 이렇게 나선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필시 바라눔 트라소프의 배후를 괴롭히고 있는 동맹의 존재가 그 이유일 터.
"글쎄."
"모양새는 괜찮겠군요. 바라눔 트라소프는 물러나거나, 최소한 숨을 골라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황자께서 전면에 나서니, 세인들이 오해하기 딱 좋은 모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자콥 트라소프가 나서니 바라눔 트라소프가 꼬리를 말았다. 그런 이야기가 돌게 될 것이다. 자연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아무튼, 전황이 크게 변하겠군요."
"그거야 두고 봐야 하는 일이지 않겠나."
시어문드가 토어릭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여력이 없기는 아군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이 공세를 멈춘다면 숨통이 트이기는 하겠으나, 없던 힘이 갑자기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황자가 나선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여유 병력은 없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진즉 밀리고 있는 전선에 투입하지 않았겠는가. 자콥 트라소프가 직접 움직이는 만큼 징집병을 끌어모아서라도 구색은 갖추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네 말대로, 두고 보면 알 일이다."
군터도 시어문드의 말처럼, 극적인 변화는 없으리라 보았다. 몇몇 의욕이 넘쳐 흐르는 자들은 생각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
"크루트니악?"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열에 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작스레 나타난 위협의 정체를 알아냈음에도 그들의 의문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놈은 스스로 이름을 밝혔습니다."
플라파가 불탔다. 스스로 크루트니악이라고 밝힌 적은 신비로운 군대를 이끌며 플라파 인근을 휩쓸었다. 정체는 물론, 그 목적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정당한 주인이 돌아왔으니 가증스러운 침략자들은 사라지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적에 대해서 그들은 그들의 적이 스스로밝힌 이름 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크루트니악…크루트니악…… 설마!"
적의 정체를 알아낸 것은, 그 실마리라도 잡은 것은 한 나이 지긋한 사관이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면서였다.
"제국이 정복 전쟁을 벌이던 당시, 모우마와 몬케 일대를 지배했던 야만인의 왕. 그의 이름이 크루트니악이었습니다."
"그 야만인의 왕이 다시 돌아왔다고? 사칭이겠지?"
정복 전쟁이 대체 언제 적 정복 전쟁인가. 그때 당시 제국에 패하여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그보다는 자콥 트라소프 쪽이 그 야만인 왕의 이름을 빌려 물을 흐리고 있다고 보는 쪽이 훨씬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사칭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크루트니악이라는 이름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까닭이 있습니다. 그는 크루트니악이라는 이름보다 황량한 산맥의 제왕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했지요."
"거창하군."
뭐가 없는 자들일수록 스스로 거창하게 꾸미는 법이다. 하물며 야만인의 왕이었던 자가 아닌가.
그러나 그의 비웃음에, 늙은 사관은 고개를 저었다.
"거창할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크루트니악은 단순한 야만인의 왕이 아니었으니까요. 당시 그를 상대했던 줄카 전하도 고전 끝에 그를 쓰러뜨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흐음."
"크루트니악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은 물론, 그의 군대 역시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기록이 여럿이고, 표현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어떤 이는 그들을 유령이라고까지 표현했으니까요."
"유령이라고?"
소설도 아니고,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라면 주관을 배제하고 있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 기록에 유령이니 뭐니 하는, 믿기지 않는 표현이 쓰였단 말인가? 어이가 없지만, 마냥 가볍게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장 플라파가 불탔고, 그 외 여러 성과 도시가 공격을 받았으니까. 적은 실존하며, 그 적은 오래전에 죽은 야만인의 왕을 자칭하고 있다. 아무리 터무니없게 들리는 이야기라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이다.
"으음."
만에 하나라도 지금 날뛰고 있는 적이, 정말 옛 야만인의 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에 하나라도 그게 사실이라면…… 아니,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이미 전장에 나가 있는 황자에게 전령을 보냈다. 이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해 소상히 보고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답이 올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할 일은 그때까지 최대한 피해를 줄이고, 적에 대해 파악하는 것일 터.
"전하께 전령을 보내겠다."
만에 하나고, 여전히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보고해야 한다.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묻힌 이름 아닌가. 시대를 착각한 망령이 판을 치는군.'
크루트니악에 대해 보고하기로 한 그의 판단은 옳았다. 이틀 뒤. 인구 4만의 도시 히폰이 함락당했다. 이제껏 '크루트니악'에 당한 도시와 성이 그랬듯, 생존자는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접근한 정찰대가 발견한 것은 탄내와 시체 썩은 내만이 가득한 도시였다.
***
[크루트니악?]
거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낯설면서도, 어딘가 귀에 익은 이름을 곱씹으며 방대한 기억 속을 헤집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일렁이는 어둠을 옷처럼 걸친 사내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모우마와 몬케 일대에서 줄카와 겨뤘던 놈이다.]
[아아. 그래. 그랬지. 헌데 그놈이 왜?]
[신주의 봉인이 풀렸다. 놈이 다시 세상에 나왔고, 해묵은 분노를 풀어놓고 있지.]
뜻밖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거인, 아간투스베록은 그 한 마디만 듣고도 전후 사정을 파악했다. 외관만 보면 모든 것을 우악스럽게 힘으로 해결할 것 같지만, 사실 아간투스베록은 꽤 지혜로운 자였다. 그가 머리를 쓰기보다 힘으로 일을 해결하는 것은, 그것이 훨씬 쉽고 간단하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쓰는 것이 더 간단하다면, 그는 기꺼이 머리를쓰는 편이었다.
[녀석이 잔꾀를 부렸군.]
[그래. 꽤 괜찮지.]
[몰렸다는 뜻이로군.]
아간투스베록은 줄카를 싫어했지만, 동시에 그를 잘 알았다. 줄카는 그와 동류였다. 줄카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그것을 인정했다. 머리를 잘 쓰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매사를 직접 움직여서, 힘으로 해결하는 일이 많은 줄카가 이런 잔꾀를 부렸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몰려있다는 반증이다.
[개입할 생각인가?]
크루트니악이라는 녀석이 풀려난 것은 예상 밖의 일이다. 어쩌면 판을 흔드는 변수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아간투스베록은 개입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의 시선은 어둡고 반투명한 사내에게 고정되었으나, 물음은 그의 뒤에 있는 늙은 괴물에게 향했다.
[아니. 그는 이런 변수를 기껍게 여기고 있네.]
[망가지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건가?]
아간투스베록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노괴물의 끝모를 분노와 악의는 매번 놀랍기 그지없다. 그 정도의 원한을 그간 대체 어떻게 억누르고 있었을까?
'아니. 오히려 억눌러왔기 때문에 더 썩어문드러진 것일 수도 있지.'
흥미로운 추측이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다. 어쨌거나 노괴물의 뜻대로 흔들리는 판이, 지켜볼 맛이 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래서, 그 소식을 전하려고 왔나?]
[겸사겸사지. 네 상황을 확인도 하고, 별도로 전할 말도 있고.]
사내의 시선이 슬쩍 아래로 내려갔다. 아간투스베록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동시에 손으로 목덜미를 훑었다. 그리 깊지는 않지만, 기다란 흉터가 손 끝에 걸렸다.
[주고받았다. 내 목을 노린 대가로, 놈의 얼굴에 훈장 하나를 새겨줬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지만, 그 속의 진의는 숨길 수 없다. 숨길 생각도 없었고, 결코 쉽지 않은 일전이었다. 아간투스베록과 줄카는 서로 상대를 죽일 각오로 싸웠다. 숱한 피해가 있었고, 그들 둘은 직접 무기를 부딪치며 생사를 겨루었다. 그리고 예상했듯, 결국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이를 갈며 물러나야 했다.
[고생했군.]
[시답잖은 소리를 하려고 온 것은 아닐테고, 용건이 뭐지?]
그들은 서로의 안부나 챙길 만큼 살가운 사이가 아니다. 아간투스베록은 반투명한 사내를 사납게 노려보며 물었다.
사내가 직접 그를 찾아와 전할 말이라면 결코 그 내용이 가볍지 않을 터. 아간투스베록은 벌써부터 불쾌해졌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지니, 대번에 공기가 바뀌었다. 사납고 무거운 기세가 흘러나오며 사내를 압박했다.
그러나 사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간투스베록을 똑바로 바라보며 용건을 꺼냈다.
[사람 하나를 찾아줘야겠다.]
[사람을 찾아? 그런 일이라면 네놈 전문이 아니냐.]
[꽤 오래전부터 찾고 있었다. 하지만 몸을 숨기는 솜씨가 뛰어나 꼬리를 잡기도 쉽지 않았지. 바로 얼마전에 어렵게 흔적을 찾았는데, 아무래도 네 쪽으로 도망친 것 같다.]
아간투스베록은 군주로서 자신만의 영지를 지녔다. 황제라도 그의 땅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했고, 황제가 죽은 후로는 그 누구도 그의 영지에 허락 없이 발을 디디지 못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에는 수도에 눌러앉은 늙은 괴물도 포함이었다. 그럴 능력이없어서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었다. 물론, 들켰을 때의 뒷감당이 문제되기 때문이기도 했고,
[누구냐.]
아간투스베록은 상대가 찾는 대상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캐물은 것은, 평온한 표정의 상대를 조금이라도 흔들어보고 싶은 자그마한 욕심 때문이었다.
[나를 몰아세우지 말게.]
예상했던 대로, 사내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찾는다면 알게 될 거야. 노고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게.]
짤막한 한 마디만을 남기고, 사내는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