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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72화 (772/1,064)

772화

아드리안의 예상대로 병사들은 잠잠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보리스의 연설이 꽤 유효했던 것처럼 보였다.

"잘하셨습니다."

로우렌이 활짝 웃으며 보리스를 칭찬했다. 이 일로 인해 보리스는 군부의 지지를 얻었다. 여기서 말하는 군부란 솔롬의 군부였다. 솔롬에서 온 장교와 병사들은 군터 크렘보르에 대한 굳건한 충성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의 사령술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판니른과 키파의 병사들을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의 아들인 보리스가 나서서 시원하게 일갈했으니, 그들은 아드리안이 느낀 것보다 더 큰 통쾌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통쾌함은 곧 보리스 크렘보르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나를 지지하겠지만, 어떤 이들은 나를 고깝게 보겠지."

"만인의 지지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지요. 괘념치 마십시오. 공자님을 고깝게 보는 자들이 있다 한들, 어차피 그들은 공자님의 앞에서 입을 열지 못합니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군."

마음이 무겁지는 않다. 다만 이번 일로 존재감을 드러냈으니, 앞으로는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이전까지 그를 단지 군터 크렘보르의 아들, 내지는 크렘보르의 후계자로만 여기던 이들이 '보리스 크렘보르'를 다시 보았을 테니.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리 말을 하느냐."

말만 보면 꼬인 것 같지만, 가벼운 핀잔이었다. 듣는 로우렌도 그것을 알기에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더군요.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쉽다고 말입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그런 걸 겁니다.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러셔야 하고요."

"…그래. 그래야겠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보리스는 뛰는 가슴을, 가라앉지 않는 흥분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에 힘썼다.

'내가 지금 즐거워하고 있는 건가?'

병사들 앞에서 소리치던 그때, 보리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을 느끼며 전율했다. 그 후, 솔롬의 무관들이 그를 찾아와 웃는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때도 마찬가지.

군터 크렘보르의 아들이 아닌, 보리스 크렘보르로서 맞닥뜨린 세상은…제법 했다.

***

"보리스 공자가 본인의 존재감을 키우려 하는군."

토어릭은 보리스의 의도를 정확히 읽었다. 부친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아들, 정도로 생각하기에는 나선 시기도 그렇고 나선 이후의 행보도 심상치 않았다.

"신경 쓰이나?"

시어문드의 물음에, 토어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신경 쓰이기는커녕, 난 오히려 반기는 입장이네."

"호오."

"보리스 공자는 크렘보르의 독자이자 후계자지. 나를 포함해서 적지 않은 이들이 장군께 몇 번이나 간언했으나, 장군께서는 여전히 재혼을 생각하고 계시지 않는 것 같아. 그러니 이변이 없는 한, 보리스 공자가 장군의 뒤를 잇지 않겠나."

토어릭은 따지고 보면 보리스를 지지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는 아드리안과 달리, 주인의 후계자에 대한 존중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보리스가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겠다면, 힘써 돕지는 못하더라도 응원할 마음 정도는 있었다.

"할렌의 두 아들이 보리스 공자를 돕는다고 들었는데."

"로우렌이라는 녀석이 제법 머리를 굴릴 안다더군. 할렌의 아들이 머리 쓰는 재주가 있다니, 재미있지 않나?"

시어문드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입맛을 다셨다. 그는 할렌과 친분이 두텁지 않았기에, 그의 아들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댈 입장이 안 됐다.

가볍게 웃음 짓고 있던 토어릭이 뭔가 생각이 났는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일로 군의 분위기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그런 일은 없을 걸세. 속으로 꽁해 있는 이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대체로 납득한 분위기야."

시어문드가 생각하기에, 이런 일은 자그마한 소란 정도에 불과했다. 무지한 병사들이 시답잖은 것으로 심각한 척하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지 않은가. 보리스 크렘보르가 끼어들면서 조금 일이 커지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다. 교단의 독실한 신자라 한들 멀리 있는 신보다는 가까이 있는 상관에게 복종하기 마련이고, 그 상관이 솔선수범하여 전투를 이끄는 용장이라면 그에 대한 존경심이 약간의 껄끄러움 따위에 흐려지지 않음은 당연하다.

"자네야말로 걸리는 점이라도 있는 겐가?"

"보리스 공자가 일을 벌이기 전에 장군께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는 점이 조금 신경 쓰이는군."

"아하."

알겠다는 듯, 토어릭이 피식 웃었다.

"그 나이 때의 젊은이가 충분히 할 법한 일 아닌가."

"그래. 그렇지."

그러니까 조금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하는 건 모든 자식의 본능이나 마찬가지이니.

"하지만 자네 말이 맞기도 해."

"음?"

"보리스 공자는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그 녀석들은 그러면 안 돼."

시어문드는 그 녀석들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뻔하지 않은가.

***

"보리스 공자를 부추긴 것이 자네지?"

로우렌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토어릭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부친과 친분이 있었던 탓에, 로우렌은 토어릭에 대해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의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이런 질문, 혹은 추궁이 날아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보리스 공자는 부추긴다고 부추기는 대로 움직여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말을 돌리는군."

"……."

토어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자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조언을 드렸을 뿐입니다."

"자네가 야심만만한 젊은이라는 것을 알아. 하지만 그 야심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루려 하지 않았으면 하네."

"조언입니까?"

"조언이자 충고, 그리고 경고라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명심하겠습니다."

로우렌이 물러간 후, 토어릭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자는 별것 아닌 일에 너무 심각하게 구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토어릭은 만에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군터 크렘보르의 수하이며, 동시에 크렘보르 가문의 가신이었다. 조금 신경 써서 만에 하나를 예방할 수 있다면 그래야만 했다. 본래 그런 일은 야스메티의 몫이었으나, 이제는 야스메티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고 가셨습니다.'

토어릭은 야스메티가 자신을 불렀던 날을 떠올렸다. 잔뜩 초췌해진 몰골의 그는 자신에게 자신의 사후를 부탁했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면서 말이다. 그때는 그럴 능력이 없다며 사양했지만, 말뿐이었다. 결국은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지 않은가.

'보리스 공자는 크렘보르의 후계자이자, 독자다. 그를 통해 부귀와 양명을 이루려는 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

토어릭은 보리스가 그런 자들을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을 지녔다고 믿었다. 흔든다고 해서 흔들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게다가, 설령 보리스가 흔들린다고 해도 문제는 없다. 자식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군터지만,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쓸 테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만에 하나라는 말이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선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

야심이 있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다그쳐서라도 고치는 것이 옳다. 친우의 아들이 아닌가. 토어릭은 만에 하나라도, 먼저 떠나간 친우에게 미안할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

"적의 공세가 주춤했다……."

자이드라 멕시스로에게서 온 전갈의 내용이다.

"장군."

"동맹이 움직인 모양이군."

줄카가 7황자에게 준 선물, 군터는 딱히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 그것을 동맹이라고 칭했다.

"양 전선이 동시에 주춤했습니다. 사실이라면, 이것은……."

공교롭게도 판니른 총독, 로드니 캄브라이도 비슷한 소식을 전해왔다. 시종일관 밀리던 전황이 소강상태를 맞았다는 것인데, 승기를 쥔 바라눔 트라소프가 굳이 이쪽에게 숨돌릴 시간을 줄 이유가 없다.

"다행이군요."

시어문드의 말처럼, 다행이라는 표현만이 적절했다. 리바스트라는 아록이든,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줄곧 수세였다. 적은 하루도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채 아군을 몰아붙였고, 그것은 아군에게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 부담이 어찌 아군에게만 적용되겠는가. 전투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마치 세차게 흐르는 물결에 몸을 맡기는 것처럼, 흐름을 잘만 이용한다면 큭 힘을 들이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도 마찬가지.

"바라눔 트라소프는 계속되는 승리로 그의 군대를 위무해왔습니다. 크든 작든 계속 승리했기에 그의 군대는 멈추지 않고 공세를 이어갈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번에 그는 처음으로 주춤했습니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혹은 애써 잊어왔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들겠지요."

쥬드 포트락도 그렇지만, 특히 바라눔 트라소프의 군대에게 휴식은 독이다. 그는 개전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광포하게 아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반격할 것 같은가?"

"모르겠습니다. 만약 반격한다고 해도 당장은 아니겠지요."

이제껏 쉼 없이 당하기만 했던 아군이다. 반격할 기회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더라도, 실제로 행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배짱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만한 배짱이 있는 이가 있을까? 군터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자가 있다고 해도 로드니 캄브라이는 아니다. 주인이 바뀐 카리아 가문이 나설 것 같지도 않고,

"움직인다면…조정에서 움직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시어문드의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7황자, 자콥 트라소프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테리브란을 나설 것이라는 소식이 군터를 비롯한 일선 지휘관들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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