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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71화 (771/1,064)

771화

"그러게 내가 뭐라 했느냐."

"으음."

로우렌은 이죽거리는 보리스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안함에 고개를 숙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는 그래서 오히려 더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제 실수를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셔야 합니다."

"음? 이번 일로 증명된 것 아닌가?"

로우렌은 군터가 자리를 비운 사이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그의 존재감을 키울 수 있다며, 임시 사령관이 된 그를 보리스가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로우렌의 걱정이 과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결론적으로 로우렌이 틀리고 보리스가 옳았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임시 사령관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만 충실히 해냈으며, 그 과정에서 본인의 존재감을 키우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더 자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정말 욕심을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이든, 아니면 상황 때문에 그랬는 마찬가지입니다.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건 어째서지?"

"상황이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보리스는 눈빛으로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고, 로우렌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 설명을 이어갔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티브리악의 후계자지만, 실상 그의 위치는 아직 위태롭습니다. 바크렌의 본가에는 언제든 그를 대신할 수 있는 형제들이 여럿 있고, 그는 지금 위험한 전장에 와 있지요."

"흐음."

"자청해서 전장에나온 것도, 그 자신도 본인의자리가 위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적당히 활약한다면 후계자의 자리가 더 굳건해질 테니까요."

처음 나누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처음 프란시스 티브리악과 조우했을 때부터 로우렌은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뒷사정을 짐작했었다. 그때 보리스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는데, 지금 와서 로우렌이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자 그 의중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게 문제 될 것이 있나?"

"공자님은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실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는 공자님의 경쟁 상대란 말입니다."

"푸흐."

보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실소했으나, 로우렌은 여전히 진지했다.

"가볍게 듣지 마십시오. 공자님은 프란시스 티브리악과 처지가 다릅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자신의 자리조차 불안정한 자이나, 공자님은 크렘보르 장군가의 독자이자 후계자입니다. 공자님은 자리를 굳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 공자님 본인의 이름을 높이셔야 합니다."

"크렘보르의 후계자라는 이름만으로는 부족한가?"

"거꾸로 질문을 올리겠습니다. 공자님은 그 정도에 만족하십니까?"

"……."

"저는 공자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제껏 제가 봐온 공자님의 모습을 토대로 추측할 뿐이지요. 잘됐군요. 이참에 시원하게 알려주십시오. 주인의 마음을 알아야 수족도 거기에 맞춰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요."

"수족이라니."

"저희 형제를 생각해주시는 공자님의 마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님. 저희의 사적인 친분은 차치하고, 저희는 공자님을 섬기는 신하입니다. 저희가 그러하듯, 공자님도 선을 분명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말한 로우렌은 보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에, 보리스는 처음으로 로우렌의 시선이 부담스럽다고 느꼈다.

"감히 짐작하기로, 공자님은 야심을 지닌 분입니다. 제가 틀렸습니까?"

보리스는 답을 미뤘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야심이라고 해서 꼭 거창한 무언가일 필요는 없다. 아니, 애초에 거창이니 소박이니 하는 것의 판단 기준은 개개인의 주관이 아니던가.

야심. 야심이라.

'있지.'

답은 곧 나왔다.

야심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심이 있기 마련이고, 그 욕심이 조금 더 그럴싸하다면 그것을 야심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래. 내게도 있다. 그 야심이라는 것이."

"그러시리라 믿었습니다."

로우렌은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동안은 추측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의 일로 추측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보리스가 실비아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그늘 속에서 때를 기다려도 좋겠으나, 조금 먼저 거기서 벗어나 나름대로 싹을 틔우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장군께서 그런 것을 꺼리실 분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부친은 자신이 욕심내는 것을 꺼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마도 아예 관심도 없을 것이다.

"경쟁자라고 해서 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을 존중하는 공자님의 태도는 저 역시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양보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챙길 수 있는 것은 챙기십시오. 거침없이 주장하십시오. 이곳에는 솔롬의 정예 병력이 와 있습니다. 장차 공자님의 신하가 될 군부의 요인들도 상당수가 와 있지요. 그들에게 공자님을 알리십시오.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될 리 없습니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보리스는 존재감을 드러내라는 로우렌의 조언을 곱씹었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그는 그런 일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가 해야 하는 일만을 해왔다. 하지만 로우렌의 조언을 들으니, 그런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기회가 생긴다면 놓치지 않으리라.

그런데 그렇게 결심하고 며칠도 되지 않아, 그 기회라는 녀석이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그게 사실이냐?"

평소와 달리, 보리스의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은 그라모트였다. 로우렌은 옆에 서서 듣기만 할뿐이었다.

"사실입니다. 전투 당시 장군께서 시체들을 일으키고, 조종하시는 것을 본 이들이 적지 않은지라……."

"그것을 묻는 게 아니다."

보리스가 변명하는 늘어지는 그라모트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았다는 것을 내가 모르겠느냐? 나는 그게 아니라, 아버지의 힘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승리를 일궜던 자들이 이제 와 그런 개소리를 지껄여대고 있는 게 사실이냐 물은 것이다."

"……."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라모트는 그저 근래 군중에 퍼지고 있는 소문과 분위기를 전한 것에 불과했다. 보리스 역시 당연히 그것을 알기에, 그라모트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속으로 화를 삭일 뿐.

보리스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싶을 때, 로우렌이 입을 열었다.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기회?"

보리스가 무슨 소리냐는 듯 로우렌을 쳐다봤다.

"뭐, 사실 그냥 흘리고 넘길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무지한 병사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들은 평생 여명 교단의 가르침과 제국의 규율 속에서 살아온 이들입니다. 그들이 사령술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내가 나서서 그들을 다독이라는 말이냐?"

"아니요. 공자님이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지, 이성이 아니니까요. 공자님은 그저 그들을 일깨워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사납게 변해 있던 보리스의 눈이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장군. 들으셨습니까?"

"음?"

"보리스 공자가 한 건 하셨습니다."

군터에게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한 이는 아드리안이었다. 일이 벌어진 것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그는 의아해하는 군터에게 밖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전했다.

"근자에 병사들 사이에서 장군의 그…사령술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나왔던 것을 아십니까?"

"안다."

군터에게는 그가 원치 않아도 알아서 소식을 전하는 눈과 귀가 적잖이 있었다. 그들은 키파의 대소사는 물론, 군중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크고 작은 일들을 놓치지 않는다.

근래에 군중의 분위기가 흐려졌던 것은, 군터의 입장에서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가라앉을 일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를 추종하는 장교들이 알아서 나설 일이었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리스 공자가 나섰습니다."

아드리안은 보리스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정확히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가 섬기는 대상은군터 크렘보르였고, 보리스 크렘보르는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였으나…그뿐이었다. 섬기는 주인의 아들. 딱 그 정도가 보리스에 대한 아드리안의 인식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 바뀌었다.

"병사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는군요."

보리스는 저돌적으로 움직였다. 흔히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때처럼 수하들을 부린다든가, 간접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손을 쓴다든가 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는 직접 움직였다.

사령술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는 이들은 판니른과 키파의 병사들이었다. 보리스는 직접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난날, 잔카라스 데반이 이끄는 대군이 키파의 성벽을 넘봤을 때를 기억하고 있나? 아군의 3배가 넘는 대병력이 공격을 개시했을 때, 너희 중 일부는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적적인 승리를 기원했을까? 아니. 어떻게든 살아남게 해달라고, 혹은 곧 죽을 너희의 영혼을 천상으로 이끌어달라고 빌었겠지. 아니라고 하지 마라!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해져라!"

보리스는 당황하는 병사들을 하나하나 노려보며 점점 언성을 높였다.

"기적과 같은 승리였지. 그렇지 않나? 그런데, 그게 정말로 기적인가? 신께서 당신의 사도를 내려 보내셔서 우리를 도우셨나? 아니. 아니지. 그때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감히 단언컨대, 내 아버지이신 군터 크렘보르 장군의 힘 덕분이었다. 그분께서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몇 배나 되는 적을 무찌르셨고, 그분이 일으킨 시체들이 해자에서 일어나 성벽을 오르려는 적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래! 너희가 사특하다 어떻다 떠들어대는 그 시체들 말이다! 지금 너희가 승리 후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너희 중 일부가 아직도 멀쩡히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은 군터 크렘보르 장군의 그 사특한 힘 덕분이야! 그를 부인하는 것은 너희의 승리를 부인하는 것이고, 너희의 멀쩡한 모가지를 부정하는 일임을 깨달아라!"

아드리안은 수하에게 전해 들은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읊었다. 그러면서 뭐가 그리 웃긴지, 몇 번이나 피식거렸다.

"뿌듯하지 않으십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변호한다는 건, 제삼자의 눈으로 보기에도 꽤 멋진데 말입니다."

"글쎄. 그렇게 생각한다면 넌 어째서 그렇게 웃어대는 거냐."

"푸흐흐. 글쎄요. 그냥…속 시원하게 저지르시는 모습을 보니 제가 다 통쾌해서 말입니다. 솔직히 그간 배가 불러도 잔뜩 부른 녀석들을 보면서 욕이라도 한바탕 해주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보리스 공자의 일을 보고 있자니 꽤나 즐겁습니다."

일종의 대리만족일까. 군터는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있는 아드리안에게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그래서, 병사들의 반응은?"

"잠잠하지요. 입이야 뚫려 있지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불만이 있어도 속으로 삭이지 않겠습니까? 일부는 생각을 바꿔먹을 테고요."

"그건 예상이 아니라 바람인가?"

"아니요. 예상입니다. 놈들도 사람이니, 양심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다소 스산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찾아가서 머리를 으깨버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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