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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70화 (770/1,064)

770화

군터는 헤이모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줄카를 다시 만났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해도 되는 건가?"

[한 이백 년 정도 살다 보면, 네 녀석도 시간에 쫓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게 될 거다. 그나저나, 너야말로 한가한 모양이군. 서부 전선의 한 축을 맡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한가할 리가. 줄카의 말대로, 군터는 전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해도 무방했다. 그런 그가 군대를 두고 혼자만 덩그러니 이렇게 들어와 있는 것 자체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적의 움직임이 없고, 꼭 들어와야 하는 이유가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 그를 고깝게 보고 있는 조정의 실력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틀림없이 그를 헐뜯을 터였다.

"급한 일이 있어서."

[군대를 내버려 둘 정도로 급한 일이라. 뭔지 궁금하군.]

말로는 궁금하다고 하지만, 말뿐이었다. 군터는 줄카가 자신의 '급한 일'에 전혀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페이브는 지하에 있나."

[그래. 아주 열심이야. 늘 느끼지만, 술사들의 탐구욕은 정말 대단하단 말이지.]

공기도 탁하고, 음침하기 짝이 없는 지하에서 며칠씩 머물며 연구를 거듭한다. 어지간한 의무감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터인데, 모페이브와 나짐은 벌써 근 엿새째 지하 미궁에서 나오지를 않고 있다고 했다.

"열심이라고 들었다."

뒤늦게 군터가 헤이모라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모페이브와 나짐이 허겁지겁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군터의 치하 아닌 치하에 고개 숙였다.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합니다. 저 지하 도시는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술사가 아니라고 해도, 옛 역사에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저희처럼 할 것입니다."

"장군. 하온대 어쩐 일로 다시 예까지……."

그들은 군터가 곧 키파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며칠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헤이모라로 돌아오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의아했다.

"음."

군터는 잠깐 고민했다. 본래 그는 모페이브에게만 의견을 구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나짐의 얼굴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모페이브만큼 신뢰하지는 않지만, 나짐 역시 그의 수하였다. 게다가 그는 사령술사였다. 의견을 구하는 데있어 어쩌면 모페이브보다 더 적합한 상대인 것이다.

"…내가 다시 이곳에 온 것은, 너희의 지식을 빌릴 일이 있어서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군터는 모페이브와 나짐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떤 것이든, 하문하십시오."

"모페이브, 할렌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겠지."

"…예. 들었습니다."

모페이브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특별히 가깝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오랜 세월 봐온 사이였다. 그런 만큼, 모페이브에게도 할렌의 죽음은 작지 않은 의미로 다가왔다.

하지만 본디 군인의 삶이란 위태로운 칼 위에 선 것과 같지 않은가. 할렌의 죽음을 들었을 때, 모페이브는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할렌은 죽었지만, 녀석의 영혼은 아직 흩어지지 않았다."

"예?"

모페이브는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했으나, 곧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할렌은 죽었지만, 나는 녀석을 보내고 싶지 않다. 그건 녀석의 뜻이기도 했지."

"……."

나짐은 군터의 말뜻을 모페이브보다는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그 역시 조금 당황하기는 했으나, 모페이브처럼 얼굴이 굳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장군. 장군께서는…할렌님을 부활시키시려는 겁니까?"

"그래. 그런데 마음처럼 쉽지는 않더군."

이곳에 오기 전까지, 군터는 틈만 나면 고민했었다. 어떻게 하면 할렌을 최대한 멀쩡하게 되살릴 수 있을지를.

한번 쓰고 버리는 시체들처럼 쓰려는 것이 아니다. 군터는 할렌이 다시 한번 자신의 등 뒤를 지켜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생각은 있어도, 구체적인 방도는 막막하기만 했다.

"으음."

모페이브가 침음을 흘렸다.

죽은 자를 되살린다는 것. 죽지 않는 것과 더불어, 의지와 능력을 지닌 인간이 한 번쯤은 도전하는 기적.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신. 신의 영역이다.

"장군께 실망을 안겨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조차 의심이 드는군요."

"할렌의 유해는 보존해두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군터는 할렌의 시신을 수습해두었다. 정확히 말하면 화장을 치르고 난 뒤 남은 뼛가루를.

사자(死者)의 유해는 사령술의 대표적인 재료 중 하나. 따라서 군터는 할렌을 되살리는 데 뭐가 필요할지 몰라, 일단 챙겨둘 수 있는 것은 모두 챙겨두었다.

"가능한 일이라면, 그 유해가 필시 쓰임새가 있을 것입니다."

나짐은 모페이브처럼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본인이 사령술사인 만큼, 이 말도 안 되는 일의 가능성의 유무를 떠나서 도전욕과 흥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군터는 나짐은 물론, 모페이브의 반응도 이해했다. 이성적인 술사인 모페이브인 만큼, 가능성이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 걱정부터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기에, 군터는 그의 오해부터 풀어주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할렌을 되살리는 것이지, 할렌이라는 인간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다."

"예?"

순간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었으나, 모페이브는 곧 그의 주인이 말장난과는 거리가 까마득히 먼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얼핏 듣기에는 말장난 같은 말에 숨은 의미를 알아차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할렌이다. 할렌이라는 인간이 아니야."

"아!"

"가능하겠나?"

"그런 것이라면……

모페이브의 흐려지는 말끝이 그의 의중을 대변했다.

***

인간이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인가.

누군가는 철학적인 질문이라 생각할 테고, 또 누군가는 무슨 싱거운 질문이냐며 코웃음을 칠 것이다.

사실 군터도 인간이 무엇인지, 무엇이 인간인지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가 모페이브에게 일깨워준 것은 아주 간단했다. 부활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가 요구한 것은 생전의 할렌을 다시 가져다 놓으라는 게 아니었다.

그가 바란 것은 그릇이었다. 그에게 이미 할렌의 영혼이 있으니, 그 영혼을 집어넣고 기능할 수 있게 하는 그릇을 바란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기적'에 비하면, 충분히 해볼 만한 일임은 분명하다.

"고렘과는 다를 거네."

"그렇겠지요. 명령에만 따르는 인형과 달리, 자율의지를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 육신이니까 말입니다."

"육신이라…… 꼭 그렇지도 않지."

"아아. 그렇군요. 저도 모르게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나 봅니다."

군터가 이야기한 것은 그릇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그릇이 피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짐은 모페이브의 지적에 냉큼 수긍했다.

"참으로 어려운 숙제를 주시는군."

"미지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술사의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모페이브가 피식 웃었다.

"자네는 의욕이 충만해 보이는군."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오랜만에 끓는군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장군께서 제한 없이 지원해주시겠다 하셨으니……."

"솔롬으로 갈 생각인가?"

"예. 제대로 지원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이곳보다는 솔롬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아무리 군터가 제한 없는 지원을 약속했다지만, 헤이모라에서 머문다면 이래저래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테리브란이 멀지 않은 데다, 무엇보다 이곳에 줄카와 그의 수하들이 함께 머물고 있지 않은가.

반면 솔롬으로 간다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죄수와 포로들로 실험을 할 수도 있고, 각종 술법 재료들도 넉넉하게 쓸 수 있을 터.

"흐음."

"모페이브님은 혹, 이곳에 계속 머무실 생각입니까?"

"글쎄.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네."

긴 한숨을 내쉰 모페이브가 텅 빈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휑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주인 없는 도시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

아무리 적이 기세가 꺾인 채 잠잠하다고 해도, 일군을 이끄는 지휘관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다. 그건 빈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

군터는 모페이브와 나짐에게 어려운 숙제를 맡긴 후, 밤낮으로 말을 달려 키파로 향했다.

"그리 하라고 전해라."

"옛!"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서신을 전했던 전령이 군례를 취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키파를 떠나온 후, 군터는 사나흘에 한 번씩 지금처럼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보고를 받았다. 직접 그를 키파의 임시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자율권도 주었으나, 그럼에도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지금처럼 꼬박꼬박 보고를 올렸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들은 알아서 처리한 뒤 그 경과를 보고했고, 때때로 중요하다 싶은 사안들에 대해서는 허락을 구하기도 했다. 물론 거리가 거리고, 시간도 시간인 만큼 대부분은 알아서 처리하고 그런 연후에 그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하는 식이기는 했지만.

군터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타인의 미움을 사지 않는 법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티브리악의 후계자이며, 일군을 이끄는 장군이면서도 결코 스스로를 높이는 법 없이 항상 겸손하지 않은가. 행동거지도 조심스럽고 말이다.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경험으로 체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가 없는 동안 키파를 잘 지키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말들은?"

"이제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것 같습니다."

"출발하지."

"예."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기병들이 각자 말을 세 마리씩 거느리고 길을 재촉하니 열흘이 걸릴 거리를 사흘 만에 주파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키파를 떠나올 때 수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수 병력만 거느린 것이 오히려 득이 됐다.

히히힝!

군터는 노을빛에 물들고 있는 키파의 성벽을 보며, 지쳐서 혀를 빼문 말을 다독였다.

***

"짐작했던 대로, 적의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가벼운 도발 정도는 걸어오지 않을까도 싶었습니다만……."

머리가 바뀌었다고 해도 몸뚱이가 지칠 대로 지쳐있으니 무슨 수가 있겠는가.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말하는 것도 혹시 정도였다. 적의 새로운 머리가 어리석고, 욕심으로 가득 찼을 경우의 일 말이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쥬드 포트락이 직접 임명한 자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요. 당장은 다행입니다만, 결국 언젠가는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다시 한번 놈들과 겨뤄야 할 겁니다."

시어문드가 말했다.

"그렇겠지."

그의 말처럼, 적이 언제까지 군량만 축내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군의 정비가 끝나고, 상황이 달라지면 그들은 움직일 것이다. 그 방향이 어느 쪽일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다시 한번 키파를 노릴 가능성이 크다.

"아군은 아록과 리바스트라의 양 전선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서부 총독이 움직였지만, 그렇다고 한들 전황이 극적으로 바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어문드의 비관적인 전망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토어릭도, 프란시스 티브리악도 같은 생각인 듯 입을 다물거나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전황은 바뀔 거다."

"예?"

예상치 못한 말에 시어문드가 눈을 치떴다. 그는 자신의 상관이 판세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얼간이가 아님을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테리브란에서 뭔가를 들으신 겁니까?"

"그래."

줄카에게도 들었고, 황자에게도 들었다. 줄카가 황자에게 준 선물에 대해서 말이다.

"조만간 적의 후방이 소란스러워질 거다. 아니, 이미 소란이 일고 있을 테지."

적은 원정군이다. 그런 만큼 보급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후방의 소란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나무의 뿌리가 흔들리면 가지도 덩달아 흔들리듯이.

"적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정보는 일선의 다른 지휘관들도 알고 있는 것입니까?"

"글쎄. 그것까지는 모르겠군."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몰랐더라도 지금쯤이면 알았을 테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적과 싸워야 하는 그들이 이런 중요한 정보를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으니..

하지만 그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알게 될지는 군터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자는 드러나고 싶지 않아 했다.'

줄카는 이 전쟁이 자신의 전쟁이 아니라고 했다. 낄 생각도 없다고 했고, 판을 깐 것은 키리스트일지언정 그가 존재감을 지우고 황도에서 웅크리고 있듯, 줄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직간접적으로 도움은 주지만 스스로 드러나는 것은 원치 않는 듯했다.

'시답잖은 말장난에 불과하지.'

그 이중적인 태도가 이해되지 않지만, 어쩔 것인가? 당사자가 그리 하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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