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9화
군터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보낸 보고서를 읽었다. 그가 키파를 떠난 뒤에 있었던 일들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그 일들에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또한.
"보리스 공자가 보낸 서신입니다."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보고서가 담백하게 있었던 사실만을 나열한 것이라면, 보리스의 서신은 그의 사견이 섞여 있다는 점이 달랐을 뿐.
자잘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신경 써서 읽은 부분은 타고니어 페란차라는 자가 새롭게 대장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쥬드 포트락의 아들이 그 부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새로운 인선 뒤에도 적이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하니, 당분간은 적의 재침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즉, 당장 급하게 키파로 돌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장군. 보리스 공자가 장군의답신을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보리스의 서신을 가져온 수인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군터는 옅은 노란빛이 감도는 그의 눈을 힐끗 보았다.
모페이브에게 헤이모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들었다. 지하 미궁에 침입한 그림자 검사단을 막기 위해 수인병들이 사투를 벌였다고 했다. 말 그대로, 목숨을 버려가면서 모페이브와 나짐을 위해 시간을 번 그들의 행동은 모페이브에게도 인상적이었는지 모페이브는 이례적으로 그들의 공을 높이며 치하해줄 것을 넌지시 권했다.
솔직히, 이전까지 군터는 수인병들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평범하지 않은 힘을 지닌 녀석들이니 쓸 곳이 있겠다. 싶어 거뒀고, 야스메티가 생전에 그들을 이용해 조직을 꾸리겠다고 했을 때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 허락해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군터도 이번 일로 그들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니클라스가 훈련을 잘 시켜서일까. 그들은 이번 일로 그들의 능력과 충성심을 증명했다.
물론 능력을 증명했다고는 해도, 실상 수인병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목숨을 버려가며 시간을 끄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림자 검사단이라.'
줄카가 말하길, 군주 키리스트가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비밀 무력집단이라고 했다.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처리해야 할 때 키리스트가 뽑아 드는 그의 숨겨진 칼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룬차이가 거느렸던 루반다이나, 심지어 줄카 자신이 이끄는 용아보다도 높이 평가하는 듯했다. 그런 놈들이 상대였으니 수인병들이 속수무책이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보리스에게 전해라."
군터는 그 자리에서 짧게 답신을 적고서 그것을 수인병에게 건넸다.
***
처리해야 할 일을 처리한 후 돌아오겠다.
안 그래도 짧은 서신의 내용을 요약하면 그것이었다. 정작 그 처리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적혀 있지 않았고, 하지만 보리스는 그에 대해 조금도 답답해하지 않았다. 부친의 화법이야 날 때부터 겪어온 것이니 새삼 답답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알아야 할 일이었다면 알려주었을 테니, 알려주지 않은 것은 그가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저나…….'
그러므로 보리스가 인상을 찌푸린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이틀 전, 테리브란에서 온 아내의 서신이 그의 미간에 주름을 만든 원인이었다.
'하하. 평생 사내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았던 녀석이…….'
그의 동생 실비아가 사내를 마음에 둔 것 같다는 내용을 읽었을 때, 보리스는 피식 웃었다. 어지간한 사내보다 기가 세고 괄괄한 동생이 평범한 여인네처럼 군다는 것이 그저 반가웠다.
하지만 이어진 내용. 그러니까, 아내 라일라가 자신의 의견을 써놓은 부분을 읽었을 때. 보리스의 입가에 맴돌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으음."
곧 서신의 끝줄까지 다 읽은 보리스는 침음을 흘렸다.
'라일라가 무엇을 우려하는지는 알겠군.'
보리스도 귀족 가문의 일들에 무지하지 않았다. 깊은 부분까지 다 알지는 못해도, 알아야 하는 만큼은 알았다. 그렇기에 귀족 가문에서 그들의 여식 때문에 겪는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제법 흔했다. 비단 여인네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교육을 철저히 하더라도, 한창때의 젊은이들이 아닌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성으로 쉽게 다스려질 것이었으면 세상에 산재한 문제 중 열에 아홉은 애당초 일어나지도 않았을 터.
정략혼으로 다른 가문과 맺어져야 할 여식이 엉뚱한 상대와 정분이 나는 일 정도야, 사실은 문제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사소한 것이었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소문이 나기 전에 문제 거리를 없애면 된다. 그 방법은 상대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다양하다.
그리고 지금 같은 경우는 아주 간단한 편에 속한다. 그 음유시인이라는 녀석을 협박하는, 어찌하든 해서 테리브란에서 사라지게 하면 되는 일이다. 라일라도 서신에서 그렇게 하기를 은근히 권했고, 매우 간단한 일이다. 직접 명령할 필요도 없다. 그의 아내에게 허락한다는 답변 하나만 해주면 그걸로 끝일 테니.
'하지만…….'
간단한 일이다. 간단한 일인데…그런데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보리스는 부친이 동생에게 자유로운 미래를 허락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자유로운 미래란, 당연히 정략혼의 제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음.'
보리스는 그의 부인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자유를 약속했으나, 방종을 약속한 것은 아니다. 맞는 말이지.'
맞는 말이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팔려갈 필요는 없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켜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라일라 이 일을 해결하기를 바라는 것 지극히 당연했다.
'그렇지만, 이게 내가 나서도 될 문제인가?'
라일라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보리스는 이것이 자신이 나서도 되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동생의 원망을 사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고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보리스는 한동안 그의 집무실을 서성였다. 생각은 그의 발걸음처럼 계속 이어졌고, 그의 마음은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변덕스럽게 출렁였다.
"장군. 사령관께서 찾으십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것은 문밖의 병사가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부름을 알리면서였다. 그것은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고심하던 보리스에게 때마침 찾아온,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런데…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어제 나눈 것과 별다르지 않은, 업무와 관련한 상투적인 대화를 이어가던 중.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보리스가 어쩐지 맹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고민이라…예. 있지요."
"밝히기 어려운 고민인 듯한데."
"밖에다 할 이야기는 아니지요."
"알만하군. 집안일인가?"
보리스는 쓰게 웃었다. 이 사내는 다른 재주도 재주지만, 특히 이 눈치가 대단했다. 비상하다는 표현이 딱 맞을 만큼.
"뭐…비슷합니다."
"흐음. 안타깝군. 집안일이라면 외인이 이러니저러니 할 수 없는 부분이지. 하지만 혹여라도 내 조언이 필요하다면 말하게. 속풀이를 할 상대가 필요하다면, 그것도 좋고."
"고맙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상대의 마음이 엉뚱한 곳에 가 있으니 더 해봐야 무슨 의미일까. 어차피 중요한 일도 없으니,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그쯤 자리를 파하려고 했다.
"장군."
"음?"
"장군께서는 귀족, 그것도 대귀족이시지요."
"낯부끄럽지만,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
대귀족이라는 정식 명칭은 없다. 귀족은 귀족일 뿐이다.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평민들 가운데도 지주가 있는가 하면 소작농이 있고, 빈민과 부호가 있다. 그들의 공식적인 신분은 동등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듯이 귀족도 마찬가지다. 간신히 이름만 잇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번듯한 가문을 배경으로 지닌 자들도 있고, 그 정도를 넘어서 아예 한 지역의 주인 노릇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을 세인들은 대귀족이라 불렀으며, 티브리악 가문 역시 그런 대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귀족 가문의 명예라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재미있는 질문을 하는군."
흔치 않은,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보리스 크렘보르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은 질문이었다.
"중요한 것이지."
"그뿐입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자네가 내게 물었으니 내 생각을 말해주겠네. 즉, 이건 내 사견이라는 거지. 절대적인 답은 아니라는 뜻이네."
"유념해서 듣겠습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지금부터 하는 말이 보리스 크렘보르라는 사내와의 관계를 다시 세우는 데 일조할 것임을 느꼈다.
"귀족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혈통 아니겠습니까."
"틀리지 않네만, 내 생각은 조금 달라. 나는 귀족의 힘이 이름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네."
"음."
"병장기로 예를 들어보지. 칼이 있다고 치세. 평범한 사람이라면 칼을 든 사람 앞에서 고분고분해지기 마련이지. 그러나 칼도 칼 나름 아니겠는가? 만약 이가 다 나가고, 똑 부러져 손잡이만 남은 칼이라면 고분고분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우습게 보고 업신여기지 않겠나?"
"……."
"귀족의 이름을 칼이라고 치면 어떤가? 생각해보게. 단지 귀족이라는 신분만으로는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어. 귀족이라도 다 같은 귀족이 아니지. 그의 가문이 어떠냐에 따라 그 귀족을 바라보는 시선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저속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말게. 이건 세상의 이치고, 진리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전이라면 반응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보리스는 이 정도 이야기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는 그가 자신이 귀족이라는 자각이 있으며, 귀족의 생리에 대해서도 보고 배운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생각해보게. 칼이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는 칼을 관리해야 하지 않겠나. 손상된 부분이 있다면 수리를 하고, 기름을 바르고, 날을 갈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요."
"귀족의 이름을 높이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지. 명예라는 것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네. 아니. 사실 명예라는 이름은 그럴싸한 포장에 불과해."
"포장…입니까?"
"그래. 명예라고 하면 왠지 고상하게 들리지 않나. 물론 정말로 명예로 이름을 높이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대부분은…그저 체면 차리기에 불과해."
"…체면, 그렇군요."
"그래. 체면이야. 귀족 가문은 그들이 애써 높여놓은 자신들의 이름이 깎이는 일들을 꺼리지. 당연한 일 아닌가?"
장사치가 손해를 보기를 원치 않듯, 귀족들은 그들의 체면이깎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차이가 있다면, 장사치의 득실은 매우 알기 쉬우나 귀족의 체면이라는 것은 그 범위가 천차만별이라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일례로, 어떤 귀족 가문은 그들의 땅에 외인이 잘못 발을 디뎠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잡아들여서 매질을 했다네. 어찌나 심하게 매질을 했던지, 멀쩡하던 사람이 반쯤 죽어서 나갔다더군."
이 정도면 그나마 흔한 경우였다. 길을 가다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평민이 귀족을 훑어보았다며 매질을 하거나 눈을 파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런 잔혹한 귀족은 같은 귀족들에게도 눈총을 사기는 한다.
"하지만 그뿐이지."
설령 그런 잔혹한 짓을 벌인다고 해도, 귀족은 처벌받지 않는다. 말도 안 되더라도 일단은 명분이 있기 때문에..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질문을 이해하기 어렵군."
"왜 그렇게까지 체면이라는 것에 목숨을 거느냐는 말입니다."
"체면에 목숨을 건다? 하하. 재미있는 표현이군. 뭐, 어쨌거나 답을 하자면…얕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쉽게 생각하게. 전장에서 싸우는 이들은 그들의 칼을 들고 적과 싸우지. 마찬가지로 귀족들 역시 자신들만의 칼을 가지고 다른 귀족들과 싸운다네. 그런데 적을 상대해야 할 칼이 무디다면 어떻겠나?"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할 걸세.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거야.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익숙해지겠지."
"그것이 귀족입니까?"
"그래. 그것이 귀족이네."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그로서는 드물게, 단호히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