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8화
군터는 실비아가 흔쾌히 솔롬으로 떠나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이 화려한 도시 생활에 별 흥미를 못 느끼고 있고,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답을 망설이는 딸을 보며, 그는 뜻밖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답을 줄 필요는 없다. 말했듯, 네 뜻대로 하면 되는 일이니."
실비아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군터는 곧 그의 며느리를 불렀다. 이제는 라일라 크렘보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우슈무르의 여식은 어느새 현숙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되어 있었다.
"아버님."
첫 만남에서부터 그랬듯, 그녀는 여전히 시아버지를 어려워 했다. 이것은 보리스가 아무리 좋은 말로 달래줘도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아무리 귀족으로서 나고 자란 그녀라고 해도, 군터의 이질적인 분위기 앞에서 태연할 수는 없었다. 군터가 그녀의 시아버지이며, 그 이전에 부친과 교분을 나눈 전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실비아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
"아가씨에 대해서……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요?"
"나는 녀석이 이 도시에 별 미련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닌 것 같더군."
군터는 라일라의 눈에 이채가 도는 것을 알아차렸다. 실비아가 며느리와 가깝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역시 물어볼 대상을 잘 찾은 듯했다.
그런데, 무언가를 알고 있음이 분명한 그녀는 바로 아는 것을 털어놓지 않았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을 돌리는 모습에서 망설이는 기색이 엿보였다.
"뭘 망설이지? 아는 대로 이야기해라."
윽박지르지도, 눈을 치켜뜨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히 추궁했을 뿐.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곱게 자란 귀부인에게는 커다란 압박이었을까. 라일라는 곧바로 눈을 내리깔고 아는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버님, 실은……."
그렇게 라일라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상당히 뜻밖이었다.
"그러니까…실비아가 마음에 둔 자가 있다는 말이냐?"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얼마 저부터 아가씨가 조금씩 그자의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아가씨가 사내의 이야기를, 그것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입에 담으시는 일이 극히 드물어서……."
거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했다. 입으로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을 했지만, 라일라는 거의 확신하는 기색이었다.
"누구냐."
"시가지에서 노래를 파는 음유시인입니다."
"음유시인?"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뜻밖이어서 올라간 말끝을 화가 나서 그랬다고 착각했는지, 라일라가 다급히 첨언했다.
"제가 알아보니 부랑배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농장을 가진 지주의 아들인데, 가업을 물려받는 것을 원치 않아 상경했다고 들었습니다."
"제법 자세히 알아봤구나."
"아가씨의 곁에 질 나쁜 자가 꼬이는 것은 저도 원치 않으니까요."
군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라의 자신 있는 태도를보니 허투루 조사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음유시인이라. 말이 음유시인이지, 가객 아니겠는가. 노래를 팔아 먹고산다고 하니, 기억 속에 묻은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실비아가 그 음유시인이라는 녀석에게 끌린 것도…….
"아버님.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의중을 여쭤도 될지요."
의중이라. 군터는 문득, 이 눈치 있고 총명한 며느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냐."
"아버님께서 아가씨에게 자유를 약속하신 것을 압니다. 아녀자로서의 저는 아버님의 약속이 무척 관대하고 자상한 배려였다고 생각합니다만, 귀족가의 여인으로서의 저는……."
"반대라는 거군."
"…예. 귀족 가문의 여인은 태어날 때부터 책무를 지닙니다. 귀족 영애로서 누리는 삶은 그를 위한 대가지요. 물론 아버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있으니 아가씨께 정략혼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켜서는 안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다?"
라일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귀족 영애의 염문은 자격 있는 상대를 대상으로 퍼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추문이고, 곧 가문의 명예를 깎아 먹는 일이지요."
부름을 받고 온 후로 처음 보이는 당당한 태도였다. 그만큼 생각과 뜻이 확고하다는 것이리라.
"네가 크렘보르의 이름에 그만큼 집착하는 줄은 몰랐다."
"저 또한 이제 크렘보르 가문의 일원이니까요. 그리고… 집착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자유와 방종은 다르다는 것을 아가씨께서도 아셔야 합니다."
"네가 알려주지 그러느냐."
"저는 아가씨의 조언자는 될 수 있어도, 선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가씨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은 아버님뿐입니다."
"아니. 한 명이 더 있지 않느냐."
"……."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그들 모두 알았다. 그러나 라일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의 신중한 태도에 군터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 귀족적이고 은근히 야심만만한 며느리가 자기 남편을 넘보는 요부는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의 앞에서만 이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괜찮다. 보리스가 한낱 여인에게 흔들릴 만큼 물렁한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보리스도 알고 있느냐?"
"서신을 보냈습니다. 지금쯤이면 닿았겠지요."
그러나 아버님께서 답을 주셨으면 한다. 군터는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는 라일라의 시선에서 그런 바람을 알아차렸다. 시누이와 껄끄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실망스럽게도, 군터는 답을 미뤘다.
"일단은…두고 보도록 하지."
똑 부러지는 며느리가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군터는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설레발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실비아가 그 음유시인이라는 녀석에게 품은 감정이 가벼운 호기심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이라고 해도 본인이 알아서 털어버릴지도 모른다. 군터는 가능한 한 자식의 일에 끼어들어서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지 않았다. 보리스에게도 그랬듯, 실비아에게도 그럴 것이다.
'가문의 명예라.'
이제는 크렘보르의 일원이 됐다고 하지만, 크렘보르보다는 우슈무르로 살아온 세월이 훨씬 긴 며느리가 크렘보르의 명예 운운하는 것이 우스웠다. 정작 그 가문을 일으켜 세운 자신은 크렘보르라는 이름에 별 애착도 갖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솔직히, 아직도 길게 따라붙는 또 다른 이름이 낯설기까지 했다.
'명예라고.'
익숙하지만 낯설다.
명예라는 단어 자체는 익숙하다. 전장에 나간 군인이, 특히 지위가 높을수록 입에 달고 사는 단어 중 하나가 공이고, 그와 쌍둥이처럼 함께 오는 단어가 명예다. 공과 명예. 그것을 위해 군인은 싸우고, 죽는다. 그렇기에 명예라는 단어는, 군터에게 너무나 익숙한 단어였다.
하지만 조금 전 며느리의 입에서 나온 명예라는 말은,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낯설었다. 그녀가 말하는 명예는 그가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뭐, 대충 그게 무엇인지 짐작은 가지만…….
"난 곧 전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아, 그럼 솔롬으로 옮겨가는 것은……."
"네게 맡기마."
보리스가 전장에 나간 지금, 테리브란에 있는 가문의 식솔들을 이끄는 것은 라일라였다. 엄밀히 따지면 실비아가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실비아는 나이도 나이고 성향 자체가 워낙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솔롬으로 옮겨가는 것 말이다."
라일라는 실비아와 다르다. 그녀의 친정인 우슈무르 가문이 테리브란에 있는 것도 그렇고, 그녀는 귀부인으로서의 삶을 꽤 충실하게 누리는 편이었다. 여인네들끼리의 분 냄새 풀풀 풍기는 사교회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 벽지의 군사 도시로 옮겨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크렘보르 가문은 역사가 길지 않아 규모가 크지 않고, 혈족의 수도 많지 않지요. 작은 가문이 넓게 퍼져 있어 좋을 것이 없으니, 한데 뭉쳐야 어려움이 적을 것입니다."
군터는 귀족답다는 표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 생각 많은 며느리에게는 그 표현 외에 달리 어울리는 말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 맡기겠다."
그 후, 군터는 수하들을 풀어 라일라가 말한 음유시인에 대해 알아보게 했다.
"장군. 말씀하셨던 부분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그의 수하들은 하루가 다 지나기도 전에 '카일'이라는 젊은 음유시인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군터는 시골에서 상경한, 제법 주머니가 두둑한 젊은이가 괜찮은 노래 솜씨와 말솜씨로 이 도시에서 나름대로 밥벌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젊은 여인들에게서 인기를 끌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난봉꾼은 아니었습니다."
야스메티가 양성한, 정보를 모으는 데 특화된 수하들은 카일이라는 사내에 대해 정말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알아왔다. 그가 누구와 친분이 있는지는 기본이고, 취미는 무엇이며, 주로 어느 식당을 가고, 무엇을 먹는지까지도.
"미리 알아보았었나?"
그 정보가 너무 구체적이라, 도저히 하루도 되지 않아 모은 정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군터는 그의 수하들이 진즉부터 카일이라는 음유시인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했음을 알아차렸다.
"예. 아가씨께서 그자와 두 번째로 접촉하셨을 때부터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우연이었단다. 대로 옆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를 실비아가 우연히 발견했고, 노랫말이 좋아 잠시 자리에 멈춰 그의 노래를 두어 곡 정도 더 들었다고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가씨께서 그자에게 관심을 두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아가씨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제넘게 나선 점에 대해서 벌을 내리신다면, 받겠습니다."
"아니. 잘했다."
굳이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일을 하는 수하가 아닌가. 상을 내리면 내리지, 벌을 내릴 이유가 무엇이겠나.
군터는 책임감 있게 직무를 수행한 수하에게 따로 상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관여할 것인가, 관여하지 않을 것인가.
라일라가 했던 말은 그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가문의 명예니 뭐니, 챙긴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먼저 나서서 그런 귀찮은 것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후, 군터는 결정을 내렸다.
'관여하지 않는다.'
훼방을 놓지도, 그렇다고 돕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딸에게 약속한 것은 자유뿐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