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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67화 (767/1,064)

767화

그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어미가 붙여주었던 이름. 그러나 그가 스물셋이 되던 날부터, 그 이름은 잊혔다. 아무도 그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를 왕이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그를 무자비한 정복자, 약탈자라고 불렀다.

이름이란 불리는 데 그 의미가 있는 법. 따라서 불리지 않는 이름에는 의미가 없으니, 그는 의미 없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잊었다. 세상이 그를 칭하는 대로, 승리와 영광, 명예의 칭송에 만취하여 날뛰었다. 예상치 못한 강적과 맞닥뜨리고, 그들로부터 패배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 받기 전까지.

'아무것도 남지 않았군.'

100년. 인간에게는 긴 세월이다. 두 세대가 피고 질 정도의.

그러나 자연 아니다. 산도, 강도, 고작 100년 남짓한 세월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는 기억 속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산을 보며 이 일대를 지배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의 그는 모든 것을 가졌었다. 수천, 수만이 넘는 사람들의 경배를 받았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의 그의 이름은 왕이었다. 더 오를 곳 없는, 가장 높은 이름이었으나 그때도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 이상이 되고 싶었다. 끝 모를 향상심은 평범한 아이를 전사로, 대전사로, 족장으로, 왕으로 만들어주었다. 왕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아이였을 때 가졌던 그 욕망을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이루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보다 위대한 존재로 거듭났다. 영원한 왕이 되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본격적인 불멸의 위업에 도전하기도 전에,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뿌득!

지금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한때 모든 것을 가졌었던, 그럼에도 끝없이 욕망하던 자가 타의에 의해 몰락해버렸다. 그 좌절, 수치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하다.

'아니. 아니지.'

세월이 흘렀다는 표현도 잘못됐다. 그에게는 엊그제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하여 봉인되었던 그때, 그의 시간은 멈추었으니까. 그게 벌써 100년도 더 된 일이라고 한들, 그에게는 의미가 없다.

이 분노는 어제의 패배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에, 마른 장작에 붙은 불처럼 강하게 타오르고 있다.

'놀아나 주지.'

줄카. 이름만 떠올려도 이가 갈리는 이름. 그의 수작질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순순히 그의 뜻대로 따라주는 것은, 그 원수 역시 남의 손에서 움직인 도구에 불과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뜻대로 놀아나 주는 것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땅은 이제 다시 나를 기억하리라.'

지나간 이름들에 미련은 두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 아닌가.

크루트니악.

가지고 태어났으나,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이름. 그는 그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정의했다. 오오오불어오는 바람에 정령의 목소리가 섞여 있다. 형체 없는 존재들은 그의 뜻에 굴복했다. 그가 이 땅의 주인임을 알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이들은 그를 따랐다. 그러고 보면 모든 백성을 잃지는 않은 셈이다.

[일어나라.]

땅속에 스며든 정령들이 각각의 형체를 이루어 일어났다. 대부분이 짐승의 형태였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가만 두지 않겠다.'

도시 하나를 쓸어버렸으나 아직 한참 부족하다. 자신의 땅에서 주인행세를 하는 발칙한 것들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 전에, 이 끓어오르는 울분부터 풀어야겠다.

[으아아아아아아-!]

광포한 포효가 잠에 빠져있던 산맥을 뒤흔들었다. 겁을 먹은 새들이 일제히 둥지를 버리고 날아올랐으며, 땅을 기는 벌레들은 굴을 파고 깊숙이 숨어들었다.

크루트니악과 그를 따르는 정령들이 또 다른 먹이를 찾아 사나운 걸음을 옮겼다.

***

크루트니악이 본격적으로 활개를 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그에 대한 대략적인 보고가 바라눔 트라소프는 물론, 쥬드 포트락에게까지 들어갔다.

"술사들의 소행이라?"

"암약하고 있던 사교도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루트니악의 정체에 대해서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들이 알아낸 것은 이것이 일반적인 병력의 소행이 아니라는 점. 따라서 술법적인 무언가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런 힘을 가진 집단은 사교도가 가장 유력하다는 정도였다.

"도시 하나를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정도의 전력? 그 정도 규모의 사교가 아직 남아있었단 말인가?"

쥬드 포트락이 의구심을 드러내자, 같은 자리에서 보고를 접한 부관이 입을 열었다.

"단일 세력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사교라고 한다면, 여러 세력이 뭉쳤을 가능성이 크지요. 또한…만약 그렇다면, 필시 저쪽에서 손을 썼을 테고요."

"당연히 그렇겠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설마 제국의 황자가 사교의 무리와 결탁했겠느냐는 등의 순진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이미 아바시스와 연수를 한 황자도 있는 마당에, 사교의 무리를 동원하는 게 대수겠는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사교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들과도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대대적으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숨어서 움직이는 것을 보면 적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다행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성가시기도 합니다. 빠르게 꼬리를 잡지 못한다면, 앞으로 계속해서 골치를 썩일 테니까 말입니다."

바라눔 트라소프는 일단 주의 병력만으로 수습할 것이라 알렸다. 옳은 판단이다. 진군을 거듭하고 있는 이 시기에 후방의 작은 문제로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되니까.

하지만, 쥬드 포트락은 그 옳은 판단에 의구심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뒷덜미가 간질거렸다. 후방의 작은 소란이 작게 끝난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들판에떨어진 작은 불씨가 삽시간에 크게 번져, 수습하기에 곤란한 지경까지 이른다면?

"전하께 고하라.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심각하게 생각하시기를 바란다고."

"예? 아, 알겠습니다."

황자의 말을 전하러 온 전령은 당황했으나, 곧 딱딱하게 군례를 취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쥬드 포트락이라면 황자에게 이런 조언을 할 자격이 된다는 것을 일개 전령인 그도 알고 있었다.

전령이 돌아간 후, 쥬드 포트락은 또 다른 보고를 접했다.

"흐르트리 파오는 예상했던 대로 순순히 명령에 따랐습니다. 장군. 그의 군대를 그대로 시온에게 맡기실 생각입니까?"

"아니. 녀석은 아직 부족해. 그만한 군대를 이끌 깜냥이 안 되지."

능력은 부족하지 않다. 적어도 흐르트리 파오나, 그와 함께 하는 한심한 귀족 나부랭이들보다는 낫다. 하지만 큰일을 맡기 위해서는 능력 외에도 이름값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아들에게는 아직 그것이 부족하다.

따지고 보면 그의 잘못이기도 하다. 너무 큰 빛 앞에 자그마한 빛이 바래게 되는 법. 쥬드 포트락의 아들이라는 후광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내 이름 역시, 네가 이겨내야 하는 장애물이다.'

멀리서 고생하고 있을 아들을 떠올린 쥬드 포트락은 이미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페란차를 보내겠다. 시온 녀석에게 그를 보좌하게 하면 되겠지."

"페란차…… 그라면 괜찮겠군요."

"키파를 공략할 필요는 없다. 길목을 막는 것으로 족해."

적을 너무 얕봤다. 잔카라스 데반을 너무 믿은 탓도 있었고,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실수하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틀어질 리는 없었겠지만, 지나간 일을 아쉬워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병력을 증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니 있는 병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터.

"페란차에게 전하게. 녀석을 내 아들로 대할 필요는 없다고."

"명석한 자이니 장군의 말뜻을 이해할 것입니다."

순간 숨이 거칠어진 쥬드 포트락이 손을 저어 수하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곧, 조용해진 막사에서 고통이 묻어나는 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다.

***

"적의 대장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또?"

"누구라던가."

같은 보고를 받은 두 사람은 각기 다르게 반응했다. 보리스는 심드렁하게 코웃음을 쳤고,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눈을 빛내며 새로운 대장이 누구인지부터 물었다.

"타고니어 페란차라고 합니다."

"페란차…타고니어 페란차……."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새로운 적장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보리스가 물었다.

"아시는 자입니까?"

"얼핏 들어보았네. 쥬드 포트락을 따르는 무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해."

"나이가 많겠군요."

"그의 이름을 들은 것이 꽤 오래전이니, 경험이 많은 자라고 해야겠지. 만약 그가 계속 키파를 노린다면, 흐르트리 파오처럼 녹록지는 않을 것이야. 쥬드 포트락이 직접 보낸 자가 만만한 상대일 리 없지."

"솔직히 의외입니다."

"의외?"

"저는 그 시온 포트락이라는 자가 그대로 군을 이어받을 줄 알았습니다."

"제법 능력이 있는 자라더군."

"예. 그런 자가 단순히 전령 역할만 할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뭐, 크렘보르 장군께서 자네에게 키파를 맡기지 않으신 것과 같은 이유에서겠지."

다소 민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나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보리스도 전혀 불쾌한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같은 이유라면?"

"빠르다고 능사가 아닐세. 모든 일에는 준비 과정이 필요한 법 아닌가. 준비가 안 됐는데 마음만 앞세웠다가는 낭패를 보기 마련이지. 아, 내가 말한 준비라는 것은……."

"오해하지 않으니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리스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말한 준비의 의미를 잘 알았다. 렇기에 부친이 자리를 비우면서 그 자리를 아들인 자신이 아니라 프란시스 티브리악에게 맡겼을 때도 반감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어쨌거나…머리가 바뀌었으니 저쪽에서도 움직임이 있겠군요."

"그럴 테지.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저쪽이 움직이기 전에 장군께서 돌아와 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같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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