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6화
궁을 나온 군터는 곧장 자택으로 향했다.
막 해가 저물기 시작한 시각. 미리 소식을 들은 실비아와 식솔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오랜만에 보는 딸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얼굴이 조금 말랐고, 보기 좋게 그을렸다. 매일 말을 탄다고 하더니, 그나마 통제하던 오라비마저 사라져서 그런지 아주 살판이 난 모양이었다.
"보기 좋구나."
"그렇죠?"
실비아가 반색했다.
오랜만에 만난 딸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한 말이 아니다. 군터는 보리스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일찍이 딸의 미래를 새장 속에 가두지 않으리라 약속했다. 아비로서, 군터는 실비아가 행복한 삶을 산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보리스도 마찬가지고.
"사냥을 즐긴다고 들었다."
말을 타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실비아는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찾았다. 단순히 말을 타고 달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 그녀는 얼마 전부터 사냥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호위병들을 대동한 채였지만, 소식을 접한 보리스는 동생을 만류하기 위해 전장에서도 틈만 나면 서신을 보내곤 했다.
"오라버니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너무 걱정들이 많아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귀족 가문의 여식이 사내처럼 말을 타고 사냥을 즐긴다는 것은,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다. 귀족 여인이라 하면 마땅 우아한 옷차림에, 걸음걸이도 느릿하고 기품이 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일반적인 귀족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군터는 그런 '일반적인 귀족'들의 사고방식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자신이 귀족이라는 자각도 없었다.
"고작해야 여자가 말을 타고, 사냥한다는 이유로 다가오지 않을 사내라면 고작 그 정도인 시시한 남자일 게 뻔하잖아요."
분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서 꽤 진지하게 생각은 하는 듯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는 것 자체에 거부반응을 보이던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보리스 내외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생각이 달라진 것일까. 보리스가 알면 크게 기뻐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런 부분에 대해 군터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없었다. 하지만 조언을 해줄 수는 없더라도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있다. 실비아도 그것을 아는지, 오랜만에 만난 아비에게 속에 쌓아둔 것을 조금씩 털어놓았다. 아무리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때때로 거리감이 느껴지는 아비라도 아비는 아비인 것이다.
차 한잔을 두고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딸을 보며, 군터는 조금 전 궁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끈이라.'
인간임을 상기시켜주는 매개. 7황자, 자콥 트라소프는 그 끈을 놓지 말라고 했다.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군터는 '끈'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마음이 말라버렸다고 한들, 어찌 피를 물려준 자식들 앞에서까지 냉담하겠는가.
놓을 생각도 없지만, 놓고 싶다고 해서 놓을 수 있는 끈도 아니다.
"이곳에 남아있는 식솔들을 이번에 솔롬으로 데려갈 생각이다."
"아……."
그가 본론을 꺼낸 것은 실비아의 재잘거림이 조금 잦아든 후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실비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비록 자기 주관이 강해서 남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일을 서슴없이 해대고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과, 자택의 식솔들이 왜 솔롬이 아니라 테리브란에 계속 머물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볼모.
지방관들, 특히 군사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힘 있는 지방관들은 그들의 가족을 수도에 둠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증명한다. 물론 말이 좋아 충성의 증명이지, 자발적으로 목줄을 차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비아가 말을 타고 도시 밖을 나서고, 사냥까지 손을 댄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말이 좋아 귀족이고 영애지, 따지고 보면 인질이 아닌가. 그녀는 어쩔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사실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이런 처지에 놓인 이가 그녀 하나만은 아니다. 이 화려한 도시에 그녀와 같은 처지인 귀족 영애들은 과장 좀 보태서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무도회와 다과회에서 웃음을 뿌리고 다녔다. 실비아는 그런 생각 없는 또래들을 볼 때마다 머리에 열이 오르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부친이 허언을 내뱉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비아는 물었다. 그녀는 혹시 부친이 군권을 내려놓기로 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실권을 내려놓는다면 위험이되지 않으니, 족쇄가 풀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친은 혹 자신과 식솔들을 위해서…….
"뭘 걱정하느냐."
군터는 실비아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굳이 그 착각을 바로잡아주지 않더라도, 힘 있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이곳에 계속 있고 싶다면 그리 해라. 솔롬으로 오고 싶다면, 역시 그리 해라. 강요하지 않으마."
"예. 알겠어요."
실비아의 얼굴에 순간 그리웠던 그늘이 그 한마디에 깔끔하게 사라졌다.
***
"카자쿠. 생각에 변함이 없나?"
"허락하신다면,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자콥 트라소프는 눈을 감았다.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검은 피부의 사내, 카자쿠는 뜻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랜 세월 그의 곁을 지킨 충직한 수하다. 본인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지만, 그 헌신적인 충성을 어찌 당연하다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자콥 트라소프는 냉정한 자였지만, 이런 헌신적인 수하에게까지 차가운 이성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카자쿠는 말하자면, 그의 '끈' 중 하나였다.
그런 수하를, 죽을지도 모르는 도전의 길로 몰아야 하는가?
물론 그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카자쿠는 단념할 것이다. 하지만 근 10년 만에 자신의 뜻을 내비치는 수하에게 고개를 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 네 뜻이 그리 확고하다면……."
잠시 후, 자콥 트라소프는 그를 찾아온 줄카와 독대했다.
[인원 선별은 끝났나?]
"그렇소만, 다시 한번 묻지. 잘못될 가능성은?"
[열에 셋 정도,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네가 잘 추렸다면 둘 정도로 줄어들 수도 있다.]
"많군."
[가볍게 생각하지 마라. 강대한 힘은 그에 걸맞은 자격을 요구한다.]
어찌 가볍게 생각하겠는가.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투덜거렸을 뿐이다. 카자쿠는 물론이고 선별한 인원 모두, 그가 아끼는 수하들이었기 때문에.
그 아끼는 수하들이 셋 중 하나꼴로 죽어 나갈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등을 떠민다. 셋 중 하나는 죽겠지만, 나머지 둘은 힘을 얻을 것이기에.
용혈(血).
줄카가 동맹의 대가로 약속한 힘. 줄카는 그를 따르는 용아를 만들어낸 그 힘을 약속했다.
"노파심에서 거듭 묻겠소. 그 어떠한 거짓이나 속임수도 없는 것이겠지?"
그들은 궁의 지하로 들어갔다. 그곳에 이미 선별된 인원과, 의식을 보조할 술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초조한가 보구나.]
그 물음에 줄카는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콥 트라소프를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확실히, 네 아비의 피는 네 형제 녀석이 더 짙게 물려받은 것 같군.]
이런 불안감, 흔들림은 인간적인 면모다. 줄카는 황자의 그런 면이 흥미로웠다. 그 피를 이어받은 녀석이 이렇게까지 인간적이라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은 너도 이미 알고 있을 테지.]
거짓? 속임수? 그런 얄팍한 수작을 부릴 이유가 어디 있나. 그렇게 해서 뭐 얻을 게 있다고?
[얼마나 얻어내느냐는 네 녀석에게 달렸다.]
지하 석실 한가운데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었다. 줄카는 원형으로 넓게 퍼진 술사들을 지나 그 우물 앞에 섰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얼핏 보면 자그마한 돌조각 같았다.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가늘지만, 제법 길쭉해서 부러진 창날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본다면, 그 누구도 그것을 돌조각이라 부르지는 못할 터였다. 반투명한 표면과, 그 안에서 일렁이는 붉은 빛무리를 확인한다면 말이다.
기석과 비슷한 면이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기석과는 또 달랐다. 맥동하는 힘 자체가 기석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가진 마지막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그것은, 줄카의 손아귀에서 박살이 났다. 그것이 아무런 소리도없이 한순간에 가루가 되어버리자,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몇몇 술사들이 나직이 탄식했다.
붉은 빛을 머금은 가루는 모두 우물에 떨어져 내렸다. 모든 가루가 사라지고, 줄카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꽉 쥔 주먹 사이로, 핏물이 몇 방울 뒤이어 떨어졌다.
***
"뭐라?"
부리부리한 눈에 힘이 들어가 부릅 뜨이니, 그 모습이마치 한 마리 호랑이와 같았다.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그 기세가 워낙 사납게 뻗쳐 전령이 고개를 떨굴 정도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플라파가 뭐?"
"저, 적의 습격을 받아……."
적? 무슨 적? 설마하니 성안에 틀어박혀 버티기에 급급한 아록과 리바스트라의 군세가 우회하여 모우마(제국의 州 중 하나)로 쳐들어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그도 알고, 전령도 알며, 전령을 보낸 모우마의 총독 또한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미처 확인하지 못한 또 다른 적이 확실히 존재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플라파가 불탔다는 것도 사실이라는 뜻일 테고,
"어떤 놈들이냐. 아니, 적의 병력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플라파는 하룻밤 사이에 무너졌습니다. 적의 정체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남아있는 전투의 흔적을 통해 기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기이한 점?"
"예. 폐허가 된 도시에 남은 시신들이, 꼭 짐승에게 물리고 찢기기라도 한 것처럼……."
전령의 보고가 이어질수록, 바라눔 트라소프의 미간에 잡힌 주름도 더 깊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