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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65화 (765/1,064)

765화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군터는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당신은…황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소."

줄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웃었을 뿐.

[그렇게 보이나?]

답을 하지 않았지만,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군터는 굳이 이유까지 묻지는 않았다. 그것까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고, 기색을 보아하니 묻는다고 순순히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를 황제라고 부르는군."

[황제라는 단어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황제라는 단어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언젠가 국가라는 것이 생긴 이후로, 국가의 지도자는 줄곧 왕이었다. 적어도 수백 년은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소국 카라누르의 새로운 왕은 흔해빠진 왕이라는 이름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왕 중의 왕이 되고자 했고, 그럴 만한 자격이 있음을 세상에 증명한 후 자신을 황제라 칭했다.

[중요한 건 말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의미지.]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줄카에게서는 제국인들이 황제를 입에 담을 때 표하는 경의, 자부심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세간에 도는 이야기는 믿을 것이 못 되는 모양이군.'

황제가 군주들을 하나하나 휘하로 거두는 과정. 그 이야기는 제국인 열 명 중 여덟은 알 만큼 유명하다. 제국사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가 다 알 만큼.

예를 들자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줄카는 일찍이 소국의 평민으로 태어나 사냥꾼으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가 살던 나라가 용의 화염에 멸망하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절망에 빠져있던 그에게 신의 계시가 들려왔고, 원신의 축복을 받은 그는 그의 고국을 멸망시킨 용을 끝끝내 죽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 그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는데, 용과의 혈전이 끝난 후, 죽음을 앞두고 있던 그를 황제가 구해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 이야기는 모두 거짓인가?"

[일부는 진실. 대부분은 거짓이지. 먼저, 내가 태어난 곳은 소국이라고 할 것도 없는 화전민촌이었다. 도망자들의 마을이었지. 그곳이 용의 습격을 받은 것은 맞고, 나를 제외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던 것도 맞아. 당시에 나는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거든.]

그 후에 복수심에 불타 용을 추적하고, 사냥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당시 카라누르의 왕이었던 그 녀석의 도움을 받았지. 아무튼 그렇게 복수를 마쳤고, 그 후에는 알려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줄카는 황제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그 부분에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충 넘겼다. 그 도움이 별로 크지 않았거나, 크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그러는 너는 어떻지? 넌 자콥 녀석에게 충성하나?]

충성이라.

군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내게 주는 만큼 그를 위해 일할 뿐. 그에게 충성하지는 않소."

충성이라는 단어 자체도 낯설다. 아주 예전에, 막시밀리언이라는 사내를 따랐을 때. 그때는 그에게 충성했을까? 그랬던 것 같기도,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자콥 트라소프는 단언컨대 아니다.

[빠르군.]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거듭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이 벌써 그리 건조해졌으니, 곧 세상만사에 초연해질 테지. 그렇게 되는 것이 정상이지만, 넌 그런 것치고도 빠르다는 뜻이다.]

"……."

줄카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가 되면 이 어린 녀석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분노할까? 미쳐버릴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 매몰되어버릴까? 그걸 지켜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물론, 지금 하는 일을 모두 마친 뒤에.

"내게 무엇을 바라지?"

[음? 왜 그렇게 생각하나?]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묻는 것에 착실히 답을 해주는 것도 모잘, 묻지 않은 것까지 굳이 줄줄이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대가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니.

그리고 그런 의심은 지금 머릿속을 울리는 말을 듣고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래. 눈치는 느린 것보다는 빠른 편이 좋지.]

군터 크렘보르라는 자는 줄카에게 있어 상정 외의 존재였다. 자콥 트라소프의 밑에 이런 녀석이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으니, 적어도 어떤 녀석인지, 써먹을 수 있는 녀석인지 아닌지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무뚝뚝한 후배는 담화에는 취미가 없는 듯했다. 궁금한 게 적잖이 있을 터인데 이렇게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다니. 어쩌면 쿠엘단 녀석과 만났을 때 궁금증을 상당수 먼저 풀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쁘지 않다. 그리 길지 않은 대화였으나 어떤 녀석인지 대충 파악은 끝났고, 줄카 역시 이리저리 기름칠을 하는 것보다는 담백한 쪽을 더 선호했으니.

[리비암에는 늙은 괴물이 파리를 틀고 있다. 그 녀석은 이 나라를 망치기 위해 이래저래 애쓰고 있지. 지금 이 나라를 감싼 혼란의 반 정도는 그 녀석 때문에 일어났다고 봐도 좋다.]

"그 늙은 괴물이라는 자는……."

[키리스트라고 하지. 알고 있나?]

"물론."

군주 키리스트, 제국의 수호자. 물론 알고 있다. 그 이름을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제국의 수호자라는 이명을 지닌 자가 제국을 망치기 위해 애쓰고 있다니. 같은 군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면 대뜸 의심부터 하고 봤을 이야기다.

"어째서지?"

[황제에 대한 원한이 깊거든. 그런데 원한을 풀 상대가 사라졌으니, 그가 이룩한 이 나라라도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이겠지.]

"유치하군."

[하하하!]

줄카가 크게 웃었다. 그는 군터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유치하다' 라는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유쾌하군. 그 말을 그 늙은이의 면전에서 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 여유로운 낯짝이 일그러졌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세상에 다시 없을 좋은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아무튼, 짐작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늙은이는 바라눔을 지원하고 있다. 바라눔 녀석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자콥과 바라눔이 더 오랫동안 치열하게 치고받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다.]

"누가 황좌에 오르는 상관없다는 건가."

[물론, 그 늙은이가 원하는 것은 이 나라가 더 철저하게 망가지는 것뿐이야. 만약 자콥 녀석이 바라눔에게 밀렸다면 그자는 자콥을 지원했을 것이다.]

'악취미로군.'

군터는 생각했다.

딱히 부정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으나, 자신 또한 그 늙은 괴물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당신은 7황자를 지원하는 건가?"

[그런 셈이지. 하지만 드러내놓고 개입하지는 못해. 그랬다가는 그자는 물론이고, 물러나 있었던 녀석들도 다 끼어들 테니.]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이 두려운가?"

듣기에 따라 다소 도발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는 말. 하지만 반응은 줄카가 아니라 카니악에게서 나왔다. 한바탕 호되게 당한 이후 군터를 인정한 카니악이었으나, 그의 주인에 대한 무례한 언사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잠자코 서서 자리를 지키던 그가 꿈틀거렸다. 줄카의 답이 조금만 늦게 나왔더라면 카니악이 앞으로 나섰을 것이다.

[두렵지는 않다. 하지만 달갑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판이 더 크고, 복잡하게 흘러갈 테니까.]

"뭐, 좋아. 하지만 처음의 물음에는 아직 답해주지 않았군. 그래서 당신이 내게 원하는 건 뭐지?"

[간단해. 지금처럼 자콥 녀석의 밑에서 녀석의 힘이 되어주는 것. 그뿐이다.]

"말했듯, 나는 그에게 충성하지 않소. 하지만 황자가 나를 실망케 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그럴 이유가 없겠지."

[그거면 충분해. 자콥 녀석이 답답한 면은 있어도 어리석지는 않으니.]

무뚝뚝하지만 말은 잘 통하는 후배다. 줄카는 만족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역시 내게 바라는 것이 있을 테지.]

"왜 그리 생각하지?"

줄카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불공평하군. 넌 어째서 아직 입으로 말을 하는 거냐?]

약간의 불만이 섞인 말에, 군터가 대꾸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당신들은 왜 이런 희한한 방식으로 대화하는 거지?"

[말에는 거짓이 섞이기 쉽기 때문이지.]

군터는 곧바로 납득했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지만, 어렵지 않게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

[단지 나의 바람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쿠엘단을 마주했을 때는 마치 흐릿한 안개 너머를 보는 듯했으나, 줄카의 기운은 쿠엘단과는 달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아니 헤이모라의 성벽을 제법 멀리 뒀을 때부터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 거대한 존재감을 느꼈다.

[유치한 감정이지. 그렇지 않은가?]

우스운 일이다. 인간에서 거듭났다고 하면서도, 이런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린다는 것은.

[하지만 결국 이런 유치함마저도 반기게 될 거야.]

줄카가 그의 무기를 쥐었다.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검이었다.

***

헤이모라를 떠난 군터는 곧장 테리브란으로 향했다. 그는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궁으로 가 입궁을 청했고, 그의 요청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군터는 황자와 독대했다.

"그와 만났나?"

"그렇소. 그는 당신을 도우라 하더군."

"그래서 뭐라고 했지?"

"황자가 나를 실망케 않는 한, 나 역시 그를 실망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황자, 자콥 트라소프가 피식 웃었다.

"불충 아닌가?"

"난 당신에게 충성하지 않으니."

"그 말, 다른 이들 앞에서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소.]

머릿속을 울리는 말에, 자콥 트라소프의 웃음이 옅어졌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사였던 것일까.

대전 한가운데 서 있는 자는 그가 그토록 꺼리던 자들과 닮아 있었다. 아니, 그들 중 하나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지.'

줄카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패배 대신 타협을 택했을 때부터 그에게 이런 생각을 할 자격 따위는 없었다.

'나는 길은 잃었는가.'

아니.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구차한 자기변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창에 발은 담갔을지언정, 그는 처음 바라보았던 목적지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어디까지 들었나?"

[리비암에 있는 자가 암중에서 일을 획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줄카는 그를 적대한다는 것.]

"다 들었군. 그런데…왜 그들처럼 이야기하는 거지?"

[입으로 하는 말에는 거짓이 섞이기 쉽다더군. 타당하다고 여겼소.]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 하여 무작정 그들의 방식을 좇는다면, 넌 더욱 빠르게 그들처럼 변할 것이다. 미련이 없다면 그리 해도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지 않은가?"

물음. 아니, 설득.

군터는 황자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답했다.

"…맞소. 아직은 아니지."

왜인지 모르게, 며칠 만에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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